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92
모용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자기가 부단주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비룡문 사람 아니오?”
더구나 양호법이라면 한창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기수가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모용가의 높은 이름을 흠모해 왔습니다. 이렇게 소가주를 만나게 되니 제 못난 재주를 시험해보고 싶어 나왔습니다.”
모용인의 표정이 금세 풀렸다.
높은 이름이니, 흠모니 하는 단어에서 자기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좋소! 한 번 겨루어 봅시다! 미룡문이건, 우리 모용가건 좀 더 솜씨가 있는 사람이 부단주가 되어야 옳겠지요.”
그는 장검을 뽑아들어 기수를 겨누었다.
취의청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남의 싸움이라면 최고의 구경거리!
전통 깊은 모용세가의 소가주와 최근들어 무림맹 내 최고 인기인 비룡문 양십일이 맞붙었으니, 구경꾼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는 땀이 났다.
모용인은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제 양십일을 쓰러트리기만 하면 이제까지 그가 쌓아온 명성을 모두다 자기가 차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자꾸 입 꼬리가 올라갔다.
기수는 새로 만든 장검을 천천히 들어 올린 후 느리게 기수식을 취했다.
어느 정도 상대에게 예의를 표하는 자세였다.
그런 그를 보며 모용인의 눈빛이 변했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위압감.
양십일은 그가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고수였다.
모용인은 이를 악물었다.
‘기세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는 마음의 부담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선공을 가했다.
날카로운 검초에 기수의 눈이 반짝였다.
‘제법인데?’
실전에서 처음 써보는 새 검의 무게가 약간은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어색함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고, 서서히 반격이 시작되었다.
취의청 안 여기저기서 탄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양십일과 맞상대하는 모용인의 검술을 보면서 섣불리 도전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수 역시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예전 구화산에서 천외존자와 싸울 때에 비하면 많이 늘었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당시 솜씨를 드러냈던 그의 두 형 모용각과 모용상에 비하면 상당한 수준의 상승 무공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형이 차례차례 죽고 졸지에 외아들이 되니까 그의 아버지나 본인이나 절박한 마음에 내공증진과 초식연마 모두에 특단의 조치를 한 거라고 짐작이 되었다.
‘하긴, 충격을 받긴 했을 거야.’
기수는 자기 검초를 받아내기 위해 쩔쩔매는,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모용인을 보면서 약간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버르장머리를 고쳐 줄 작정으로 나왔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그동안 진짜 열심히 노력한 모양인데 내가 구태여 기를 꺾을 필요가 없지.’
이 정도 실력이면 현무각의 소중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수는 조금씩 검에 실은 내력을 줄여갔다.
치열하던 싸움이 차츰 백중세로 바뀌자 취의청 안의 구경꾼들은 두드러지게 모용인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약자 쪽을 응원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본능.
기수는 계속해서 힘을 덜어냈다.
마치 후반 중반을 넘어서면서 체력의 한계를 보이는 축구선수들처럼….
이윽고 모용인이 우세를 점하자 취의청 안은 대놓고 소란스러워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기수는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는 모용인의 검을 강력하게 한 차례 밀어낸 후 검을 바닥에 세우고 포권 했다.
“제가 졌습니다. 모용세가의 검술은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감탄했습니다.”
“와아!…..”
구경꾼들이 함성을 질렀다.
모용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수를 바라봤다.
구경꾼들은 몰라도 대결의 당사자인 그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의 그 검초는 이제까지 의기양양하던 자신의 우세를 한 순간에 뒤집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경력이 담긴 한 수였다.
모용인은 양십일이 자기를 봐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역시 기수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양호법이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셨을 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겸손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기수는 진백 쪽을 보고 미소 지었고, 진백은 모용인을 부단주로 선포했다.
“와아!….”
모두들 박수를 치며 모용인을 축하해주었다.
진백이 기수에게 다가와 슬쩍 물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기수가 일부러 져준 것을 그는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 하핫!… 그렇습니다.”
“잘 했네. 우리에겐 모용세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예. 저도 그 점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처음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니겠는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동안 사하가 기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진짜 밀린 거야?”
“좋을 대로 생각해.”
사하는 기수 표정을 살피고 웃었다.
“훗!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너도 한 번 도전해보지 그랬어?”
“난 뭔가 책임 있는 일을 맡을 처지가 못 돼. 우리 제자들을 무사히 보타산까지 데려가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야.”
“실력은 되고?”
“당연하지.”
기수와 사하는 마주보고 웃었다.
진백은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일사천리로 조직안을 발표했다.
미리 준비한 조직도에 부단주만 추가하면 되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리고 넉넉해진 대출금을 풀어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모용인이 기수를 찾아왔다.
어제 일에 대한 감사표시를 하기 위함이었다.
기수는 그의 무공뿐만 아니라 사람됨도 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뭔가 신중하고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모습이었다.
모용인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제 부단주 얘기를 처음 꺼낼 때까지만 해도 비룡검문을 어느 정도 우습게 본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양십일과 겨뤄보고 나서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모용세가의 위신을 살려주려고 일부러 져주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니까 상대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와 기수를 따로 만난 것이다.
“우리 모용세가는 앞으로 양호법과 비룡검문의 일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수는 최대한 정중하게 모용인을 대접해서 보냈다.
사실, 그에겐 개인적으로 미안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약선문주의 딸 고원경이 바로 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모용인 대신 나가 천외존자를 죽임으로서 빚은 갚았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그가 두 형의 죽음을 극복하고 가문의 영광을 재건하기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문밖까지 나가 모용인을 전송하고 돌아서는 기수에게 한 노인이 말을 걸었다.
“이보게 젊은이.”
“예. 노인장.”
기수는 그의 남루한 차림새에서 노숙자를 떠올렸다.
키는 작달막하고 네모난 얼굴엔 쪼글쪼글한 주름이 가득했으며 흰 머리는 거의 다 벗겨져 몇 가닥만 남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만 꾀죄죄한 게 아니라 옷도 남루하기 짝이 없어서 개방 사람들도 아는 척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린내는 안 났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건가?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데 함양 성까지 좀 데려다줄 수 없겠나?”
기수로선 당황스런 일이었다.
치매 걸린 노인이 버스 정거장 찾는 것도 아니고…
가는데 1시간,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노인 걸음이라면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무림맹 4개 단이 출정에 대비하여 집중적인 훈련에 돌입해야 하는 바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기수 입장에선 노인을 팽개쳐 둘 수도 없었다.
“노인장. 제가 제자 한 명을 딸려서 길 안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젊은이.”
“별말씀을요.”
“그런데, 다른 사람 말고 자네가 좀 해주면 안 되겠나?”
“저는 일이 좀 있어서…”
“바쁘기야 하겠지만, 내 말을 제대로 받아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 다른 사람들은 다들 들은 척도 않더라고. 그러니 딴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자네가 좀 해주게.”
기수는 노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떠한 기도도 느껴지지 않고 호흡도 짧고 거칠었다.
무림인이 아닌 것이다. 낮 시간 동안에는 장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 휩쓸려 들어온 게 분명했다.
기수는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곳에 사람이 수천 명이나 있지만 그들 중 이 노인에게 관심 가져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사마연합과 현현각을 깨부수기 위해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순우광과 조치성을 불러 훈련 일정에 대해 얘기하고 뒤를 부탁했다.
“한 시진, 길어야 두 시진 안에 돌아올 테니 잘 좀 봐 줘.”
“어디를 가시는 데요?”
“그건 밝히기가 좀 그래.”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기수는 노인과 함께 장원을 나갔다.
노인의 걸음은 예상보다 더 느렸다.
그리고 말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나는 성이 합(合)가야. 그리고 이름은 비(肥)지. 우리 아버지가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아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우리 집안 남자들이 대대로 키가 작고 비쩍 말랐거든. 그래서 형은 키가 크라고 장, 둘 째 형은 대, 나는 비라고 지었어.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크크크…. 삼형제가 전부 똑같아. 작고 말랐지. 씨 도둑질은 못한다니까. 크크크….”
“그렇군요. 하지만 영웅은 키가 크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영웅? 크크…. 이 친구가 사람 볼 줄 아네. 내가 소싯적에는 정말 대단했지. 반하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장안까지 화물을 실어 날랐단 말이지.”
“아! 사공이셨군요.”
투박하게 굳은 살 박힌 두 손은 몸의 다른 부분에 비해 상당히 컸다.
“내 배가 떴다 하면 황하의 수적들이….”
“모두 도망쳤나요?”
그러자 노인이 눈을 흘겼다.
“이치에 맞게 생각을 해야지. 내 배가 뜨면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노 젓는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거든.”
“예. 그러셨군요.”
“크크… 노를 젓는 요령에 대해 좀 가르쳐줄까?”
기수는 노인의 말을 모두 받아주었다.
현무각 내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꼭 자기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진백과 모용인이 서로 돕고, 순우광과 조치성, 사하도 각자 자기 역할을 해낼 것이었다.
평소 바른생활 청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늘만큼은, 적어도 이 노인을 집으로 바래다주는 동안만큼은 그냥 노인에게 맞춰주자는 생각을 했다.
노인이 얼마나 오랜 세월 외롭게 지냈으면 생면부지인 자신을 붙잡고 이렇게 떠들어대나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직 살아계신 외할아버지도 생각났고, 얼마 전에 돌아가신 사부님도 생각났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나니까 대화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는데, 노인의 걸음이 자꾸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잠시만 쉬었다 갈까?”
“어르신. 제가 업어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를?”
“예. 그러면 길을 훨씬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노인이 살짝 섭섭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나와 빨리 헤어지고 싶은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귀찮아하는 것 같아.”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어르신을 업고 천천히 걷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좋지.”
노인은 사양하지 않고 잽싸게 업혔다.
기수는 그의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살짝 놀랐다.
업고 걷는 내내 노인은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고 기수는 얘기를 다 받아주었다.
어떤 때는 지겹기도 했지만, 그래도 딱 하루만 그렇게 하기로 각오한 것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한참 걸어 강변에 다다르자 노인이 말했다.
“날 내려주게.”
기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노인이 기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자네 사람 됨됨이가 참 무던하이.”
“하핫!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무공은 어떤가 좀 볼까?”
기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노인을 둘러싼 기도가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다, 당신….!”
“미안하네. 내가 좀 짓궂은 면이 있지. 크크크….”
기수는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상대의 기도가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기감을 완전히 속였다는 것은 자기보다 고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신은 누구요?”
“으잉? 젊은 사람이 왜 이리 정신이 없나? 이제까지 실컷 얘기를 했는데. 이름부터 살아온 내력까지….”
“합비? 그게 당신의 이름입니까?”
“그렇다니까.”
기수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런 이름은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