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93
인적 없는 강변.
정체를 숨겼던 고수 합비와 마주 선 기수는 놀라고 당황했던 순간이 지나가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불쾌감이었다.
“당신.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겁니까?”
“어허! 눈매가 왜 그렇게 변했나? 잘 하면 한 대 치겠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흠….!”
합비는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요번에 음종의 전인이 나타나서 무림맹 아이들을 꽤 심하게 다루었던 모양이더군. 원래는 내가 간여할 바 아니지만, 내 고향 합가촌에까지 무림인들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모른 척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합가촌이라면…”
“자네들이 진치고 있는 언덕배기 맞은편 마을 말일세.”
“그렇군요. 어르신은 그 합가촌의 촌장 되십니까?”
“촌장은 내 손자야.”
그렇다면 본인 나이는 몇 살이나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기수가 잠시 합비의 표정을 살핀 후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실 생각이라면 무림맹주님을 만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합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난 오래 전에 무림을 떠났는데, 다시 나온다면 강호의 형제들이 날 얼마나 우습게보겠나. 아!… 내 친구들은 지금쯤 다 죽었겠군. 크크크…. 어쨌거나 한 번 떠난 속세에 다시 미련을 보여선 안 된단 말씀이야.”
“그러면….”
“내가 소문을 좀 들어봤지. 그랬더니 다들 비룡문의 양십일이란 녀석이 꽤 활약을 했다고 하더군. 그게 자네 아닌가?”
“맞습니다.”
“그래서 한 번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제자로 삼아서 내 대신 싸우게 할 생각으로 기다렸던 거야.”
“저를 제자로 삼는다고요?”
“그래. 일단 성품은 합격했고, 다음은 솜씨를 좀 보고 싶어.”
“싫습니다!”
“뭐라고?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합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기수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 비룡검문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따로 사부님이 있습니다.”
상대의 무공이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꼭 사부로 모셔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자 합비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사부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내가 가르치는 무공들은 아주 유용할 테니까 그냥 못 이기는 척 배워 둬. 그럼 작게는 무림맹을 구한 영웅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무림 역사 최고의 고수로 우뚝 설 테니까.”
“저는 어르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림 역사 최고 고수의 제자가 될 것 같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거야 내가 원래 명성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까…”
“여하튼 더는 배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수가 포권을 하고 돌아서려 하자 합비는 다짜고짜 손을 썼다.
“보낼 수 없어!”
그의 장력은 기수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비룡검법으로 상대해야 하겠지만 위기감을 느낀 기수는 분광권을 써서 간신히 그의 공격을 쳐냈다.
“왜 이러십니까!”
합비의 팔과 닿았던 양 팔뚝 욱씬거렸다.
“호오! 요놈 봐라? 이제 봤더니 태무신궁 출신이로구나. 할망구는 잘 있느냐?”
자신의 초식을 보고 사문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합비가 처음이었다.
확실히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고인이란 사실을 그의 장력을 통해, 그리고 안목을 토해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님의 실력이라면 능히 음종을 제압하고 무림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 같은 하수를 괴롭히고 계십니까?”
합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림엔 원래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누군가의 평화는 약자의 굴욕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원을 침범한 삼황맹과 그들에 협력한 제갈세가, 천마교, 일월신교, 녹림72채, 수로맹을 약자라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면 약자지. 별건가?”
“그 말씀은….”
기수는 갑자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합비의 말이 맞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때 천마교 사람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천마교에 대한 위협이 모두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수로맹의 채주로 있던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현재 대립하고 있는 무림맹과 사마연합도 각자 자기 동료와 사형제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것 아니겠는가.
옳고 그름의 구분. 누가 선이고 악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무림맹이 바라는 평화는 결국 사마연합에겐 저주가 되겠군요.“
그렇다면 그걸 어찌 평화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어라? 말귀를 금방 알아먹네? 고지식한 성품은 아니군. 아주 마음에 들어! 네놈을 반드시 내 제자로 삼고 말겠다.”
기수는 냉소를 지었다.
“꿈 깨십시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무공이 고수고, 생각하는 바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부로 삼으란 법은 없었다.
합비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고집이 세구나. 상승무공을 익히려면 그런 성품도 필요하지.”
그의 눈에는 모든 게 다 좋게만 보이는 듯 했다.
기수는 그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혼자 가셔도 되겠지요? 그럼 전 이만….”
포권을 하자마자 곧바로 선풍비를 시전했다.
몸 상태가 중독 이전에 비하면 약간은 안 좋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풍비의 스피드는 합비와의 간격을 순식간에 벌려놓았다.
“기다려라! 이 고연 놈 같으니라고!”
합비 역시 깊은 내공을 자랑이라도 하듯 놀라운 속도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기수는 북궁심법을 동원하여 내력을 한 층 더 끌어올렸다.
그러자 조금씩 가까워지던 간격이 다시 벌어졌다.
“이놈아! 나를 꼭 숨차게 만들어야 하겠느냐?”
“어르신은 어리신 나름대로 방법을 찾으십시오. 저는 끌어들이지 마시고요!”
“글쎄. 한 번 강호를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 체신머리없다고 한다니까!”
“그럼 까마득한 말학 후배 괴롭히는 건 괜찮….”
기수는 갑자기 느껴지는 기이한 힘 때문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합비와의 간격은 충분했다.
그런데 몸이 뭔가에 둘러싸이는 느낌이 들면서부터 속도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둘러싸는 느낌은 점점 강해져서 마치 물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속도가 뚝 떨어졌고, 힘을 줄수록 저항은 오히려 더 세졌다.
합비가 금세 따라붙어서 말했다.
“이놈이 감히 나를 숨차게 만들어?”
기수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무슨 사술을 쓰신 겁니까?”
“사술이라니 이놈아! 네가 나한테 잘 보이면 배우게 된 기술 중 하나다.”
기수는 이제까지 수많은 강적들을 만나봤지만 합비 같은 수법은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바짝 일었다.
그러나 한 번 안 하겠다고 했는데 뜻을 굽히기는 싫었다.
“이 좋은 기술. 합가촌을 지키는데 쓰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기수가 다시 돌아서려 하자 합비는 화를 냈다.
“평생 따라다녀도 배울 수 있을까 말까 한 비결을 거저 가르쳐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고집도 적당히 피워야지!”
“제가 어르신의 기술 배울만한 사람을 몇 명 추천하겠습니다.”
기수가 절충안을 제시했지만 합비는 거절했다.
“너 아니면 안 돼! 내 무공은 워낙 위력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가르쳐줄 수 없어.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인간성부터 확인을 해야 한다고.”
“저 그렇게 좋은 놈 아닙니다.”
“그건 나도 이제 알겠다.”
“그럼 이만 놔주십시오.”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는 없지. 바탕은 괜찮은 놈이니까, 다른 놈 찾아다니며 시간 낭비하느니 그냥 네놈을 때려서라도 길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아.”
합비는 기수의 경공술을 보고 상당한 고수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제자를 거두어도 이런 놈을 거두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물론 기수는 그의 제자가 될 마음이 없었다.
처음엔 어느 정도 호기심이라도 있었지만, 강요나 명령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자꾸 이러시면 저도 진심으로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허! 이놈 보게. 이젠 노인을 협박하네? 야! 이놈아. 내가 아무리 무림을 떠나 있었다고 해도 네놈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냐?”
“겉만 봐선 모르는 겁니다.”
“크크크…. 네놈이 숨겨둔 비법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다. 태무신궁 정도에 겁먹을 내가 아냐.”
“그보다 훨씬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기수가 계속 강경한 태도를 취하자 합비도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 까다로운 놈이로구나. 오냐! 그래. 네놈이 자꾸 내 말을 안 듣고 도망친다면 난 네놈 문파로 찾아가서 문주부터 제자까지 전부 다 죽여 버리겠다! 어떠냐?”
합비는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만사가 제멋대로군요.”
“사내가 필요한 일을 할 때는 독해야 하거든.”
그 말을 들은 기수가 냉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독하게 손을 쓰더라도 탓하지 마십시오.”
자기 때문에 비룡검문에 피해가 가도록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부간에 결판을 내야만 하는 것이다.
기수가 정색하고 내공을 끌어올리자 합비의 표정이 변했다.
“이놈! 이거…. 자꾸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그러나 그의 입가엔 곧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내 제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네 힘의 끝을 보여 봐라!”
그리고는 이번에도 먼저 기수를 공격했다.
기수는 상중하단전에 모두 집중을 하고 분광권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꽈릉!… 꽈르릉!…..’
두 사람의 대결이 본격화 되면서 무시무시한 굉음과 폭음이 난무했다.
사람의 살과 뼈가 부딪히는 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수는 이를 악물었다. 합비의 장과 얽힐 때마다 양팔은 물론, 몸 전체로 통증이 퍼졌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기수는 합비의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고 작고 체중도 가벼운데 장법의 위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특히 그의 장은 닿는 순간 한 번에 타격이 오는 게 아니라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몇 단계를 거치며 충격이 전달되는 것 같은 특이함이 있었다.
그래서 닿을 때보다 떨어진 이후에 찡! 하고 통증이 울려왔다.
기수는 그 통증의 여파가 조금씩 자신의 진기 흐름을 교란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난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앞으로 계속 힘이 깎이기만 할 뿐, 역전의 기회는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승부를 봐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야.’
기수는 합비를 상대로 살초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쌍방의 대결은 몹시 험악한 수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털끝만한 허점이라도 보였다가는 어느 쪽이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합비도 언제부터인가 웃음을 거두고 싸움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파천강기냐, 단정홍이냐.’
기수 입장에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테무신궁의 분광권이 상대에게 읽힌 상황에서 잔백지 정도를 펼쳤다가는 오히려 패배의 빌미가 될 것이었다.
선택은 파천강기.
합비를 죽일 마음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딱 한 번의 기회.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기수는 정신을 집중하고 상대의 장법 투로를 기억하여 손버릇 내지는 습관에 해당하는 미묘한 빈틈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다시 보이자 망설이지 않고 파천강기를 발출했다.
퍽! 소리와 함께 파천강기는 합비의 겨드랑이에 제대로 적중했다.
“크윽…..!”
합비는 신음을 토하며 뒤로 날아갔고, 그대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성공이다!”
기수는 즉시 열 손가락 모두에 파천강기를 끌어올린 후 합비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는 팔다리를 활짝 벌린 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하나로 집중한 파천강기가 제대로 카운터를 먹인 셈이라 기분이 진짜 통쾌했다.
그러나 기수는 열 손가락의 강기는 쓰지 않고 거둬들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합비를 흔들어 깨웠다.
“어르신. 정신 차리십시오.”
그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 고수라면 무림맹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만 해도 적에겐 엄청난 압박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그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완맥을 잡아보았다.
그러자 합비가 눈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왜 공격을 멈춘 거냐?”
“아! 괜찮으시군요?”
“대답해라. 왜 계속 공격하지 않았느냐고.”
“쓰러진 노인을 무슨 재미로 치겠습니까?”
“하하하!…..너 진짜 마음에 든다.”
합비는 벌떡 일어섰다.
기수는 그의 기도가 파천강기에 적중되기 전에 비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괜한 걱정을 했던 것이다.
‘설마… 이 사람도 파천강기에 내성이 있단 말인가?’
그제서야 맞은 자리를 확인해 보니 옷이 멀쩡했다.
그렇다면 합비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반격을 염두에 두고 기다렸을 가능성이 컸다.
기수는 암담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