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98
사람들이 쉬는 동안 기수는 머릿속으로 지도를 떠올리며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떠나기 전 무림맹주가 했던 말, 사상자나 포로가 생기면 곤란해질 수 있다는 얘기가 자꾸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1시간을 더 서쪽으로 가도 적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조심스러움 대신 조급함이 몰려왔다.
경공 콘테스트만 했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너무 허탈한 일인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능소화가 물었다.
“련주님. 둘로 나누어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좋습니다. 해지기 전에 뭐라도 하나 찾았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적을 발견하면 일단 신호부터 보내야 합니다. 싸우기 전에…”
“알겠습니다.”
봉우리 두 개를 정해 그곳까지 각각 따로 간 후 나중에 중간지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후 인원을 절반으로 나누어 움직였다.
기수 쪽엔 당운영과 호운혜, 사하가 모두 남았는데, 사하와 호운혜가 순우광, 조치성을 밀어내고 기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기수는 둘 사람을 능소화 쪽으로 딸려 보내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산길을 헤집고 다니던 기수는 경공으로 달려가다가 전방에 뭔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멈춰 섰다.
워낙 급정거라 뒷사람과 부딪힐 뻔 했다.
“왜 그러십니까? 호법님.”
“부비트… 누군가 선을 걸어놨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검정색 가느다란 선이 무릎 높이로 걸려 있었다.
굵기가 머리카락 정도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존재 자체를 모를 정도였지만 기수의 안력은 피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따라가 본 결과, 선은 협곡 쪽으로 이어졌고, 그 안에 땅을 파고 숨어 있는 칠팔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기수로서도 선을 따라오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의 기척인 것으로 보아 땅을 아주 깊이 판 듯 했다.
기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수신호로 인원을 땅굴 덮개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포위망이 완전히 갖춰진 것을 확인한 후 나뭇가지로 위장한 덮개를 확! 열어젖혔다.
“헉! 누, 누구냐!”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사마연합 놈들은 깜짝 놀라 무기를 집어 들었지만 기습을, 그것도 기수에게 당했는데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모두를 제압한 기수는 순우광, 조치성에게 놈들의 굴 안을 뒤지도록 했다.
검은 선 끝에 달린 작은 종, 연락용 전서구 둥지, 종이와 먹필, 그리고 식량과 물병 등을 찾을 수 있었다.
기수는 포로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마혈을 풀어주고 물었다.
“너희 본진은 어디로 갔지?”
“모른다!”
옆에서 순우광이 발을 구르며 호통을 쳤다.
“이놈!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
그러나 기수는 손짓으로 순우광을 진정시켰다.
사마연합 포로의 내공은 별로 깊지 않았다. 염정구심숨에 동조된 이상, 사마연합의 정찰병은 좋건 싫건 결국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들의 임무는 무엇이냐?”
기수의 질문에 상대는 딴소리를 했다.
“무림맹 놈들을 모조리 주살하는 것이다.”
기수는 그의 대답과 달리 일종의 정찰 라인을 구축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능소화가 간 쪽에도 이런 식의 감지선이 설치되어 있을 거란 뜻인데?’
기수는 마음이 급해졌다.
능소화가 감지선을 발견했다면 지금 자신이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숨어 있는 적 정찰병들을 잡았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선이 너무 가는 게 사실이었다.
기수는 그동안의 관찰을 통해 경공이 좀 떨어지는 10명을 지명한 후 말했다.
“이 자들을 본진으로 데리고 가서 맹주님에게 심문을 받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들은 아미파 능소저와 합류한 뒤에 귀환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련주님.”
그들은 기수의 명에 따랐다.
기수는 그들과 헤어지기 전에 덧붙여 말했다.
“몹시 중요한 일이니 실수가 있어선 안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사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들을 덜 중요한 임무로 먼저 떨구어 내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포로를 끌고 모두 멀어지기를 기다린 후 기수는 남은 일곱 명에게 말했다.
“능소저 쪽 일행이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내공을 최대한 끌어 올리고 나를 따라와 주십시오.”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기수의 지시에 따랐다.
일행이 가까스로 따라올 속도로 능소화의 뒤를 쫓은 기수는 오래지 않아 그들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큰일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기척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그들 중 몹시 익숙한 기운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합비가 자신을 단련시킬 때 수없이 발출하던 금류의 기운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능소화 일행이 현현각 사람을 만났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강렬한 휘파람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상당히 먼 거리인 것 같은데도 뚜렷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음공이 분명했다.
“나 먼저 갈 테니, 저 소리를 따라오시오!”
순간, 기수의 신형이 펑! 하는 폭음을 내며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폭사되었다.
함께 있던 용봉련 사람들은 그의 공경에 놀라기도 하고, 현현각의 음공에 겁먹기도 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속도를 높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련주를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수는 오래지 않아 수십 명이 몰려 있는 공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여기저기 쓰러져 비틀거리는 용봉련 사람들이었다.
능소화와 단운비만 두 발로 서 있을 뿐, 나머지는 무릎을 꿇거나, 아예 양손까지 다 짚은 상태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능소화와 단운비도 안색이 해쓱했다.
기수는 경공술로 빠르게 접근하면서 양손으로 단검을 뽑아들었고, 오행류 중 화류 강기도 끌어올렸다.
적의 수는 사오십 명.
사마연합군의 수는 별 의미가 없었다.
현현각 루주일 것으로 판단되는 소녀 한 명과 그의 좌우에 선 두 명의 징잡이.
그들이 문제였다.
소녀는 손에 생황을 들고 있었는데, 아마 오면서 들은 소리는 휘파람이 아닌 그 악기에서 난 소리인 듯 했다.
기수는 능소화와 단운비 사이에 착지하자마자 단검 두 개를 동시에 던져 소녀를 꿰뚫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우선 능소화와 단운비에게 물었다.
“괜찮소?”
“예. 아, 아직은요….”
그러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나오고 있었다.
단운비는 아예 대답도 못하고 손짓만 했다.
소녀 루주는 기수의 경공 실력에 흠칫 놀랐지만 곧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덫에 걸린 놈이 하나 더 늘었구나. 우리에겐 잘 된 일이지.”
그녀는 기수가 손에 든 단검을 던지기 전에 제압해두는 게 좋다 생각하고 즉시 생황을 입에 가져가 불기 시작했다.
“으으….”
“으음….”
좌우의 능소화와 단운비가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기수 역시 폐를 누르는 압박감으로 인해 속이 메슥거렸다.
그러나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화류 강기에 집중할수록 압박감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했다.
기수는 손에 들고 있던 단검 두 자루를 천천히 다시 조끼의 가죽 검 집에 꽂았다.
소녀 루주는 기수의 행동에 눈을 부릅뜨고 생황을 더욱 강하게 불었다.
능소화와 단운비는 기수의 측면으로 멀찍이 자리를 피했다.
음공이 기수에게 집중되다 보니 그에게서 멀어질수록 고통이 덜했던 것이다.
강화된 공격에 기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단검을 다시 뽑지 않았다.
그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단검을 바로 던지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단검을 던져 제압하자는 건 합비를 만나기 이전에 세웠던 작전.
합가촌에 들어가 온갖 고통을 다 이겨내며 수련을 했는데 상대를 쉽게 죽여 버리면 그동안 수행의 성과를 확인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소녀 루주의 생황 소리를 들은 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단검을 도로 꽂은 것이다.
기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다가서자 소녀 루주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호에 나와 자신의 음공을 견디는 적수는 처음 만난 것이다.
생황소리가 더욱 강해졌지만 기수는 뚜벅 뚜벅,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 거리를 좁혔다.
10미터 이내까지 다가가자 좌우에 있던 징잡이들이 시선을 교환 후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루주를 지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기수는 코웃음을 치며 주먹 두 방으로 놈들을 넉다운시켜 버렸다.
음공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딱 한 주먹거리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소녀 루주의 얼굴에 공포감이 번졌고, 생황 소리는 거의 귀를 찢을 듯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수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계속 다가오자 결국 그녀는 뒤로 돌아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막 돌아선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
놀랍게도 그는 기수였다.
선풍비를 시전하여 소녀 루주가 돌아서는 움직임보다 빠르게 퇴로를 차단한 것이다.
그녀는 기수의 요혈을 향해 있는 힘껏 일 장을 날렸다.
그러나 음공이 아닌 적수공권으로 펼치는 무공엔 한계가 있었다.
기수는 간단히 그녀의 완맥을 움켜잡아 모든 움직임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와아!….”
뒤늦게 도착한 사하, 호운혜, 당운영, 순우광, 조치성 등은 그 광경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현현각의 무시무시한 음공이 양십일에 의해 깨진 것이다.
쓰러져 신음을 토하던 사람들도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기수가 나설 필요도 없이, 사마연합의 잔당들은 그들이 나서서 모두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쫓아버렸다.
주변 상황이 정리된 후 기수는 사로잡은 소녀 루주를 자세히 살펴봤다.
그녀는 분명 10대 중반의 소녀였다.
그런데 두 부분이 이상했다.
눈동자가 탁했고, 이빨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몸의 나머지는 소녀에서 시간이 정지되고, 두 부분만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였다.
“너. 가까이에서 보니까 꽤 징그럽구나.”
“으으…..”
그녀는 추가로 혈을 짚인 상태라 생황을 불 수도 없고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기수는 자신의 성취에 몹시 만족했고, 앞으로도 합비의 방식에 따라 더욱 열심히 수련하리라 결심했지만 용봉련의 수장으로서 조심성도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차단한 것이다.
능소화가 여전히 어지러운지 이마를 짚으며 다가와 물었다.
“련주님. 이 아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기수는 소녀 루주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압박을 가해보았다.
“글쎄요…. 데려가 봐야 심문을 하기도 어려울 테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그녀는 몹시 놀라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와중에도 염정구심술이 파고들 빈틈을 찾기는 의외로 어려웠다.
그때 당운영이 나서서 말했다.
“이 아이는 제게 맡겨주세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녀가 현현각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당운영은 품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더니 말릴 사이도 없이 소녀 루주의 입 안에 알약 하나를 집어넣은 후 말했다.
“진기를 흐트러뜨리고 온몸의 힘을 다 빼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어렵게 만드는 약이에요. 목소리는 낼 수 있지만 진기를 끌어올릴 수 없으니 음공을 펼치기는 불가능할 거예요. 여섯 시진마다 한 알씩 먹이면 되요.”
그런 약이라면 본진으로 압송해서 제대로 심문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약효가 퍼지는지 소녀 루주의 표정이 차츰 변했다.
입은 힘없이 벌어지고, 어깨와 관절들으 축 늘어졌으며, 눈은 풀렸다.
기수가 당운영에게 말했다.
“약효가 빠르군요.”
“어쨌거나 이 아이의 심문은 제게 맡겨주실 거죠?”
“맹주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당소저의 뜻이 그렇다면 맹주님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고마워요. 련주님.”
“자! 이제 어두워지기 전에 철수합시다.”
기수가 소녀 루주를 들쳐 업으려고 하자 당운영이 말렸다.
“잠깐 그냥 놔두세요. 거쳐야 할 과정이 좀 있어요.”
기수는 의아했지만 음공에 당했던 사람들에게 약간의 휴식 시간을 주는 것도 좋다는 생각에 소녀 루주를 혼자 놔두었다.
“그녀의 혈을 풀어주세요.”
기수는 당운영의 요구대로 했다.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기수와 당운영을 번갈아 쳐다보던 소녀 루주가 갑자기 신음을 토하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어어어!…. 어어어!….”
그녀는 짐승처럼 괴상한 소리를 냈는데, 일그러진 표정과 계속 흐르는 땀, 뒤틀리는 전신 근육으로 미루어 볼 때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았다.
기수가 놀란 표정으로 당운영에게 물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혹시 약을 잘못 먹인 것 아닙니까?”
당운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대로 먹였어요. 사지의 힘을 다 빼놓고 극악의 고통을 맛보여주는 약이에요. 포로는 혀를 깨물어 죽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죠. 하지만 통증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느끼게 되요. 약기운이 이어지는 여섯 시진 동안….”
소녀 루주를 내려다 보는 당운영의 표정엔 어떤 희열 혹은 쾌감 같은 게 보였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역시 사천당가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
좌우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녀 루주가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당운영에게 말했다.
“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내가 아는 걸 전부 다 말씀드릴 테니,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당운영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난 네가 끝까지 현현각에 대한 의리를 지켰으면 좋겠어.”
“아아!…. 제발….”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소녀 루주는 원한 가득한 눈빛으로 당운영을 노려보며 진기를 끌어 올렸지만 한 가닥도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