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00
지붕 위에 내려선 기수는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누구지?’
이제까지 자신의 감지 능력을 벗어난 사람은 합비 정도에 불과했다.
기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직접 뛰어들어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혹시 현현각 놈들일지도 몰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화류의 호신강기까지 끌어올렸다.
순간, 그의 주변에 화염이 확! 일어났다.
기수는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뭐야?”
불꽃은 금세 사라졌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기수는 예전에 합비가 손바닥에 화염 만들어 보이던 광경을 떠올렸다.
‘설마… 나도 그 경지에 올라선 건가?’
기수는 다시 내공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2미터 정도의 반경을 두고 불꽃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우와! 씨발….. 나 존나 천잰데? 이게 되다니…”
한동안 안 쓰던 욕들이 막 튀어나왔다.
그만큼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기수는 전에 합비가 했듯이 손바닥을 펼치고 그 위에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그러자 불꽃이 이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불꽃은 몸 둘레에 퍼지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탔다.
신기한 점은, 손바닥에 별로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당황스러운 점은 진기 소모가 상당히 심하다는 것이었다.
불을 끈 기수는 집이 불타고 있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되었다.
‘내가 범인이었구나. 젠장! 인체 발화도 아니고….’
기수는 곧장 내려가 항아리에 떠 둔 물을 가장 불길이 심한 곳에 뿌렸다.
정확한 토스로 그 지점의 진화에는 성공했지만, 이미 사방으로 퍼져나간 다른 불길을 잡기는 힘들었다.
기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은 자꾸 번져 잘 마른 나무 기둥과 문짝을 삼키는데, 물도 없고 119를 부를 수도 없었다.
근처에 강이나 시내라도 있으면 항아리를 들고 달려갔겠지만 아쉽게도 수로는 합가촌에서 한참 멀었다.
무공이 고수라고 해도 이런 상황엔 아무 쓸모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손에 손에 물그릇을 들고 있었다.
“합춘이네 집까지 줄을 서라!”
한 노인이 소리를 치자 마을사람들은 마치 훈련이라도 한 듯이 줄을 서더니 릴레이로 물을 나르기 시작했다.
기수도 그들 사이에 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불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불은 완전히 꺼져서 연기조차 나지 않았다.
기수는 꺼진 불도 다시 확인한 후에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우물 있는 집까지 줄을 서게 하고 진화를 지휘한 사람은 이 마을 촌장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촌장님.”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기수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돌려보낸 후 집의 상태를 확인해봤다.
‘어르신이 돌아오시면 난 죽었다.’
상방 하나가 통째로 다 타버렸고, 기둥이 불에 반 이상 타들어가서 집 전체의 구조가 위태위태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몸에서 불을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기쁨이 반감되는 순간이었다.
‘내일쯤이면 돌아오실 텐데…’
기수는 한숨을 내쉰 후 정원석에 걸터앉았다.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사서 고쳐놓는 수밖에 없었다. 기둥 새로 세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화재라는 게 참 골치 아픈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재난에 협동하여 대처한 마을사람들도 인상적이었다.
기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을사람들은 약한 존재였다.
만약 전쟁이라면, 마을사람들 전부가 동시에 덤빈다고 해도 자신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 할 것이었다.
하지만 불을 끄는 데 있어서는 그들의 힘이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
천 명을 이기고, 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무공도 집 한 채 화염에서 구해내는 일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땅을 지키며 농사짓고, 가축 키우고, 채소를 가꾸는 일도 무공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파종부터 추수까지 인고의 나날들을 견뎌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들의 도움이 아니면 굶어죽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싸움 좀 할 줄 안다고 잘난 척 할 게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저것 치우고 정리하다 보니 오래지 않아 날이 밝았다.
그리고 집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촌장이었다.
그는 손자로 보이는 소년과 함께 왔는데, 촌장의 손에는 음식 바구니가, 손자의 손에는 옷이 들려 있었다.
“집이 타버렸으니, 아침 챙겨먹을 정신도 없을 것 같아서 음식을 좀 싸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배가 고팠다.
“옷도 이것으로 갈아입으십시오.”
그제서야 입고 있던 옷을 내려다보니 여기저기 타고 그을음이 묻어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일으킨 화염 때문은 아니고, 불을 끄려고 바쁘게 오간 흔적이었다.
기수는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밥도 먹었다.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촌장이 물었다.
“이 집을 산 노인은 어디 계십니까?”
“아! 볼 일이 있어서 외지에 가셨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아니면 내일쯤 오실 텐데 집 고칠 목수를 좀 고용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촌장님이 사람을 좀 구해주십시오. 목수 품삯과 재료비는 물론 촌장님께 소개료도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 노인 분은 정말 왕씨가 맞습니까?”
“예? 왜… 그러시는지요….”
기수는 합비가 정체를 숨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촌장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우리 집안 어른들과 비슷하게 생기셔서요…”
기수는 촌장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두건을 써서 잘 몰랐는데, 작은 키에 네모난 얼굴, 머리숱이 많이 부족한 것까지 합비의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모른 척 하고 물었다.
“집안 어른 중에 고향을 떠난 분이라도 있나보죠?”
“아닙니다. 하하!….저희 선조들은 모두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뭡니까?”
“제 조부님의 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늘 한이지요.”
“그렇군요.”
“자손 된 도리로서 어디에 묻히셨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이장을 하려고 늘 마음먹고 있지만 도무지 행적을 되짚을 수가 없습니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쌩쌩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이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조부님과 친분이 깊으셨나봅니다?”
“전 워낙 어릴 때였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조부님은 마을을 떠날 때까지 저를 몹시 아끼고 귀여워 해주셨다고 하더군요.”
합비와 촌장을 놓고 봤을 때 오히려 촌장이 더 늙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 농사만 지은 사람과 상승무공을 익힌 사람의 차이인 듯 했다.
“그분은 왜 마을을 떠나신 겁니까?”
“어른들께 들은 바에 의하면 조부님은 체격이 왜소해도 힘이 장사고, 권법도 익혀서 강호의 무뢰배들과 싸움이 잦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다칠 것을 염려하여 떠나셨다고 합니다.”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강호의 어떤 문파가 마을에 난입하여 조부님을 내놓으라고 집안 어른들을 사로잡고 고문을 했지요.”
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휴우…..! 많은 분이 그때 돌아가셨습니다. 제삿날이 같은 분들이 많지요.”
기수는 탄식을 토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며칠 동안 머물며 마을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들이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기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촌장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요. 관군이 몰려와서 범인을 잡는다고 거의 한 달 가까이 조사했지만 결국은 아무 성과도 없었습니다.”
“촌장님의 조부가 복수를 한 걸까요?”
촌장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범인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가족들은 오히려 조부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멀쩡하던 사람들이 조부님의 원한 때문에 엉뚱하게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기수는 합비가 정체를 숨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호행을 하다 보면 원수 만들기를 두려워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당하고 목숨까지 잃는 것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또한 극심한 책임감도 느꼈을 것이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합비에게나 그 가족들에게나 큰 상처가 남았을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나도 조심해야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역용술이 정말 좋았다.
양십일은 가족도 친척도 없는 사람이었다.
밥을 먹은 기수는 촌장과 함께 나갔다. 목수와 기둥 재료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촌장에게 인사를 했는데, 일부는 기수에게도 아는 척을 했다.
어제 불 끄러 와준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전부가 다 친척이구나.’
집성촌이라 그런지 얼굴 생김새까지 다들 비슷한 것 같았다.
한 아파트, 한 동, 한 라인에 살아도 층간 소음이라도 만들지 않는 한 서로 대화할 일이 없는 현대의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목수를 구하는 일은 마을 안에서 간단히 끝났다.
그러나 기둥은 함양성 근처까지 가야 하는 일이었다.
기수는 촌장과 함께 성밖 목재상으로 가서 기둥을 직접 골랐다.
합비가 마을에 가지는 미안함과 애정을 모두 알고 나니까 집 고치는 일을 대충 할 수 없었다. 최대한 좋은 재료와 솜씨 있는 목수를 써서 정성을 다해 완성시키고 싶었다.
주문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포졸 두 명이 촌장과 기수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관복 입은 남자 한 명이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났다.
촌장은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현승(縣丞) 나리를 뵙습니다.”
관리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기수 쪽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뭔데 인사를 안 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현승이라면 지현의 바로 아래 2인자로, 지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업무를 이어받는 부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기수가 인사를 할 이유는 없었다.
현대의 시만과 공무원 사이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 기수는 무림인이니까 촌장처럼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계속 현승을 노려보자 포졸들이 설쳐댔다.
“이놈! 무엄하다!”
“어디서 감히 눈을 부릅뜨느냐?”
기수는 고민했다.
‘빠르고 단순하게 죽일까?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일까?’
촌장이 황급히 나서서 말했다.
“이분은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저와 함께 목재를 사러 온 손님입니다.”
그래도 현승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기수는 시커먼 낯짝에 살이 피둥피둥 찐 그를 노려보며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혔다. 촌장과 함께 있는 동안 만났기 때문에 사고를 치면 합가촌에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기수는 고개와 상체를 동시에 숙였다.
공손하지는 않지만 양민이 관리 대하는 태도로 그럭저럭 봐줄 만 했다.
현승은 헛기침을 했고, 두 포졸도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기수의 키와 체격, 그리고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이다.
현승이 촌장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얘기한 건 어떻게 되었소? 기한이 다 되어 가는데…”
촌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그러자 현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이오! 관군에겐 당장 필요한 물자인데 아직도 준비를 안 했다니! 지금 지현 상공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렇다면 기한과 물량을 모두 맞추시오! 쌀 한 섬, 면포 한 필이라도 부족하면 경을 칠 테니까 그리 알고.”
“아, 알겠습니다.”
“에잉! 쯧쯧….”
현승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촌장을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들이 멀어진 후 기수가 촌장에게 물었다.
“저들이 뭘 원하는 겁니까?”
“이번에 난주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는군요. 오랑캐들이 곧 함양을 지나 장안까지 쳐들어 올 건데, 그에 대비하여 관군이 동원되었으니 군량과 면포를 바치랍니다.”
기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관군이야 나라의 세금으로 움직이는 것 아닌가.
“조정에서 할 일인데 왜 합가촌에 군량을 요구합니까?”
“지현 상공이 환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나 봅니다.”
기수는 화가 났다.
“동창에 아부하고 싶으면 자기 재산을 털어서 할 일이지, 왜 백성들더러 쌀과 면포를 내랍니까? 완전히 도둑놈 심보네…”
촌장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기수는 입을 다물고 거기에 대해 더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성들 돈으로 생색내려고 하는 관리를 그냥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