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01
집으로 돌아와 보니 목수들이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기수 입장에선 수행의 공간이 없어진 셈이라 무림맹 본진으로 귀환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러나 집을 태워먹은 사람이 책임감 없이 자리를 비우기는 좀 그랬다.
또한 호운혜와 마주칠 생각을 하니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질투심 폭발이나 다그침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늘 그렇듯 뻔뻔한 얼굴로 냉정한 멘트를 날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비룡검문의 호법으로서, 용봉련의 련주로서 양십일이 욕을 먹으면 그 비난이 고스란히 비룡검문의 명예실추로 이어진다는 데 있었다.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 무림맹 본진에 연기라도 올라오지 않는 한은 여기서 지내자.’
호운혜도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포기할 것 같았다.
기수는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도왔다.
그리고 함께 어울려 새참도 먹고, 술도 받아다 권하면서 마을사람들과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다.
빨리 복구하려는 욕심에 돈주머니를 풀어 고용을 늘리다 보니까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이 집에 들락날락거리고 마당엔 항상 음식 냄새가 풍기게 되었다.
기수 입장에선 중원에 와서 무림인이 아닌 일반 평민들과 어울려 지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모처럼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대화가 누적되면서 기수는 합가촌 사람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무식했다.
착하고 순박하긴 하지만 분명히 무식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냥 집안 어른, 동네 어른의 얘기를 듣는 게 전부이다 보니 농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몰라도 그 외에 정치, 사회적인 개념은 거의 백지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어쩌면 합가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일 것이었다.
기수는 촌장과 만났던 현승, 그리고 그 윗선에서 실질적 지시를 내린 지현의 횡포에 대해 공동전선은 구축하려고 했지만, 이 사람들과는 어려울 것 같았다.
예전에 상춘관 제자들을 선동해서 급식환경 개선을 요구하다가 대사형에게 얻어맞기만 했던 일도 생각났다.
‘결국 나 혼자 해야겠구나.’
그게 마음 편할 것이었다.
마을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니 용봉련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즐거운 이유가 더욱 뚜렷해졌다. 그들도 바탕의 사고방식이 전근대적인 것은 동일하지만, 그래도 공부한 게 많다 보니 뭔가 열려 있는 부분이 있었다.
합비의 귀가는 그가 말했던 것보다 많이 늦었다.
이틀이 더 지나 기둥이 제대로 선 날 밤.
마을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어둠 속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내 집에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아! 오셨습니까? 늦으셨네요.”
합비는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
“연공하고 있으랬더니 집에 불을 질러?”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불이 저절로 났단 말이냐?”
기수는 볼멘소리를 했다.
“내공을 집중하면 호신강기가 처음 만들어지는 순간 진짜 불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사전경고가 없었으니까 그 뭐냐…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고지의무 태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제 잘못은 아닙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기수는 합비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거 말입니다.”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화염이 확! 일어났다.
깜짝 놀란 합비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 누가 네놈에게 그걸 가르쳐주었느냐?”
“어르신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내, 내가 자리를 비우 며칠 사이에 너 혼자 그 단계까지 갔단 말이냐?”
기수는 씩 웃었다.
합비의 놀란 얼굴을 보니까 자기는 천재가 분명했다.
“예. 그냥 집중력을 좀 높이니까 되던데요?”
합비는 기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무리 파천강기를 익힌 상태였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빨랐다.
“너란 놈은 진짜….”
“제자 안 합니다.”
“휴우…. 정말 아쉽구나. 토, 금, 수, 목류도 전부 전수해줄 수 있는데… 사부님이 나같은 자질은 처음 본다고 하셨는데, 넌 나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빠르니….”
기수는 미소 지었다.
자신이 천재인 것과 북궁심법의 효율 중 어느 쪽이 더 큰 원인일까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자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르신. 만약 수류를 배우면 내공 집중할 때 물이 생깁니까?”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합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냐.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물의 성질을 비유한 것일 뿐, 진짜 물을 다루는 건 아니거든. 화류만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아! 그렇군요.”
역시 무공이 천하제일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혼자 힘으로 못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합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네 사람들은 왜 불렀어?”
“불탄 집을 수리하려면 목수가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촌장님이 어르신을 찾는 것 같던데요?”
“충아가 나를? 왜?”
다 늙었지만 합비는 손자를 아명으로 불렀다.
기수는 촌장과 나눴던 얘기를 모두 해주었다.
합비는 긴 한숨을 내쉰 후 중얼거렸다.
“집안을 박살낸 나 같은 놈을 뭐 하러 찾나?”
기수가 슬그머니 의견을 얘기했다.
“그게 어르신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사내라면 자기 가족은 지켰어야지!”
합비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당시를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기수가 다시 말했다.
“이제라도 손자에게 정체를 밝히시지요.”
“안 돼!”
“다 지난 일인데 뭘 마음에 걸려 하십니까?
합비의 반응은 단호했다.
“집안을 망친 조상이 불쑥 나타나기보다는 그냥 산 채로 제사를 받는 편이 나아. 너. 혹시라도 사실을 충아에게 말하면 내가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릴 거야.”
“알았습니다.”
살기등등한 합비가 겁나서가 아니라 남의 가족사에 끼어드는 게 예의가 아니라서 그냥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기수는 자신의 성취에 대해 물었다.
“어르신. 이제 전 화류를 완성한 겁니까?”
“완성? 힝!…. 어림도 없는 소리. 이 정도는 되야지.”
합비는 마당에 서있는 나무에 다가가 줄기를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퍽! 하는 폭음이 울리더니 나뭇가지가 부러져 떨어졌고 쩍 벌어져 갈라진 자리에선 김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배우고 싶으면…. 알지?”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화류를 호신강기뿐만 아니라 공격으로도 활용할 수 있음을 보니까 욕심이 났다.
나무가 갈라진 것은 대략 짐작컨데, 갑작스런 열기 공급으로 인해 내부의 수분이 수증기로 팽창하면서 그런 폭음이 나고 파열도 이루어진 것 같았다.
수분 함량이 훨씬 많은 사람의 몸에 그런 열기를 불어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 사람 진짜 위험하구나!’
단정홍보다 훨씬 치명적인 무기.
기수도 그것을 가지고 싶었다.
합비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때? 아직도 생각이 안 바뀌었어? 너 정도의 자질이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을 거다.”
“어르신. 다른 제자는 없습니까?”
“아직까지는….”
그렇다면 합비가 죽으면 그 놀라운 수법들도 사라진다는 의미 아닌가.
오행류의 경지는 책이나 글자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닐 것 같았다.
기수는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정신 차려! 사부님을 모시면 넌 자유를 잃게 될 거야.’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법.
지금으로선 현현각을 이길 능력만 얻으면 만족이었다.
“제 뜻엔 변함이 없습니다.”
“에잉! 고집스럽기는…”
“훈련이나 좀 시켜주십시오.”
합비는 고개를 돌렸다.
“불을 만들어낼 정도가 되었는데 무슨 훈련이 더 필요해?”
“이젠 저 혼자 수련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기수는 쫓겨나긴 싫었다.
자신을 막 굴릴 정도의 능력을 지닌 고수에게 치열하게 훈련받고 싶었다.
합비가 말했다.
“일단은 너 혼자 훈련해도 돼. 경지에 도달하면 내가 확인하고 적절한 길을 제시해주도록 하지.”
그 역시 기수가 떠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진전을 모조리 전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제자감일 수도 있는데 그냥 놓치기는 싫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의도대로 남게 된 기수는 슬그머니 나무로 가서 다른 가지를 잡아보았다.
합비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될 줄 알고? 얼마든지 시도해보려무나. 크크크…”
기수는 손바닥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확! 하고 화염이 일어났다.
앞으로 라이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합비가 했던 것처럼 가지가 터지지는 않았다.
겉이 타들어가고 그을음이 생길 뿐이었다.
‘열기를 안으로 집어넣는 방법을 찾아야 해. 겉부터 태우는 건 의미가 없어. 무슨 캠프파이어 하자는 것도 아니고.’
기수는 좀 더 집중력을 높여보았다.
그러자 화염의 크기가 훨씬 커졌지만, 역시 겉을 태울 뿐이었다.
합비가 다가와서 약올리듯 말했다.
“난 어떻게 하는지 아는데… 가르쳐줄까? 가르쳐줄까?”
“그거 없어도 싸울 수 있습니다.”
기수는 가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어르신.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강남.”
“강남이라고요? 그 먼 곳을 다녀오셨단 말입니까?”
중원 지도롤 놓고 보면 대각선 반대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도 이젠 늙었어. 경공이 예전 같지 않더라고. 크크크….”
기수는 자기가 선풍비로 가면 며칠이나 걸릴까를 예상해보았다.
거기서 머문 시간이 얼마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았다.
“강남엔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요종의 후인이 나타난 것 같아서 확인하고 왔지.”
“요종이라고요? 음종에 이어서 요종까지 출현한 겁니까?”
합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종보다 요종이 먼저지.”
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음종만 해도 골치 아픈 데 또 다른 환우구종이 나타났다니 요즘 무림이 왜 이러나 싶었다.
“요종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강시지.”
“강시라고요? 그건 일월신교에서 만든 걸로 아는데… 일월신교는 사종 아닙니까?”
“일월신교야 원래 아무 문파나 다 받아주잖아.”
“아! 그럼 요종이 일월신교의 산하조직이 된 겁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 요종의 후인들 중 한 명이 일월신교에 몸을 의탁했을 거야.”
“어떻게 아십니까?”
“강시와 싸워봤는데, 예전의 그 강시가 아냐. 너무 굼떠.”
“굼떴다고요?”
“느리고 멍청해. 그 정도를 가지고 요종의 강시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상당 수준 근접하기는 했어. 요종과 무관한 건 아니란 뜻이지.”
기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요종은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겁니까?”
“석년에 환우구종의 대립 때, 놈들의 수뇌부는 빠짐없이 다 죽었어. 하지만 제자들 중엔 살아서 도망친 자들이 있었으니까 진전이 그리로 이어졌을 수도 있지.”
“그렇군요.”
기수는 강시 얘기가 나오자 불현듯 사매들이 보고 싶어졌다.
“강남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장군부가 일월신교를 제대로 압박하고 있더군. 고수들은 강시와 일월신교 고수들을 치고, 관군은 일월신교의 사업장을 치는 식으로 양동작전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보기엔 일월신교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다행이네요. 혹시 여인들로 이루어진 고수들 얘기는 못 들으셨나요?”
합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군부에 무슨 여자들이 있단 말인가?”
사매들은 워낙 보안에 철저하니까 일월신교와 싸우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아! 다들 보고 싶다. 나 혼자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기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곳의 일도 나름 중요했다. 합비가 나서지 않겠다고 했으니 음종을 막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것이다.
‘음종을 박살낸 후 곧장 강남으로 가서 도와줘야지.’
그런 결심을 하는데 합비가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난 객잔에서 지낼 테니까 사흘 안에 공사 다 끝내 놔.”
“집 놔두고 왜 객잔을…. 저쪽 방은 괜찮은데요.”
“마을사람들이 종일 들락날락거리잖아. 공사 끝난 다음에 올 테니 그리 알아.”
“낮엔 안 오시더라도 밤엔 매일 와주십시오. 저와 연공도 좀 해주시고요.”
“봐서…”
합비가 휘적휘적 가버리자 기수는 지붕 남아 있는 쪽으로 들어가서 운기조식에 몰두했다. 화류에 더 높은 경지가 있는 걸 봤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