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09
기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더…’
몸이 정상일 때는 마음만 먹으면 오행류를 운용할 수 있었지만, 두 팔이 마비되었기 때문인지 기경팔맥 중 양유맥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다.
그것을 뚫기 위해 정신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풍비가 이곤보다 빠른 것은 두 팔에 문제가 없을 때의 일.
균형잡기가 힘들어지니까 속도도 나지 않았다.
결국 이곤의 퇴법에 다리를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곤은 흰자위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하!… 자빠진 꼴이 참 보기 좋구나.”
팔이 마비된 기수는 몸을 일으키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곤은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처럼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다가와 기수의 다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발버둥 쳐봤자 자기 손에 닿기만 하면 두 팔과 마찬가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손이 기수의 발목에 닿는 순간.
확! 하고 불길이 일어났다.
이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옷소매에 붙은 불을 황급히 털어서 껐다.
그리고 기수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옷이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은 없었다.
거리가 있는 자기 손에만 불꽃이 일어난 것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기수는 순간적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일어서서 양 팔을 빙글빙글 돌렸다.
“꽤 치명적인 공격이었어. 후후후….”
기대했던 대로 화류의 진기가 빙정을 모두 녹여주었다. 아직 얼얼한 기운이 남아 있긴 했지만 두 팔, 손목,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었다.
즉각적인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곤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빙정을 풀었지?”
“그깟 음한지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후후후…. 기회가 찾아왔을 때 골을 결정시키지 못하면 반드시 반격을 당하기 마련이지. 넌 공연히 생포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
“흥! 헛소리하지 마라!”
이곤은 기수의 회복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즉각 덤벼들었다.
또 다시 시작된 접전.
기수는 정신을 집중하고 대결에 임했다.
마비에서 갓 풀린 두 팔을 움직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움직임은 정상을 되찾았다.
‘또다시 시작이군.’
이곤과 팔이 닿을 때마다 한기가 느껴졌다.
화류의 호신강기를 끌어올린 덕분에 이전처럼 빙정이 자유롭게 침투하지는 못했지만 현현각의 음공을 막을 때와는 약간 느낌이 달랐다.
현현각의 음공은 눌러서 제압하고 막아내는 느낌이라면, 이곤의 빙정은 녹여내기 위한 내력 소비가 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 끌면 안 되겠군.’
기수는 양팔의 기혈흐름이 순조로워지자 일단 급한 대로 단정홍을 운용했다.
“으윽!….”
단정홍의 암경이 파고들자 이곤은 신음을 토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기수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곤이 말했다.
“그 수법이 내게 통할 것 같으냐? 흐흐흐…”
기수는 피식 웃었다.
“그건 피차일반인 것 같은데… 뭐 참신한 다른 신공은 없나?”
상대가 단정홍에 타격을 받지 않는 게 놀라웠지만, 자신도 한음빙정공을 방어해내고 있으니 비긴 거라고 볼 수 있었다.
단정홍 사용 이후 빙정의 힘이 약해진 것을 보면 타격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기수는 상대적으로 내공소모가 적은 단정홍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파천강기를 끌어 올렸다.
화류 호신강기, 단정홍, 파천강기의 동시 운용은 오로지 기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북궁심법으로 상, 중, 하단전을 따로 운용 가능하기에 각기 성질이 다른 진기도 제대로 운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내 최고 장점일 수 있겠군.’
기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곤을 공격했다.
“크윽!…”
이곤은 신음을 토했고, 그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기수는 진기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파천강기를 단검처럼 운용했다.
이곤은 어떻게든 그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빙정은 상대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상대의 암경은 바늘처럼 파고드는 상황만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거기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더해지자 찔리고 베여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기수는 눈을 빛내며 집중력을 더했다.
‘지금의 우세를 놓쳐선 안 된다!’
기회가 있을 때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건 이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여유는 상대를 쓰러트린 이후에 부려도 늦지 않았다.
“끄아악!…..”
기수의 파천강기가 빗장뼈를 꿰뚫자 이곤은 결국 비명을 질렀다.
부릅뜬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기수는 제 2, 제 3의 치명타를 연거푸 날렸다.
잠깐의 숨 돌릴 겨를조차 주지 않는, 잔인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마무리였다.
“크으으…..! 이, 이럴 수가….”
이곤은 피를 철철 흘리며 비틀거렸고, 결국 풀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이 복수는…. 주군께서… 꼭… 해주실 것이다…”
“네가 먼저 가서 기다려라. 그 주군이라는 자도 곧 보내줄 테니.”
기수는 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손끝에 모아두었던 파천강기를 날렸다.
헤드 샷 이후 이곤은 생을 마감했고, 기수는 전신을 휘감는 희열에 전율했다.
해냈다는 성취감!
12명에서 7명을 죽이고 5명만 남았으니 반환점을 돈 거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며 장소성을 내지른 후, 기수는 신을 불렀다.
[와 계십니까?]
[모두 보았다. 훌륭하구나.]
[좀 도와주십시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주군이라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의 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평소와 다르군. 사도를 무찌른 후엔 늘 자신감이 넘쳤는데…]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엔 고수가 많더군요. 음종도 있고, 합비 어르신도 있고….]
[겸손해진 건가? 보기 좋군.]
[아! 진짜… 장난 아니고 그 주군이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고수를 쑥쑥 만들어내고… 게다가 별 희한한 수법을 다 쓸 줄 알고….]
[나도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기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신입니까?]
[무슨 질문이 그런가?]
[적어도 신이란 이름이 붙었다면 인간의 신원파악 하나쯤은 자유자재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혹시 신 중에서 레벨이 좀….]
[나한테 무례해서 좋을 거 없을 텐데.]
[무례한 게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은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신이 대답했다.
[저쪽 진영에 대해 내 능력을 써서 알려고 하면 길이 열려버린다.]
[무슨 길 말입니까?]
[흐음…. 네가 살던 시대의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내가 상대 진영의 사도를 찾아보려고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순간, 상대로부터 해킹당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 그럼 곤란한데요.]
절반 이상을 제거했다고 해도 아직은 5:1의 싸움.
적이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무조건 불리했다.
당장 이곤을 서둘러 제거한 것만 해도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적에 대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계속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군요.]
[무엇이 불안한가? 이미 사도를 일곱이나 제거했으면서.]
[그러면 뭐합니까? 11명을 처치했다고 해도 마지막 끝판왕한테 죽으면 다 소용없는 일인데.]
신도 거기엔 대답이 없었다.
기수 입장에선 더욱 암담한 느낌이었다.
한참 만에 신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너의 무공 성취 속도로 보자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서두르지 말고 단계를 밟아 나가다 보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전 빨리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셔야 한단 말입니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나왔다.
[조급해서 좋을 것 없다.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럼 혹시… 어머니를 이곳으로 모셔올 수는 없습니까?]
사실, 기수가 현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유일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TV도,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세상에 실망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지낼 만 했다.
어머니도 매일 일하러 나가는 것보다 시녀들 부리며 편히 사시는데 곧 적응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원에서 제일 큰 집을 짓고, 하루에 여섯 끼씩 산해진미를 드시게 하고, 비단옷에 비단 침구를 제공해드릴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신의 대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안 된다.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느냐.]
[그건 이쪽 여자를 현대로 데려가는 게 안 된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모셔오는 건 그 반대니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안 된다.]
[에이… 왜 이러십니까? 저도 현대에서 이리로 왔는데.]
[너는 특별한 경우다.]
[아! 진짜… 복지혜택 너무 빈약하네.]
가족 상봉을 막는 나쁜 사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어머니와 행복한 재회를 하게 될 거다. 나를 믿어라.]
[미래를 보기라도 하는 겁니까?]
[그렇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정말 미래를 알고 있다면 상대편 신과 싸우는 이유가 뭡니까? 이미 답은 나와 있을 텐데…]
[운명이란 유동적인 것이다. 확실한 건 현재밖에 없지.]
[금방 말이 바뀌네요?]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기수가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확실치 않은 미래 말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도들의 정체나 밝혀주십시오. 쫌!]
[아까도 얘기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각자 필드를 보유하고 있다. 그 필드가 겹쳐지면 이쪽의 상황도 읽힐 수밖에 없어.]
[필드인지 뭔지, 그런 특별한 감지영역이 어떻게 그리 쉽게 겹칠 수 있는 겁니까? 저쪽의 신과 무슨 동문이라도 됩니까? 아님 형제라거나…]
신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수는 순간 자기 질문이 뭔가 핵심을 찔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의 모습이 보이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랬다.
[이만 가보겠다.]
신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상대의 기분이 어떻건, 기수 입장에선 모처럼 만났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용건이 남았나?]
[적의 정보는 알아내지 못한다 해도 저를 강해지게 해주실 수는 있겠죠?]
[글쎄…. 전투능력은….]
[당신에게 기술이 없으면 어디서 배워오거나, 컨닝을 하거나, 사오거나, 어쨌든 뭔가 도움이 될 만 한 것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런 식의 개입은….]
기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책으로 엮어서 길에 던져 놓으면 제가 우연히 주워서 익히겠습니다. 적은 전기로 지지고, 빙정으로 얼리는데 난 이게 뭡니까? 11명 다 죽여도 마지막 12번째 사도를 못 이기고 죽으면 당신도 기분 나쁠 것 아닙니까?]
신은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네가 태무신궁을 만나고 합비를 만난 게 우연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기수는 깜짝 놀랐다.
[아! 그럼…. 그들은 우연을 빙자해서 안배해 준 교사들이었군요.]
[그들과 만나고, 능력을 얻어낸 것은 온전히 네가 한 일이다. 나는 단지 기회만 제공했을 뿐이야.]
기수는 씩 웃었다.
인간사에 개입하면 안 되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결국 할 일은 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기회를 계속 제공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예?]
[밥상까지 차려줬으면 떠먹는 건 네가 해야지.]
[충분하긴 뭐가 충분합니까?]
[잘 생각해봐. 나는 간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다급하게 불렀지만 신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기수는 욕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쳇! 결국 내가 다 알아서 하라는 거군.’
그래도 고맙기는 했다.
‘민아, 현아를 만나게 해준 건 진짜 땡큐다.’
그리고 충분하다고 얘기한 것도 무슨 의미였는지 감이 잡혔다.
그것은 아마도 황궁비고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거기 다시 가봐야겠어.’
전에 갔을 때는 황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스킵했지만 음공이니, 오행류니, 빙정이니 하는 것들을 현실로 접해본 지금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군이라는 자도 나 이상의 지원은 받을 수 없었을 거야. 결국 주어진 환경 안에서 어느 쪽의 자질이 더 뛰어나고, 누가 더 열심히 연공했나의 싸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겨났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보다 공부 잘 하는 놈, 운동 잘 하는 놈, 노래 잘 하는 놈, 게임 잘 하는 놈, 당구 잘 치는 놈 많이 봐왔다. 그리고 그들을 이기겠다고 기를 쓰고 노력하기보다는 정신 승리를 일삼으며 포기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노력을 포기하면 곧 죽음이고, 귀찮다고 회피하면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다행히 무학에 자질이 뛰어나다고 해서 신이 스카웃한 몸.
실제로도 익히는 속도가 빠르고, 성취하는 깊이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경험했으니까 한 번 도전해볼 만 했다.
‘그래! 해보자! 씨발…. 주군이란 놈이 세면 얼마나 세겠어?’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