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13
기수는 공을 세운데다, 사도 처리가 말끔히 끝나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무림맹 군사 단령문이 제시한 이론 때문이었다.
그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지점이 첫 번째 루주가 죽은 자리이고, 이 지점이 두 번째 루주가 튀어나온 지점입니다. 태평령의 능선이 여 선을 따라 이어지니까, 현재 적의 배치는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와 여기로 추정됩니다. 즉, 십면 매복의 형세입니다.”
“십면매복!”
무림맹 고수들이 술렁거렸다.
사실, 무림인들에게 있어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병법에 따라 진형을 갖춰가며 싸우는 것은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령문의 설명을 듣고 다시 지도를 보니까 그 배치 상황이 상당히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맹주 주일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군사. 그러면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물러설 수 없다는 주장을 폈지만, 적이 준비해놓고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단령문이 대답했다.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할 때입니다.”
주일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이 매복하고 있는데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적의 전력이 숨겨져 있다면 조심해야 하지만, 지금은 두 번의 전투를 통해 실체가 드러났고, 포위망까지 일부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쯤 적은 당황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흐음….”
주일비는 자기 생각과 정반대인 단령문의 의견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옳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쪽을 쳐야 하겠습니까?”
단령문은 다시 지도를 가리켰다.
“저 같으면 이곳에 본진을 둘 것입니다. 전장 전체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지형이니까요. 아마 현현각주도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곽염이 물었다.
“확신하십니까?”
단령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장에서 확신은 금물입니다. 하지만 확률이 반반은 될 것입니다. 현현각 각주는 없더라도, 최소한 매복진 전체를 통제하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현현각주의 유무와 상관없이 적 전력의 핵심이 될 거란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곽염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병력을 그리로 진격시키겠습니다. 자기네보다 수적으로 월등히 많은 상대라면 매복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단령문은 그 일에 대해 결정내릴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무림맹주 주일비를 바라봤다.
주일비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동창에서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서 주신다니 저희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곽염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천하의 해악을 제거하는 일인데 동창과 무림맹을 구분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먼저 가서 내일 새벽 출정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군요.”
그가 일어서자 단령문이 말했다.
“내일 싸울 상대는 음종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모든 병사가 귀마개를 준비하고 있고, 실력 좋은 궁수들을 따로 뽑아 두었습니다.”
“그건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추가로 오늘 밤 자기 전에 모두에게 귀마개를 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오늘밤에요?”
“그렇습니다. 음종의 수법 중에 밤사이 악기를 연주하고 다음날 전장에서 징소리로 반응을 이끌어내는 사악한 기법이 있습니다. 거기 걸리면 상당한 내공을 갖춘 고수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도 오늘 자기 전에 모두 귀를 막을 것입니다.”
곽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저히 방비하여 내일의 결전에 한 점의 착오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군웅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자 단령문이 주일비에게 물었다.
“맹주님. 어찌하여 관군에게 적의 핵심을 치도록 양보하셨습니까?”
“현현각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잊어선 안 됩니다.”
“그 말씀은…”
“지금 동창의 곽천호는 왠지 모르게 들뜬 상태입니다. 공을 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장안이 위협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지가 충만한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라서 말을 순화했지만, 음종이 만만하게 당할 자들이 아니니까 관군이 화살 받이 역할을 하도록 놔두자는 의미였다.
공을 빼앗기기보다는 그들 덕분에 마무리가 쉬워질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었다.
무림 명숙들 모두 그 속뜻을 알아차렸다.
기수는 곽염이 서두르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형제나 마찬가지인 이곤이 의문의 실종을 당했기 때문에 이곳의 일을 빨리 마치고 조사에 착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수 입장에선 무림맹주의 결정에 동의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군은 학살당해도 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기분이 좀 묘했다.
회의가 끝나고 현무단의 군막으로 돌아온 기수는 단주 진백과 부단주 모용인을 도와 출정 준비를 했다.
특히 단령문이 얘기한 밤사이 음공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고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놀랍게도 곽염이 찾아왔다.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진백과 기수는 그를 군막 안으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곽염은 곧바로 용건을 얘기했다.
“내일 적진으로 쳐들어가려고 하는데, 비룡검문의 협조가 필요해서 부탁을 좀 드리러 왔습니다.”
“우리의 협조라면….”
곽염은 기수 쪽을 보고 말했다.
“현재 우리 관과 무림맹 연합 중에서 현현각의 음공에 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기수와 진백은 서로를 마주봤고, 진백이 곽염에게 물었다.
“양호법이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그것은 무리한 부탁이었다.
기수는 비룡검문 최고의 전력일 뿐만 아니라 무림맹으로 범위를 확대시켜도 대체 불가능한 공격 자원이었다.
곽염이 말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래서 특별히 맹주님께 먼저 허락을 받고 이제 문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맹주님이 허락하셨단 말입니까?”
“문주님만 승낙하시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팔밀이를 한 것이다.
“글쎄요…. 그것 참….”
진백은 곽염의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네가 앞장서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양십일을 내어달라고 하는 것은 뭔가 억지스러웠다.
어떤 말로 거절할까 고민하는데 곽염이 다시 말했다.
“양호법이 빠지는 부분만큼 전력이 보강될 수 있도록 저희 동창에서 비룡검문에 군량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따라 온 부하에게 턱짓을 하자 그가 나무상자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준 후 곧바로 닫았다.
진백과 기수는 깜짝 놀랐다.
상자 안엔 금괴가 가득했다.
군량을 지원한다고 하더니, 실질적으로는 기수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기수가 진백에게 말했다.
“문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번 작전은….”
곽염이 바로 앞에 있으니까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기수는 진백을 설득했다.
“이번 싸움에 적이 음공을 쓴다면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가서 우리 쪽이 흘릴 피를 줄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진백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기수를 보내기 싫었다. 그러나 기수는 대외적으로만 문주와 호법 사이일 뿐, 실질적으로는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가 하겠다고 하면 말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관군의 목숨도 중요하다고 하는 그의 논리에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부디 조심하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곽염이 먼저 벌떡 일어나서 연거푸 머리를 숙였다.
그로서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는데 잘 해결되어서 기쁘기 한량없었다.
곽염은 동창의 천호지만 따로 모시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곤의 실종에 대해 명확한 보고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현현각을 몰살시키거나, 그게 안 되면 적어도 장안 근처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이곤을 찾아 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무림맹 대신 자기가 앞장서서 선봉을 자처한 것인데, 막상 결전을 앞에 두고 보니까 현현각의 음공이 두려웠다.
그래서 비룡검문 양호법을 데려오는데 천금을 쏟아 붓게 된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지만 무림맹주와 현무단주와 용봉련주가 모두 승낙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결정이 되어서 양십일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기수는 자기 무장을 챙긴 후 진백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진백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조심해야 하네.”
“제 걱정은 마십시오.”
그렇게 인사를 하고 관군 진영으로 가는 동안 곽염이 기수에게 말했다.
“정말 련주님은 의협심이 대단하시군요. 감복했습니다.”
“별말씀을요.”
기수는 동창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것은 혈매궁 궁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 나서게 된 것도 동창을 도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기수는 이번 전쟁을 음종과 자신의 대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전투의 최전방에 자기가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 곽염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자기가 찾아가서 부탁할 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역시 관군이 허망하게 죽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동창이 일회용 소모품처럼 마구 써댈 병사들의 목숨을 자기가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역시 돈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상자에 든 금괴의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정도 액수라면 진백이 현무단주로 있는 내내 휘하 문파들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자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곽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잽싸게 챙길 필요가 있었다.
기수는 오래지 않아 관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마주치는 병사들 모두 표정이 잔뜩 굳어 있고, 군영의 분위기도 긴장되어 있었다.
기수가 곽염에게 물었다.
“병사들이 겁을 먹은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렇습니다. 막아보려 했습니다만 결국 소문이 퍼지고 말았습니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곽염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현현각 놈들은 요괴를 자유자재로 부려서 사람의 혼백을 단숨에 빨아먹는다거나 하는… 뭐 그런 헛소리들입니다.”
“좋지 않군요.”
관군 입장에서 봤을 때 무림인이란 어딘가 신비롭고 경이로운 존재.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인 무림맹을 현현각에서 단번에 박살내버렸으니 온갖 해괴한 루머가 퍼질 법도 했다.
사실, 현현각의 수법은 무림맹 사람들도 두려워할 정도니 요괴 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곽염은 기수를 극진히 대접했다.
“편히 쉴 군막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창의 천호라면 무림 문파의 호법 쯤 하찮게 볼 지위이지만, 기수가 현현각 루주들을 연거푸 제압하고 있기 때문에 귀빈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건 교만해지지 않았다.
“쉬기보다는, 병력 편성이나 진군로 같은 걸 봤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거라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곽염은 기수가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는 게 고마웠다.
그리하여 그를 자신의 군막으로 안내했다.
동창 요인들로 가득한 천막 안에서, 기수는 낯익을 사람을 보았다.
바로 납치했다가 풀어준 공량이었다.
그는 이전과 뭔가 달라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손에 들고 있는 염주였다.
입으로는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으로는 계속 염주알을 굴리고 있었다.
기수가 공량을 빤히 보자 곽염이 두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이쪽은 용봉련 련주 양소헙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우리 군의 감군 역할을 맡고 있는 공태감입니다.”
기수는 웃음을 참으며 포권을 했다.
공량도 포권으로 마주 인사를 한 후 기수에게 말했다.
“인간사 어차피 공수래공수거입니다. 너무 아둥바둥 애쓰지 마십시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공량은 득도한 고승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세상사 다들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애쓰지만, 욕심낸다고 해서 안 이뤄질 게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이뤄질 게 안 이뤄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수는 웃음을 참느라 눈이 충혈 될 지경이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하룻밤 신장에게 납치되었다고 해서 인생 다 산 도사 흉내를 내고 있으니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말 말고 행동으로 보이라고 했지!’
라며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악랄하게 돈을 밝히던 환관이 개과천선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곽염은 기수의 표정이 변하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공량을 손짓으로 멀찍이 보냈다. 쓸데없는 소리로 기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수는 곽염이 브리핑하는 관군의 공격 계획을 모두 듣고, 의심스런 부분에 대해 질문으로 확인도 했다.
대화하면서 느낀 점은 곽염이 꽤 똑똑하다는 사실이었다.
무공도 뛰어나고 전략적 머리도 잘 돌아가서 과연 동창에 한 명 뿐인 천호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네. 언젠간 적이 될 사이이니…’
지금은 손을 잡고 있지만 혈매궁주와 동창의 천호는 물과 기름이었다.
상황파악을 끝낸 기수는 곽염이 내어준 천막에 들어가 귀를 막고 운기조식으로 몸과 마음의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