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18
곽염은 천천히 창고 구석에 놓인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손바닥에 탁! 탁! 때리면서 기수 앞으로 다가왔다.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네놈 태도부터 고쳐놓고 시작해보자.”
그러더니 몽둥이로 명치를 쿡! 찔렀다.
“으윽!….”
기수는 신음을 토했다.
맞을 때의 아픔보다 맞기 직전까지 고조되는 공포감이 더 기분 나빴다.
곽염은 그런 심리를 아주 잘 이용했다.
몽둥이를 빙빙 돌리며 약 올리다가 불시에 휘둘렀는데, 묘하게도 급소 바로 옆이었다. 그의 실력으로 봤을 때 점혈 당해 꼼짝 못하는 사람의 급소를 못 맞출 리는 없었다.
일부러 빗맞추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기수를 더욱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대여섯 차례 장난질을 더 친 후 곽염이 물었다.
“이제 좀 고분고분하게 대답할 마음이 생겼나?”
기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진실을 애기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공량을 납치하고 이곤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곧바로 죽은 목숨이 될 것이었다.
뭔가 그럴듯한 스토리를 지어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아직 매가 부족한 모양이군.”
곽염의 두 눈에 흰자위가 많아지더니 갑자기 이성을 잃은 광인처럼 마구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은 기수에게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충격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상대가 예측 불가능한 미친놈이라는 사실이 또 다른 공포를 가져온 것이다.
코를 타고 흘러내려 입술로 지나는 선혈을 혀로 핥으며, 기수는 스스로를 독려했다.
‘쫄지 마! 씨발….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러나 겁나는 건 사실이었다.
옛날 일본군 순사에게 끌려간 독립투사, 군부독재 정권에게 끌려간 민주투사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온몸으로 동감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못하고 당한다는 사실이 그저 원통할 뿐이었다.
사공명과 싸우다 죽는 거라면 납득이라도 할 텐데…
곽염은 때리기를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자기 옷소매를 들어 살펴본 후 화를 냈다.
“이게 뭐야? 피가 묻었잖아! 이 나쁜 자식!…감히 내 옷에 피를 묻혀?”
그리고는 다시 몽둥이찜질을 시작했다.
광인 흉내에 이은 생트집이었다.
기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곽염은 한참 만에야 때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놀리는 어조로 물었다.
“너 혹시… 누군가 널 구하러 올 거라고 기대하는 거냐?”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흐흐흐…. 이곳은 우리 동창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장소다. 비룡검문도, 무림맹도 너를 찾아내려면 1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기수 입장에선 눈앞이 깜깜해지는 소리였다.
곽염은 기수 주위를 느린 걸음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놈이 제법 강단도 있고 맷집도 강하니까 빨리 끝내기가 싫어지는구나. 어디… 며칠이나 견디나 한 번 해볼까? 절망감에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긴지 경험해 본 적 있나?”
절대로 경험해보고 싶지 않았다.
기수의 눈빛을 읽은 곽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숙제를 하나 내주마. 왼손, 오른손, 왼발, 오른발 중에 무엇부터 포기할지 미리 정해두렴.”
기수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곽염이 웃으며 말했다.
“칼을 한 자루 들고 와서 네놈의 힘줄을 하나 끊어줄 생각이거든. 2개의 손목과 2개의 발뒤꿈치 중 어디가 좋을지 네가 골라라. 아! 물론 한 번에 하나씩이니까 결국은 다 잘리겠지만, 그래도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흐흐흐…..”
기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매를 참는 것과 힘줄을 끊기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얘기였다.
손이나 발을 평생 못 쓰게 되는 것이다.
곽염은 기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너무 겁먹을 것 없어. 팔다리 못 쓴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기수는 이를 악물고 곽염을 노려봤다.
“하하하!… 이놈 걸작이구나. 이런 상황에도 기가 죽지 않다니. 그래, 그래. 이렇게 나와야 재미있지. 내 기필코 가장 날이 무디고 목이 슨 칼로 가져오마. 그래야 써는데 오래 걸릴 테니까.”
곽염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에 버리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언제 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푹 쉬고 있으렴.”
기수 입장에선 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을 못하게 함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가중시키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문손잡이를 잡았던 곽염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되돌아 왔다.
“네놈 내공이 제법 심후하니까 확실히 해둬야겠지?”
그리고는 혈을 다시 눌렀다.
“으윽!…..”
기수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신음을 토했다.
곽염이 일부러 손가락을 세워 아프게 점혈 한 것이다.
“후후후…. 원한다면 힘줄이 아니라 코나 귀부터 잘라줄 수도 있단다.”
곽염은 기수의 어깨를 한 번 더 토닥인 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밖에서 잠기자 기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 씨발….”
그 소리밖에 안 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기 피가 바닥에 고여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찢어졌는지, 핏방울은 멈추지 않고 계속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기수와 양십일이 사형제라거나 하는 이유로 비슷한 수법을 사용한다고 둘러댈 생각도 했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곽염은 무슨 대답을 하건 자기를 죽일 것이었다.
설령 이곤과 아무 관련 없다고 밝혀진다고 해도 자기를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동창에서 무림맹 사람, 그것도 용봉련 련주이자 비룡검문 호법인 사람을 멋대로 잡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꼼짝없이 죽는 건가?’
엄마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아들이 엄마보다 먼저 죽는 것보다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기수는 의식을 집중하여 운기를 해보았다.
북궁심법은 3개의 단전을 동시에 가동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점혈 방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기대는 곧 무너졌다.
단전을 하나를 쓰건 세 개를 쓰건 몸을 움직이는 기경팔맥은 그대로였다.
수로가 꽉 막힌 상태에서 저수지를 3개 돌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기수는 마지막으로 매달릴 상대를 불렀다.
[신님! 보고 계십니까? 좀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몇 번을 부르고 또 기다려 봐도 대답이 없었다.
[힘줄이 끊기면 손발을 못 쓰게 됩니다. 사도들과 싸울 수도 없다고요!]
기수는 신을 달래 보았다.
[지금은 특별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를 죽일 때만 나타난다는 규칙 따위는 잊으셔도 됩니다. 예전에 절벽에서 떨어질 때도 먼저 말을 거셨잖습니까?]
그래도 반응이 없자 화가 났다.
[정말 날 이렇게 죽도록 내버려 둘 거야? 응? 고작 동창의 환관 손에 죽게 만들려고 날 여기 데려온 거야? 당장 못 나와?]
그러나 신은 대답이 없었다.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느니 뭐니 하는 소리는 개나 줘버려! 난 살고 싶다고! 그것도 온몸이 온전한 상태로!]
빌어먹을 신은 끝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마저 잃은 기수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느꼈다.
‘아! 이럴 거면 차라리 빨리 죽이지…’
곽염이 곧바로 처리하지 않고 말로 잔뜩 겁을 준 후 자기를 혼자 있도록 놔둔 게 정말 끔찍한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10분쯤 지났나? 아니면 1시간? 도대체 언제 다시 온다는 거지?’
똑똑 떨어지는 출혈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질 즈음.
밖에서 미세한 소음이 들려왔다.
기수의 귓바퀴가 움직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왼손부터 자르라고 해야 하나?’
다리보다 손, 그것도 잘 쓰지 않는 손부터 고르는 게 기본이긴 하지만 문제는 곽염이 그대로 해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점혈당한 상태라는 사실이 정말 끔찍했다.
기수는 문을 노려봤다.
굴욕을 당하느니, 곽염이 들어오자마자 욕을 한 바탕 해줘서 자기를 빨리 죽이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이 아닌 뒤쪽의 작은 들창이 움직이더니 한 사람이 그리로 들어왔다.
“너, 너는….”
“어머나!… 사람을 어쩌면 이렇게 심하게 때렸죠?”
놀랍게도 창고로 들어온 사람은 금영이었다.
“여긴 웬 일로….”
“동료들이 수군거리기에 궁금해서 와봤죠. 그런데 죄인이 당신일 줄은 몰랐어요. 도대체 곽천호에게 무슨 죄를 저지른 거죠?”
기수는 어쩌면 신이 그녀를 보내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움직이기는 하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곽천호는 동창을 위해 일하는 게 아냐. 섬기는 사람이 따로 있어. 그래서 나를 여기에 가두고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뒤 자기만 취조하는 거야.”
“흐음…. 그렇군요. 그가 진짜로 섬기는 사람이 누구죠?”
“실은…. 나도 아직 몰라.”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난 동창을 떠날 거니까.”
“떠난다고?”
“예. 당신이 지난번에 한 말을 그동안 계속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결심이 선 거야?”
“내 인생을 내가 결정한다는 생각을 예전에는 왜 못했나 모르겠어요. 지금은 막 가슴이 뛰고 설레요.”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요?”
“내 점혈을 풀어줘.”
“그게 어떻게 나를 돕는다는 거죠? 곽천호가 알기라도 하면 난 도망치기도 전에 죽은 목숨이 될 텐데…”
“날 풀어주면 이곳은 꽤 시끄러워질 거야.”
금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기수의 눈빛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기수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이 혼란스러워지고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 네가 빠져나갈 기회가 쉽게 생길 거야. 그리고 곽염 입장에선 나를 잡아온 걸 보고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너의 실종도 공식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울 거고.”
금영은 잠시 말없이 기수를 쳐다봤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로 봐서 앞뒤를 재고 계산해보는 듯 했다.
기수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해. 내가 말하는 혈도를 눌러주기만 해.”
금영도 사매들 처음 만났을 때 수준의 무공은 익혔을 테니까 얼마든지 자기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글쎄요….”
그러나 그녀는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난 단지 궁금해서 여기 들어와 봤을 뿐이에요. 하지만 곽천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이 절대로 나한테 좋을 일 없다는 사실은 알아요.”
“으으….”
기수는 그녀에게 염정구심술을 써서 자기 혈도를 누르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진기의 도움 없이 정신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로서는 말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곽천호는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지금 당신은 점혈을 풀어준다고 해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것 같은데요. 손도 완전히 엉망이고… 게다가 곽천호는 동창 최고의 고수에요.”
“내가 더 강해!”
“못 믿겠어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난 개입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나중에 곽염에게 네가 도망칠 생각이라고 말할 거다.”
금영은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머! 그럼 지금 내손으로 당신을 죽여야겠네요?”
기수도 미소 지었다.
“그래. 죽여. 그래야 네가 안전할 거야.”
곽염에게 놀림을 당하고 안 드는 칼로 손목과 뒤꿈치를 하나씩 잘리느니, 지금 금영의 손에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금영은 기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당신. 정말로 죽음을 각오했군요.”
“그래. 가능하면 고통 없이 끝내줘.”
금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살인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죽이려니까 뒷감당이 걱정되었다.
이렇게 따로 가둬놓은 걸 보면 굉장히 중요한 포로인데, 괜히 죽였다가 분노한 곽염이 조사라도 하면 자신의 행적이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냥 놔뒀다가는 자신의 탈출 계획을 발설할 수도 있었다.
‘아! 내가 왜 여길 들어온 거지?’
정말 뜬금없는 호기심 발동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호법이 보통 남자들과는 달리 자신을 하룻밤 노리개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들창을 넘는 위험을 감수한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기수가 그런 그녀의 갈등을 눈치 채고 말했다.
“넌 내 혈도를 풀어준 후 온 길로 되돌아가. 그리고 숙소에서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기다려. 난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 시작할게. 그러면 네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야. 어때?”
금영이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만약 당신이 실패해서 다시 잡힌다면요?”
“여기로 돌아오진 않을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리고 혈도만 눌러준다면 어떤 경우에도 네 얘긴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금영은 심호흡을 한 차례 한 후 말했다.
“좋아요! 그 약속 꼭 지켜야 되요.”
“남아일언중천금.”
죽음 앞에서 신을 찾던 기수였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만 해준다면 금영이 소원 세 가지를 들어달라고 해도 기꺼이 응할 수 있었다.
“어느 혈을 누를지 말해주세요.”
금영은 검결한 손에 진기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