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23
사공명은 신중했다.
그가 아버지의 유훈을 어기고 강호에 나온 것은 야망 때문이었다.
강호란 힘이 지배하는 곳.
처음엔 삼황맹을 돕는 식이라 하더라도, 조금씩 힘을 드러내면 결국 그들을 자기 발아래 복속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제갈세가의 언변에 넘어가 주는 척 하면서 봉문을 깬 것이다.
막상 나와 보니 사마연합이란 이름하에 삼황맹뿐만 아니라 녹림72채와 수로맹이라는 대규모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개개인의 능력은 약하다 하더라도 변경과 산과 강을 모두 아우르는 거대 조직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들었다.
그 후 천마교의 고수들도 몇 명 만나봤지만 자신을 능가하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무림맹 본진을 습격하여 수백 년간 무림의 태산북두로 칭송받던 소림방장, 무당파 장문인 등을 차례로 제압하면서 그의 자신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자신의 손으로 무림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얼마 전 동창의 천호라는 자를 만났을 때도, 조정에 들어간다면 옥좌에 앉을 것이란 말이 반 농담처럼 튀어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비룡검문이란 낯선 문파.
그것도 문주도 아닌 호법이 자기를 막으려 한 것이다.
아버지가 강호 출도를 금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삼태공과 검종.
음종의 무공은 천하무적이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으니, 바로 진기 소모가 극심하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삼태공과 검종을 대할 때만큼은 조심해야 했다.
아버지가 패한 것도 그들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비룡검문 호법은 삼태공도 검종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삼태공 중 귀령공의 수법과 비슷한 호신강기를 쓴다는 점이었다.
이제까지 승승장구했지만, 만약 그가 귀령공의 전인이라면 현현각의 무림 정복 행로에 가장 중요한 첫 고비를 만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수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관찰한 사공명은 기습적으로 부채를 휘저었다.
순간, 기수의 몸 주변으로 확!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사공명의 기대와 달리 팔다리가 잘리지도, 피가 흐르지도 않았다.
사공명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귀령공의 전인임을 확신한 것이다.
그는 연거푸 부채를 휘둘러 회선참을 날렸다.
시작부터 강수로 나가는 것은, 이미 한 번 싸워 본 사이이기 때문에 탐색전이 필요 없기도 하거니와 진기를 끌어올린 이상 빠른 시간 내에 승부를 보기 위해서였다.
기수는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으으…..”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지만, 상대의 내공은 자기보다 한 수 위였다. 그리고 루주들과 달리 음공 없이 자체 무공만으로도 고수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수 입장에선 사공명과 접근전을 벌여야만 했다.
파천강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상대의 요혈을 찌르거나 접촉을 통해 단정홍을 먹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공명의 두 자루 접선은 완벽한 방어를 구사했다.
그리고 일단 접선까지 다가가기조차 쉽지 않았다.
한 번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질 것처럼 아픈 회선참.
그 통증은 가까이 갈수록 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수가 계속 뒤로 밀리자 사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안절부절 못했다.
합비 역시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기수를 몰아붙이는 사공명은 신이 났다.
“하하하!…. 검이 없다고 실력 발휘를 못하는 거냐?”
상대가 귀령공의 전인이라고 해도 이 정도 전력 차이라면 걱정할 게 없었다.
그의 접선은 나비처럼 펄럭이며 공세를 강화했고, 마침내 계속 물러서던 기수를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다.
기수는 급히 일어섰다.
“이건 슬립다운이다! 카운트하지 마라!”
그러나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변명이었다.
계속 간격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호흡도 점차 가빠지고 있었다.
사공명도 그 점을 정확히 간파했다.
“아이야. 네 사부에 대해 얘기해 보거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서자 기수의 사문이 궁금해진 것이다.
기수는 냉소를 지었다.
“흥! 고작 이 정도에 내가 무너질 줄 아느냐?”
그때 합비가 말했다.
“무리할 필요 없어.”
기수가 쓰러지자 즉시 달려온 것이다.
사하도 뒤따라 와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공명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비웃었다.
“하하하!… 응원군이라고 온 게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계집이구나.”
기수는 사공명이 합비의 내력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내공 수위로 보자면 사공명이 자기보다는 높지만 합비만은 못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합비가 기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맡기로 하지.”
기수는 무겁던 마음이 한 순간에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합비가 나서면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자손들에게까지 정체를 숨겨 온 이제까지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고라도 자기가 변변치 못해서 합비로 하여금 뜻을 꺾게 만들기는 싫었다.
특히, 마을을 지키는 것은 화류의 호신강기를 배울 때 조건으로 내건 일이었다.
어떻게든 자기가 해야만 할 의무인 것이다.
합비은 고민하는 표정으로 기수를 봤다.
약속을 지키는 건 좋지만 무모한 도전이었다.
사하가 끼어들었다.
“선배님 말씀 들어. 이제까지 계속 밀렸으면서 무슨 수로 저 괴상한 수법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너 그러다 죽어.”
그녀 입장에선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기수는 그녀 눈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시 두렵지 않은 게 아니었다.
기수가 씩 웃은 후 사하에게 말했다.
“남자란 말야. 죽을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아아!….”
기수는 사공명 쪽으로 돌아섰다.
“자! 진짜로 시작해볼까?”
“후후후…. 이제까지와 달라질 거라도 있느냐?”
“물론이지.”
기수의 몸 주변으로 다시 화염이 한 차례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화살처럼 사공명을 향해 날아갔다.
사공명은 즉시 자세를 낮추며 부채 두 개를 동시에 흔들었다.
기수의 X자로 교차한 팔에서 피가 튀었다.
그러나 기수는 멈추지 않았고 일 장을 내뻗었다.
사공명은 그 공격을 부채로 막았다.
그리고 충격과 함께 두 걸음 뒤로 밀려났다.
“으음….!”
기수는 멈추지 않고 연달아 주먹과 발을 뻗었다.
이제까지와 달라진 것은 바로 마음가짐이었다.
호신강기 안에서 안전만 추구해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사실을 인정한 게 출발점이었다.
맞을 건 맞고, 피 흘릴 건 피 흘리고, 그야말로 진짜로 목숨 걸고 덤벼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혈투를 바라보는 사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래서 합비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합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진짜 목숨을 내던지고 싸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머리가 좋은 놈은 아냐.”
기수는 선공으로 사공명을 몰아쳤고, 손끝에 단정홍을 끌어올린 채 접촉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두 개의 접선을 뚫기는 어려웠다.
접선을 통해서 흘려보내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그것은 접촉의 타이밍을 잡기도 어려웠고 전달 효율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라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기수의 내공은 그 정도 손실을 감수할 여유도 없었다.
초식이 거듭될수록 사공명은 안정을 되찾았다.
“흥!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그의 반격이 점점 거세어지자 기수는 이를 악물었다.
분광권의 정묘한 초식운영 덕분에 밀리지 않고 접전 상태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는 게 문제였다.
출혈로 인해 소매는 물론 옷 전체가 점점 시뻘겋게 변했다.
‘피를 많이 흘릴수록 힘도 빠질 텐데…. 이 자는 정말 내 능력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란 말인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사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눈빛만이 아닌 말로 합비에게 부탁했다.
“선배님. 보고만 계실 거예요?”
그녀는 합비의 정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자기가 대신 싸우겠다고 말했다는 점, 그리고 자기보다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기에 나서주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합비는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수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기는 더 싫었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양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사하는 합비가 뭘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십여 장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손을 내뻗는 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공명의 접선 움직임이 갑자기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무, 무슨….!”
사공명은 뭔가 끈적거리는 느낌이 부채를 휘감아 오자 깜짝 놀랐다.
놀라기는 기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히 뒤돌아보고 합비가 돕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기수는 잽싸게 유성비를 뽑아 들었다.
곽염처럼 던질 자신은 없지만 그 암기가 사공명의 접선을 뚫고 들어갔던 상황을 기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유성비로 사공명을 찔렀다.
사공명은 접선으로 막았고, 순간 유성비의 예리한 날이 접선을 꿰뚫었다.
“으윽!…..”
답답한 신음과 함께 사공명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부채가 뚫리면서 팔을 찔렸는데, 거기로부터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단정홍이었다.
사공명은 스스로 혈을 짚어 암경이 더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한 후 부하들에게 큰소리로 명령했다.
“대성률은 연주해라!”
그러자 이제까지 구경하고 있던 루주와 징잡이들이 일제히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부상당한 동창 고수들 중 아직 근처에 머물던 자들이 있었는데, 음공 때문에 다들 귀를 막으며 괴성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하나둘씩 피를 토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30여명이 한꺼번에 연주하는 소리에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기수 역시 기혈 격탕을 막느라 사공명에 대한 후속공격은 포기해야 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사하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러자 합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거라.”
사하는 그의 손을 잡는 순간 괴로움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 사공명은 잽싸게 사방을 살폈다.
기수의 공격이 성공한 것보다 더욱 그를 당혹하게 만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정체불명의 경력이었다.
사공명의 시선은 합비에 고정되었다.
지금은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그 말고는 의심할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노인.
그러나 볼수록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대성률의 강력한 음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며 사공명은 겁이 덜컥 났다.
‘이제 보니 귀령공의 전인이 한 명 더 있었구나!’
그는 고민에 빠졌다.
기수 한 명이라면 쓰러트릴 자신이 있지만 그의 스승까지 가세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다.
사공명은 결단을 내렸다.
암기에 맞은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채로 부채의 움직임을 방해하던 그 경력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구나. 다음에 또 보자.”
기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합비를 한 번 노려본 후 휘적휘적 걸어가서 가마에 탔다.
너무 당당해서 도망치는 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기수는 달려들어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방금 전 공격이 성공한 것은 합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알기에 차마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연주를 멈춘 현현각 무리가 가마를 들고 멀어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씨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정홍을 두 번 성공시켰는데, 특히 두 번째는 처음과 달리 제대로 먹였다고 생각했는데 사공명은 의외로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파천강기처럼 상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공의 깊이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들고 있던 유성비를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사하가 달려와서 수선을 피웠다.
“엄마야! 난 몰라. 이 피 좀 봐.”
합비도 뒷짐을 지고 천천히 다가왔다.
기수는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이 나서시도록 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괜찮아. 우리 말고는 본 사람도 없어.”
근처에서 합비가 손쓰는 것을 봤을 만한 사람은 현현각의 대성률 연주 때문에 전부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 있었다.
사하가 기수를 잡아끌었다.
“따라 와. 지혈부터 해야겠어.”
기수는 그녀를 따라 힘없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