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25
고양이를 놔주고 관청 안으로 침입한 기수는 당직 서는 관리를 찾았다.
혼자 불을 켜놓고 장부를 뒤적이던 관리는 갑자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오자 깜짝 놀랐다. 거기에 더해 등 뒤에서 낯선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동창의 지휘관은 지금 어디에 있지?”
“웨, 웬 놈이냐!”
기수는 두 번 묻지 않았다.
“흐음…. 거기 있었군.”
염정구심술로 읽어낸 것이다.
관리는 당황했다.
“너, 너는 도대체 누구냐?”
“푹 자라. 나중에 깨어나면 꿈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다.”
수혈을 짚인 관리는 책상에 엎어져 잠들었다.
기수는 관리에게서 알아낸 장소로 이동했다.
그의 목적은 합가촌과 관련된 문서를 폐기하는 것.
그건 관아의 문서 저장고를 뒤지거나 불태운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명령 계통을 따라 위에서 눌러야 연관된 기록들을 말끔히 다 없앨 수 있었다.
그래서 동창의 환관 공량을 찾았다.
곽염이 죽은 지금, 그가 총책임자이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함양 성내를 다 뒤지고 다니는 것보다 알만 한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른 방법. 기수는 곧바로 공량의 거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비가 삼엄하군.’
곽염이 죽었으니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함께 죽은 동창 고수들이 많기 때문에 경비병의 수는 많아도 그들의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슈슈슈슈숙!…..
기수는 잔백지로 경비병 전원을 거의 동시에 제압했다.
그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기수는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아! 씨발… 나 진짜 고수네.’
무공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다른 말로 하자면 프로들을 이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사공명만 아니었다면 가히 천하제일이라고 잘난 척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밖에 무슨 일이냐?”
공량이 나오자 기수는 얼굴을 바꾸었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본 공량은 경비병들이 전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기수의 얼굴을 보고는 금세 겁먹은 표정이 사라졌다.
“신장님! 오셨군요.”
기수는 피식 웃었다.
“이젠 내가 두렵지도 않은가보지?”
“하하하! 저 녀석들이야 신장님을 몰라 뵙고 길을 막았으니 저리 당해도 싸지만, 전 신장님과 이미 구면 아닙니까.”
넉살이 좋다기보다는, 시킨 일을 전부 했기 때문에 당당한 태도였다.
공량은 문을 활짝 열고 기수를 맞이했다.
“들어오십시오! 마침 좋은 차가 있습니다.”
기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공량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제가 말입니다. 막상 재산을 풀고 보니까 마음이 너무나 풍족해지는 겁니다. 이런 경험은 정말 처음입니다. 신장님께서 저에게 이런 기분을 맛보게 해주려고 납치까지 하신 걸 보면 정말이지…”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널 위해 납치해줬다고? 어이! 이봐. 세상은 그렇게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냐. 착각하지 말라고.’
그러나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버림으로써 채워지는 경험을 신장인 자기는 못하고 욕심장이 환관이던 공량은 했다는 게 약간 부러웠다,
기수는 화제를 바꾸었다.
“곽염이 죽은 모양이던데… 동창에선 무슨 명령이 내려왔나? 새로운 지휘관을 내려 보내주기로 했나?”
“아닙니다. 전원 철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기수로서는 당황스런 소식이었다.
“철수라고? 현현각과 사마연합의 세력이 아직 건재한데 떠난단 말인가? 그럼 장안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제독동창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환관과 동창 고수들은 내일 모두 떠날 겁니다.”
“그럼 관군은?”
“관군은 남아서 장안을 지켜야지요.”
“지휘는?”
“일단 도지휘첨사에게 인수인계하고, 나중엔 도지휘사가 와서 맡을 것입니다.”
원칙대로 따지면 그게 맞는 것이긴 하지만, 동창이 앞장설 때와 관군에게만 맡겨둘 때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무림맹에 큰 부담이 될 것이었다.
‘곽염을 괜히 죽였나?’
그러나 기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무림맹 편에 서서 싸우고는 있지만 자신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사도들을 죽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를 위해 사도들과 동문 사형제 관계인 곽염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적에게 이쪽 정보가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너도 내일 떠나나?”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기 전에 나를 위해 해줄 일이 있다.”
“무엇이건 말씀만 하십시오.”
“곽염이 불필요하게 만든 공문서가 한 장 있는데…”
“서류라면 동창보다 우리 사례감이 전문 아닙니까. 얼마든지 없앨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맡겨주십시오.”
“잘 됐군.”
기수는 앞뒤 정황을 얘기했고 공량은 잘 적어둔 후 물었다.
“그런데… 이 마을이 신장님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하늘이 하는 일을 네가 상관하겠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의문도 없습니다. 불문곡직하고 내일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고마워.”
기수가 일어서자 공량이 따라 나오며 물었다.
“그런데 신장님. 제가 나중에 극락에 가면 신장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기수 입장에선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만나서 뭐 하게?”
“아무래도 처음 가보는 곳이니까 아는 사람이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헤헤…”
죽은 뒤 일을 미리 걱정하다니… 웃기는 소리였다.
‘설령 극락이 있고, 너와 내가 모두 그곳에 간다고 해도, 난 너보다 최소한 600년은 뒤에 갈 텐데 지금 얘기해서 뭐 하나.’
기수는 대충 얼버무렸다.
“세상사 모두 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법. 앞날을 어찌 알겠는가.”
“아! 그건 또 그렇군요. 어쨌거나 다시 뵙기를 학수고대하겠습니다.”
기수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그곳을 떠났다.
공량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극락이건 천당이건, 나는 갈 수 없을 거야.’
이유가 어찌되었건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천당을 바라는 건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가면 어때? 까짓 거…’
패줘야 할 놈은 패주고, 죽여야 할 놈은 죽이는 지금이 좋았다.
그리고 어떤 종교는 평생을 막 살아도 죽기 전에만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도 있다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살다가 나중에 그 티켓을 잡으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려서부터 착하게 산 사람하고 막판에 회개한 사람이 같은 천국에 가면 불공평한 거 아닌가? 그렇다고 천국에 계급을 나누면 이상할 거고….’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자기가 걱정할 일은 아니라서 그냥 무시했다.
기수는 합가촌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느냐?”
합비는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수가 과정을 모두 얘기해주자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잠깐 사이에 그렇게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오다니. 대단하구나.”
“제가 원래 좀 그렇습니다. 하핫!”
“수고했어.”
둘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사하가 나타났다.
“왜 밖에 나와 있어?”
“너야말로 이 시간에 웬 일이야?”
“무림맹에 전갈을 하고 네 상처가 걱정이 되서 왔지.”
기수는 씩 웃었다. 동이 트기 전에 찾아온 이유가 치료를 위해서인지, 닦기를 위해서인지 뻔한 상황이었다.
원래는 그녀의 뜻을 가상히 여겨 상을 줘야 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마침 잘 왔어. 우리 문주님에게 얘기를 좀 전해줘.”
사하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 시간에…”
“화급을 다투는 일이야. 난 당분간 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 네가 좀 수고해 줘. 미안해.”
“할 수 없지 뭐…. 어떤 일인데?”
“현현각 찾기를 즉시 중단하고 본진에 집결하여 방비에 충실하라고 전해줘.”
“무슨 소리야? 내가 방금 가서 현현각을 찾으라고 했는데…”
“현현각주는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거야.”
“어째서?”
“나를 제거하기 전엔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내일이면 곧바로 정세가 달라질 거야.”
“어떻게?”
“동창이 내일이면 철수할 거거든. 그러면 힘의 균형이 급격히 기울 거야.”
사하는 깜짝 놀랐다.
“동창이 왜 철수해? 그들은 맹주님의 부탁을 받고 온 거잖아? 안 그래도 호시탐탐 무림의 일에 간여하려고 노리는 자들인데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잖아?”
“상황이 그렇게 됐어. 사례감의 공태감에게 확인한 얘기니까 틀림없어. 그리고 무림맹과 동창의 협력관계는 나와 곽염이 싸울 때 이미 끝났다고 봐야지. 지금은 그들이 물러나주는 게 오히려 나아.”
“아!… 동창이 없으면 사마연합의 그 많은 병력을 어떻게 감당하지?”
“일단 관군이 제자리를 지키긴 할 거야. 하지만 제갈세가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틀림없이 천마교를 움직여 습격을 계획할 거야. 무림맹은 지금 현현각을 찾아다닐 게 아니라 내실을 다지면서 굳게 지켜야 할 때야.”
“천마교가 습격한다고?”
“이미 전에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어.”
광혼랑을 겁줘서 쫓아 보낸 게 얼마 전의 일이었다.
사하의 표정이 굳었다.
힘의 구도가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면 정말 한시가 급했다.
기수의 몸을 어떻게 닦아줄지, 계획해 온 것을 실천하는 것보다 무림맹이 미리 대비하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기수는 다음에도 닦아줄 수 있지만 보타문 제자들의 안전은 지금 챙겨야 하는 것이다.
사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급한 일이라 경공이 어느 때보다 빨랐다.
그녀를 보낸 후, 합비는 잠시 눈 좀 붙이겠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기수도 자신의 방에서 모처럼 차분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우선 북궁심법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그리고 화류의 호신강기와 태포련, 파천강기, 거기에 새로 배운 수류의 태포련 등을 차분하게 하나씩 운기해보았다.
뭔가 공통점도 있고 상이한 점도 있었는데 아직은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오행에 각각 호신강기와 태포련이 있다면 난 지금 수, 목, 화의 태포련과 화의 호신강기를 익힌 거라고 볼 수 있으니까 10개중 4개. 40%에 해당 되네.’
파천강기를 목의 태포련으로 쳤을 때 그런 거고, 정통으로 배운 건 30%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나 같은 천재가 셋을 배웠는데 나머지 일곱을 알아내지 못할 리가 없잖아?’
기수는 그렇게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합비를 사부로 모시면 그 일곱을 즉시 배울 수도 있지만, 대신 자유를 저당 잡혀야 했다. 그것은 싫었다.
자신의 천재성을 믿는 편이 좀 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도 나머지를 연계해서 깨닫지는 못했다.
‘나 혹시… 천재가 아닌 건 아닐까?’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눈을 떠보니 어느덧 사방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기수는 밖으로 나가보았는데 합비는 방을 비우고 외출한 상태였다.
“아! 배고파…”
부상당하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식욕이 평소보다 왕성했다.
주방에 먹을 게 없어 집 밖으로 나간 기수는 촌장 집 옆을 지나다가 담 너머로 들려오는 합비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슬그머니 담 너머를 보니 마당엔 안색이 안 좋은 마을사람들 몇 명이 모여 있었다.
합비에게 치료를 받고 약을 먹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합비는 잠시 앉아 쉬면서 자기 증손자와 고손자 부자가 연 날리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딱히 우스울 게 없는데, 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운 듯 했다.
촌장은 따로 상을 차려서 합비에게 과자, 차, 과일 등을 연달아 권했다.
단순히 마을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게 고마워서 대접하는 거라기보다는 예전부터 합비에게 품어 온 관심 때문에 이번 기회에 친해지려 하는 것 같았다.
합비도 사양하지 않고 계속 받아먹었다.
기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틀림없어. 어르신은 커밍아웃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일 거야. 괜히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묶여서 이도저도 못할 뿐…’
사람의 감정은 숨길 수 없는 것.
자손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우면 저토록 해맑게 웃겠는가.
기수는 슬그머니 촌장 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촌장 식구들은 기수를 환영했다.
집을 수리할 때 안면 익힌 사람들이 많았다.
“이리 앉으십시오.”
촌장은 기수를 위해서도 과자가 든 접시를 내놓고 차도 따라주었다.
기수가 감사인사를 한 후 촌장에게 물었다.
“혹시, 고기를 다져 넣은 월병은 없나요?”
“예? 월병에 고기도 넣습니까?”
“아! 없으면 됐습니다.”
기수는 과자 하나를 들고 허기를 채우며 합비를 힐끔 봤다.
아까 그렇게 웃던 사람이 지금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어르신. 제 눈치 보실 필요 없습니다. 크크크….’
그러나 합비는 함께 있는 동안 다시는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