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26
기수는 합비의 치료를 도왔다.
내상 입은 사람, 그것도 무공의 기초가 없는 사람을 추궁과혈로 치료하는 것은 생각보다 진기 소모가 심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합비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한계가 있었는데, 기수의 도움 덕에 치료는 두 배나 빨리 진행될 수 있었다.
기수의 내공이 비록 합비에 비해서는 약간 못하다고는 해도, 구파일방 장문인 수준은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에 추궁과혈 시전엔 문제가 없었다.
어느 혈도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합비가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기수는 그가 필요 이상으로 설명을 많이 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료와 직접적인 관계 없는 얘기들이 훨씬 많았다.
기수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 얘기들을 새겨들었다.
수류의 태포련을 거저 가르쳐준 것처럼, 그 얘기들에도 오행류 이론이 상당히 깊은 수준까지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가 아니라도 오행류는 후대에 전하고 싶다는 건가?’
기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가 여기저기 벌려놓은 일이 많지만 않았다면, 최종적으로는 이 땅과 이 시대를 떠나야 할 사람만 아니라면 그를 사부로 모시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 처지를 납득시켜 드릴 수 없어서 저도 답답하네요.’
기수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합비의 이론 강의를 경청했다.
그러다가 의문이 드는 부분은 환자에게 있지도 않은 증상을 핑계 대어 질문하곤 했다.
합비는 그 속내를 뻔히 알 텐데도 모르는 척 하고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저녁까지 이어진 치료 빙자 대화는 기수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역시 기초가 중요하구나.’
오행의 상생과 상극에 대한 개념부터 확고히 잡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는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오행이 안과 밖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도 중요했다.
무공으로는 호신강기와 태포련으로 표출되지만, 사실은 음양의 이치였다.
그래서 총 10개의 기법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지난 밤 동안 자기가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 10가지 기법에 대해 어느 정도의 통찰력도 가지게 되었다.
화류 먼저 익히고, 다음에 수류 익히는 식으로 하나 하나 배워서 열을 채우는 식이 아니라 오행의 음과 양을 한꺼번에 공부해야 하는 것이었다.
기수의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질문의 난이도도 올라갔고 합비의 얼굴에도 미소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기수의 이해도를 확인하고 흐뭇해하는 것이었다.
치료는 밤까지 이어졌다.
촌장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도 저마다 음식을 가져와서 합비와 기수에게 대접했다. 치료비를 일체 거절했기 때문에 음식으로라도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기수는 사양하지 않고 모든 음식을 맛보았다.
나중엔 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불렀다.
“뭘 그렇게 많이 먹냐? 미련하게…”
합비의 핀잔에 기수는 씩 웃었다.
“오늘은 이 집에서 자고 가나요?”
“자기는. 밤새 치료해야지.”
“하핫! 환자도 잠을 자야 낫죠.”
“그런가?”
그때 촌장이 술상을 차리고 두 사람을 청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좀 쉬십시오.”
기수는 자기가 있으면 합비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슬그머니 발을 뺐다.
“전 가서 공부 좀 하겠습니다.”
합비는 잡지 않았다.
“그러던지….”
씩 웃은 기수는 촌장더러 먼저 들어가라고 한 후 합비에게 말했다.
“어르신. 전에 제가 사람 마음을 조종하는 술법이 있다고 말씀 드렸죠?”
“그랬지.”
“그 술법은 말입니다. 무공이 아무리 고강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믿어지지 않으시면 제가 어르신을 상대로 한 번 시험해볼까요?”
합비는 흠칫 몸을 사렸다.
“무, 무슨 짓을 한다는 게야?”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재미로 생각해 주십시오. 후후…. 어르신은 내일 아침 해를 보기 전에 손자에게 정체를 말씀하시게 될 겁니다.”
합비는 버럭 화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하!….두고 보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될 테니까. 전 이만 갑니다!”
“이놈아! 술법 풀고 가라!”
“싫습니다. 하하하!…..”
기수는 경공을 펼쳐 잽싸게 담 너머로 달아났다.
사실, 그는 합비에게 염정구심술을 걸지 않았다. 자기보다 내공이 깊은 고수한테 컨트롤 술법을 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말을 그런 식으로 한 것은 합비로 하여금 핑계 댈 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속을 털어놓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망설이는 그에게 자기를 비난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선택은 이제 합비의 몫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기수는 치료기간 동안 합비에게 들은 얘기를 정리해보았다.
오행의 상생과 상극, 그리고 각각의 음양.
막연하지만 뭔가 알 것도 같은 느낌.
그러나 그것을 실제 진기 운용으로 옮기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일단 알고 있는 운용법에 충실하면서 관찰에 집중했다.
마침 과식으로 배가 불러서 본격적인 운공은 불편한 상태라 운기, 관찰, 자체 연구의 과정을 반복했다.
집중력을 발휘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고 있었다.
‘햐! 이쪽 공부가 만만치가 않구나.’
몸으로 익히는 무공을 머리로 연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재미와 보람이 있어서 날 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기수는 날이 완전히 밝은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몰두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마당이 시끄러워졌다.
“이놈아! 어디 있느냐! 당장 나오거라!”
합비의 목소리였다.
기수가 나가 보니 합비가 잔뜩 취한 채 팔을 휘젓고 있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이놈아!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런 사술을 쓴 거냐!”
“미, 미안합니다.”
합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충아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하느냐?”
“아! 말씀하셨군요?”
“그래. 이놈아! 이게 전부 네놈 탓이다.”
“죄송합니다.”
기수는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속으론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걸지도 않은 염정구심술 핑계를 대는 합비에게 잠시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사실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했다. 그리고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술기운 덕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것이었다. 그만큼 합비에게선 술 냄새가 많이 나고 있었다.
합비는 입맛을 다셨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충격을 많이 받을 것 같아서 충아에게만 알고 있고 일체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얼마나 갈지…”
기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정말 잘된 일 아닙니까.”
“잘 되긴 뭐가 잘 돼?”
“전에 보니까 촌장님이 할아버지와 보낸 어린 시절을 정말 그리워하더라고요. 어르신이 멀쩡히 살아계신데, 늙어서 피부가 쪼글쪼글해진 손자를 그냥 이렇게 두고 보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합비는 역정을 냈다.
“그렇다고 진실을 밝힌 게 꼭 잘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
기수는 합비가 촌장 못지않게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라는 걸 짐작했다.
누군가는 불안감 섞인 투정을 받아줘야 할 상황인 것이다.
기수는 합비가 뭐라 하건 무조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합비도 더 이상 탓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기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도 관련된 모든 것을 끊고 떠나가면 다 해결될 거라고,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 그렇더군요. 결국 자신의 짐은 전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흥! 어린놈이 인생 다 산 늙은이처럼 흰소리는….”
“하핫! 뭐, 어쨌거나 이제 집에 가 보시죠. 촌장님이 찾을 텐데요.”
“여기가 내 집인데 가긴 어딜 가?”
“아이! 왜 이러십니까? 이제 여긴 아니죠.”
기수가 등을 떠밀자 합비는 호통을 쳤다.
“밀지 마! 이놈아!”
그러나 말만 그렇게 할 뿐 두 다리는 어느새 촌장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기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이 어린 자기가 어른을 이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고, 도끼가 제 자루 못 찍고, 무당이 제 굿 못 하고, 점쟁이가 자기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합비의 결정과정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돌아간 후 기수는 냉수 한 사발을 마신 후 곧바로 다시 운기, 관찰, 연구로 이어지는 루틴에 몰두했다.
오행의 기운을 몸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수가 무공에 처음 입문했던 시절이었다면 간단히 포기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북궁천에게 배우고, 황궁에서 공부하고, 또 화류의 호신강기를 실전에 써먹은 경험, 수류의 태포련을 미약하게나마 발출할 수 있는 능력 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밥도 먹지 않고 오후가 될 때까지 또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모를 정도였다.
내친김에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샐 작정으로 마당에 나가 다시 냉수 한 사발을 마시고 돌아서는데, 파공음이 울리더니 사하가 나타났다.
“선배님은?”
“어! 왔어? 무슨 인사가 그러냐? 일은 잘 처리 됐어?”
“선배님은 어디 가셨어?”
“촌장님 집에.”
“당분간 안 오실 거지?”
“아마도…. 너 안 그래도 잘 왔다. 붕대를 갈고 싶은데 금창약도 안 보이고…”
그러나 사하는 기수를 방으로 밀어붙여 침상에 누이더니 바지부터 벗겼다.
“윽! 이봐… 진정하라고.”
“비룡검문 문주님이 맹주님에게 얘기해서 지금 무림맹은 모든 수색을 중단하고 자체 방어태세에 돌입했어.”
“으으… 수, 수고했어. 으으….”
사하는 이틀 동안 벼르고 벼르던 동작들을 시전했다.
기수는 경험을 통해 여자들이 흥분했을 때 남자 이상으로 강렬한 욕정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처 치료를 포기하고 그녀에게 맞춰주었다.
‘아! 공부하려고 했는데….’
고3때 여자 사귀지 말라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사하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붕대를 갈아주었다.
그리고 무림맹의 일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문주님이 문파 일 걱정 말고 몸조리 잘 하라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어.”
“다들 잘 있지?”
“너 말고는 위험한 적을 만난 일 없으니까.”
“하긴….”
현현각 각주 사공명은 사도들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기수는 사하의 매끄러운 갈색 피부를 코와 혀와 손으로 탐험하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너. 설득력이 대단한데.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한 사람의 말만으로 무림맹 전체가 움직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말야.”
“그건 운이 좋았어. 때마침 천마교의 멸천제가 움직인다는 정보가 들어왔거든.”
“멸천제? 그럼 마교의 삼천제가 다 모이는 건가?”
“현현각이 아니더라도 우리 무림맹 쪽이 더욱 불리해지는 거지.”
“심각하네.”
기수는 예전에 홍안산에서 만났던 옥면공자 황운학을 떠올렸다.
108마령 중 한 명으로 멸천제 휘하였는데, 비록 천마교 소속이라고 하지만 의리가 두텁고, 말이 통하는 사나이였다.
‘이제 그 사람하고도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생기는 건가?’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멸천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혈천제하고는 몹시 친밀한 사이였고, 암천제와는 안 좋은 감정이 생겨 그의 부하 마령 둘을 죽인 원수지간.
그러나 멸천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천마교의 핵심은 천마교주와 삼천제.
그들 4명에 속하니까 범상치 않은 고수일 거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가만있어 봐… 무림맹과 일월신교는 물론 녹림72채, 삼황맹, 수로맹에 모두 사도가 있었는데 천마교라고 예외일 리가 없잖아?’
우두머리는 제외한 고위 간부라는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추측해 보건데 천마교에 사도가 있다면 멸천제일 가능성이 90%를 넘을 것 같았다.
기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하가 깜짝 놀라서 이불을 당기며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
멸천제가 함양에 새로 배치되는 게 그냥 단순한 천마교의 전술 운용인지, 아니면 사도 이곤이 당했다는 보고가 올라갔기 때문인지 알고 싶었다.
“이 밤중에?”
“응. 궁금해서 못 참겠어. 미안해… 아야!”
“안 돼! 절대 못 가!”
“아야! 그건 좀 놓고 말로 하자. 말로… 아야!”
“가더라도 내일 아침에 가!”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건 놓고….”
메추리알과 탁구공의 중간쯤 되는 두 개의 소중한 기관을 보호하기 위해, 기수는 새벽까지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결국 기수는 정공법을 써서 사하를 넉다운 시킨 후 옷을 입었다.
그리고 축 늘어져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 후 밖으로 나와 경공을 시전했다.
멸천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감을 끌어 올려 무림맹 밖 고수의 기도를 찾아다니다 보면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