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27
야밤에 경공을 시전하여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밤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폐 가득 들이마시는 시원함.
근육과 기혈이 팽팽 돌아가 주는 상쾌함.
거기다가 중력을 거슬렀다 순응했다, 롤러코스터 타는 듯 한 즐거움까지 가미되었다.
함양에서 북서쪽을 향해 무작정 달린 것은 이전 무림맹의 본진이었지만 지금은 천마교의 점령지가 된 땅이기 때문이었다.
중간 중간 잔챙이들이 감지되는 것은 다 무시하고 고수의 기도만 찾았다.
그러나 고수건 하수건 다들 잠 잘 시간이라 기수도 해가 뜰 때까지 잠시 쉬기로 했다.
나무 위에서 맞는 일출은 장관이었다.
TV나 컴퓨터 모니터가 없는 이런 시절엔 해와 달, 산과 별이 정말 대단한 구경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자 기감을 자극하는 기도들이 슬슬 드러났다.
기수는 차분하게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채점표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 정도는 마령 수준이라고도 할 수 없겠는 걸.“
삼천제가 각각 36마령씩 총 108마령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지금 정사대전이 한창인 이곳엔 최소한 광혼랑, 소혼랑 수준의 기도가 수십 개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감지되는 것은 미약한 것들 뿐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적이 내공을 집중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인 듯 했다.
‘슬쩍 긴장감을 조성해볼까?’
적 몇 명을 해치워서 경보를 울린다거나, 아니면 이쪽에서 먼저 살기를 증폭시켜서 적진의 고수들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좀 꺼려졌다.
양손에 모두 붕대를 감고 있다가 사공명과 재대결을 벌이느라 아물던 상처가 다시 터진 상황. 가능하면 이번엔 나을 때까지 그냥 두고 싶었다.
‘특기를 발휘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예전 소항산 산채가 일월신교에 포위되었던 때도 자유롭게 그들 사이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역용술과 염정구심술 덕분이었다.
기수는 우선 적이 밀집된 곳 근처로 가서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긴 후 마교도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30분, 1시간이 지나면서 적의 배치현황, 인원, 경계근무 교대 방식과 인터벌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수는 외곽 경계 서는 마교도 쪽으로 은밀히 접근했다.
그리고 근무를 마치고 교대하여 돌아가는 자의 뒤를 쫓아 가볍게 점혈을 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혈을 눌린 마교도는 겁먹은 표정으로 기수를 훑어보기만 할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협조만 잘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네 소속은 어떻게 되지?”
마교도는 혈이 짚여 말을 못하게 해놓고 질문을 하는 상대의 행동에 당황했다.
그러나 기수의 질문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암천제 휘하인가? 그나마 다행이군.”
곧바로 멸천제를 찾아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혈천제를 만나지 않은 것은 잘 된 일이었다.
혈천제에 대해서는 아련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도 공존했다.
자기를 보자마자 마옥혈린수로 제압하려 할 텐데, 이번엔 순순히 당해줄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결국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건 대결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그녀와는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멸천제는 어디에 있지?”
마교 졸개는 온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장소에 대해선 몰랐다.
필요한 걸 모두 알아낸 기수는 그의 수혈을 깊이 누른 후 겉옷을 벗기고, 그에겐 자기 옷을 입힌 뒤 으슥한 곳에 잘 누이고 낙엽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역용술로 그의 얼굴로 바꾼 후 칼을 들고 마교 진영에 들어갔다.
‘아! 배고파.’
불현듯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밥을 먹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가 알기로, 이곳의 담당은 혈천제였다.
그런데 암천제에 이어 멸천제까지 보강된다는 것은 이번에 아주 무림맹을 말살하자는 뜻을 세운 게 분명했다.
제갈세가가 조종하는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 연합군에 현현각이 가세한 것만으로도 이미 무림맹은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
천마교까지 삼천제를 총동원 한다면 무림맹이 진짜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겠지만, 지금은 비룡검문과 보타문에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천마교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전략과 전술은 어떤 식으로 세우는지 이번 기회에 알아보고 싶어졌다.
기수가 식당으로 지정된 군막으로 가자 몇 몇 같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아는 체를 했다. 기수는 그들과 심리적 동조를 시도하면서 대충 턱짓으로 응대해주었다.
“이봐. 손엔 왜 붕대를 감았나?”
“다쳤어.”
“뭐 하다가?”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가 얼굴 베낀 사내의 목소리를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단답형으로만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무대응을 선택한 것이다.
다행히 상대는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기수 입장으로선 다행스런 일이었다.
마교는 한 문파에서 동문수학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 일종의 종교 집단이었다.
평소엔 저마다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종교 모임 때만 얼굴을 보는 게 기본인 것이다. 그래서 잡탕 모임인 일월신교보다는 낫지만, 어려서부터 사형제로 자라온 일반 문파들보다는 결속이 느슨한 편이었다.
왜 붕대를 감았느냐는 것도 그냥 스쳐가는 인사말에 불과했다.
식당에 들어가 배식을 받은 기수는 살짝 놀랐다.
고기와 야채가 풍성했다.
‘무림맹보다 훨씬 잘 먹네. 돼지고기, 양고기에 이건 뭐지? 맛이 좀 특이한데?’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 얼굴에도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동안 무림맹과 대치하던 감숙성을 집어삼킨 승자의 모습.
창고를 차지하고 금고를 열어 풍족해진 모습이었다.
‘위너 테익스 잇 올이군.’
대부분이 불모지인 성 하나를 점령해도 이 정도인데, 장안이라도 점령하면 진짜 대군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라가 쪼개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조정에서도 뭔가 조치를 하겠지.’
무림맹 혼자 전부 감당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불리 먹고 차까지 한 잔 마신 기수는 이곳 주둔지의 최고위층을 찾아 나섰다.
암천제는 아니더라도, 그의 휘하 마령 정도만 되어도 무림맹에 대한 공격계획이나 멸천제가 어디로 오는지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무림맹 공격에 대한 정보는 비룡검문과 보타문을 위한 것이고, 멸천제의 소재는 자신을 위한 정보였다.
‘만약 멸천제가 사도라면?…’
그렇다면 손의 상처가 도지더라도 최대한 빨리 죽이는 길을 택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이곤과 싸울 때 느꼈지만, 사도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수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위기감을 느끼고, 그 주군이란 자가 특수한 교육을 시키는 게 분명했다.
‘시간이 갈수록 나한테 불리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조급한 마음까지 들었다.
깃발이 높이 세워진 군막 쪽으로 가던 기수는 그쪽에서 나오는 일련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화려한 비단옷이라 일단 길을 비켜섰다.
전장에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고위직급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옷보다 얼굴이 더 눈을 끌었다.
‘예쁘다!’
그거 말고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두 명의 여인. 앞장 선 여인은 20대 초반 혹은 10대 후반으로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였고, 그 뒤의 키 큰 여인은 약간 차가운 인상의 20대 중반 미녀로 옷차림이나 행동이 앞선 여인의 보표로 보였다.
검비라고 하기엔 기도가 너무 강했다.
기수는 앞선 여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동그란 형태이면서도 눈은 들어가고 이마와 광대뼈는 살짝 튀어나와서 입체감이 살아 있었고, 제비처럼 뾰족한 턱과 도톰한 입술이 엄청나게 귀여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동안 무림맹에 있으면서 능소화를 비롯한 여러 미녀들을 봐왔지만, 호운혜와 사하 때문인지 그다지 끌린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이 여인은 달랐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지만 그냥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이 아가씨… 진짜 마음에 드는데?’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전신을 스캔했는데, 가슴은 빵빵하고 허리는 잘록하고 다시 골반은 빵빵하면서 키고 작지 않았다.
‘옷 안쪽이 궁금해!’
다시 얼굴로 시선이 돌아올 즈음, 두 사람은 기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뒤따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 깔아라. 파내기 전에…”
여자인데도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림새나 기도로 봐서 최소한 마령급 이상의 간부임이 분명하니까 경계근무나 서는 처지의 교도가 빤히 쳐다보는 건 확실히 불손한 행동이었다.
“저기요!”
기수가 말을 걸자 두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기수는 아차! 싶었다.
이대로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부르긴 했지만 자기는 지금 잠복근무중인 무림맹의 간부 아닌가.
‘불러서 뭘 어쩌려고!….’
대책이 없었다.
보표 여인이 아까보다 2배는 강한 살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왜?”
기수는 그냥 튈까, 한 대 치고 튈까를 고민하면서 버벅거렸다.
“그, 그러니까… 그, 그게 말입니다.”
“용건도 없이 부른 거냐?”
보표 여인의 손이 검 자루를 쥐었다.
기수로서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모처럼 잠입에 성공했는데 이런 꼴이라니….얼굴은 왜 그렇게 예뻐가지고…’
예쁜 것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중 귀여운 쪽으로 극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상황을 수습해야 할 판인데, 그 여인이 말했다.
“너 나하고 사귈래?”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서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뭐, 뭐라고? 방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러자 여인이 생글생글 웃었다.
“너. 사귀겠다고 한 거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 하지는 않겠지?”
기수는 정신이 없었다.
보표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왜 안 돼? 드디어 나하고 사귀겠다는 남자를 찾았는데.”
“천제님이 아시면 엄청나게 화를 내실 겁니다!”
“내가 왜 오빠 눈치를 봐야 돼?”
기수는 그녀의 어이없는 질문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더 크게 놀랐다.
‘천제의 동생이라고? 설마… 암천제의?…’
보표 여인은 화풀이 대상을 기수로 정했다.
“왜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내? 당장 저리 가지 못해?”
“아!… 그, 그리 하겠습니다.”
기수는 사이드스텝을 밟았다.
예쁘긴 하지만 처음 만난 남자에게 대뜸 사귀자고 하는 정신 상태나 천제의 동생이라는 신분을 고려하면 절대 가까이 해선 안 되는 여인이었다.
기수가 몸을 피하자 귀여운 여인이 화를 냈다.
“한백랑! 네가 감히 내 일을 방해해?”
순간, 그녀에게서 무시무시한 기도가 폭사되었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으윽! 이건 뭐 거의 혈천제급이네…’
음양대법 하기 전의 그녀와 비슷한 레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백랑이라 불린 보표 여인도 움찔하여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자기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아가씨.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이런 자와는 말을 섞는 것조차 아가씨의 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수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여인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한백랑에게 일부러 보라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기수를 향해 말했다.
“난 자영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예? 저, 저는…. 양십삼이라고 합니다.”
“어머! 호호호…. 십삼이면 위로 형이 12명이나 있는 거야?”
“아! 예… 우리 아버지가 첩이 많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기수는 지금 자기가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양기수! 정신 차려 임마. 여자가 예쁘다고 해서 헤롱거릴 레벨은 넘어섰잖아!’
하지만 자영의 생글생글 웃는 미소가 너무나 귀여워서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직 그 레벨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자영이 물었다.
“넌. 어디 소속이지?”
“예. 저는 건곤방의 방도입니다.”
“거기라면 문제없겠군.”
“무슨 문제 말씀입니까?”
“넌 오늘부터 소속을 바꾼다. 내 호위로. 방주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기수는 당황스러웠다.
‘이봐! 너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니냐? 방금 전엔 사귀자며?’
한백랑도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무슨 호위가 또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 명은 거두어주십시오!”
“왜? 내 호위를 오빠만 임명하란 법 있어? 나도 임명할 거야. 그리고 내 호위가 되면 격에 맞고 안 맞고 따질 필요 없이 자유롭게 사귈 수 있잖아.”
기수는 즉시 반박했다.
“직업적으로 상하관계가 되면 사귄다고 할 수 없지 말입니다.”
한백랑은 기수를 노려봤다.
어디 감히 언감생심 사귄다는 말을 입에 담느냐는 표정이었다.
사실, 자영의 돌발 행동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다들 알기에 다들 삼가고, 조심하고, 사양했다.
그러다가 오늘 ‘응. 그러자.’라고 대답한 멍청이가 출몰한 것이다.
자영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둘 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 내 뜻은 정해졌으니까.”
한백랑은 기수를 죽일 듯 노려봤고, 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안 돼. 좋지 않아…’
그러는 중에도 자영의 미소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