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29
자영은 오빠에게 악을 써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 호위를 왜 잡아왔어?”
암천제는 부하들 보는 앞에서 오빠로서의 체면 때문인지 헛기침만 몇 번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영은 멈추지 않았다.
“말해 봐! 날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의외로, 강압적인 명령조가 아닌 차분하게 달래는 말투였다. 10살이 훨씬 넘는 나이차. 평소 암천제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고려하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양십삼이 여기 있는 이유가 뭐야?”
암천제는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우리 천마교의 소중한 자원이다. 호위를 고용한다면 의당 내가 알아야지.”
“좋아. 얼굴 봤으니까 이제 됐지? 데려간다?”
“아니. 저 자는 출신이 불분명해.”
“아! 이름 때문에 그러는 거야? 밖에서 부르는 이름과 가족이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경우는 얼마든지 있잖아. 오빠도…”
“아! 거기까지… 이름 때문이 아니고 건곤방주에게 물어봤는데, 방을 위해 일한지 1년도 안 되었다는구나. 그 이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자영이 기수에게 물었다.
“너. 우리 교에 입교하기 전엔 뭐했어?”
기수는 대충 둘러댔다.
“입교는 늦었지만 가족 모두가 옛날부터 명교를 믿었기 때문에 저도 태어날 때부터 명교 신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제 행적이 없는 것은 심산유곡을 찾아다니며 이름 있는 고수를 만나 무공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자영이 암천제에게 말했다.
“이제 됐지? 데려간다.”
“잠깐!”
“왜 또?”
“너의 호위가 되려면 실력이 있어야 된다. 어쩌면 출신보다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정작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호위의 무공이 하수라 별 도움이 안 된다면 그동안 밥 먹여 키울 필요가 뭐 있겠느냐?”
자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럼 오빠는 저 언니들 왜 키워? 싸움도 안 시키면서?”
암천제는 말문이 막혔다.
백의의 시녀들은 전투 이외에 하는 일이 많았다.
동생에겐 차마 얘기하기 어려운 임무가 특히 많았다.
“사람을 키운다고 하면 쓰나?…”
“오빠가 먼저 그랬잖아!”
“어쨌거나 적어도 마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네 호의로 삼을 수는 없다. 이건 사적인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명령이다.”
“명령? 흥! 거기 못 따르겠다면?”
순간, 자영을 둘러싼 공기가 붉은 빛을 낸다는 느낌이 들면서 가공할 살기가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기수는 깜짝 놀랐다.
‘이 여자. 뭐지?’
어쩌면 동생이 암천제보다 더 고수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쩐지 조심스럽게 대한다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
다만, 기도가 엄청나게 강하긴 하지만 몹시 불안정하고 거칠었다. 그리고 자영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어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암천제는 양손을 아래로 내리 누르는 제스처로 자영을 달랬다.
“진정해라… 진정해. 오빠가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자영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건곤방 방도한테 마령급의 무공을 요구하는 게 틀린 말이 아니라고?”
“건곤방에 그냥 있으면 누가 뭐라 하겠느냐? 하지만 너도 생각을 해봐라. 네 호위를 하려면 적어도 한백랑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자영의 기세가 살짝 누그러들었다.
암천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만약 여기 있는 구혈의 공격을 10초식만 막아낸다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어떠냐?”
기수는 구혈이란 자를 봤다.
자기를 데려온 두 마령 중 약간 마른 쪽으로, 눈빛이 몹시 음험해 보였다.
‘저 자의 10초를 받아내라고? 말도 안 돼…’
암천제가 보는 앞에서 실력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게 문제였다.
자영이 말했다.
“실력을 입증하는데 무슨 10초나 필요해? 3초면 되지.”
기수 입장에선 그것도 많았다.
암천제는 선심 쓰듯 말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이번에도 내가 양보하는 거다. 허허…”
자영을 둘러싼 마기가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3초를 버티면 두 번 다시 양십삼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거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말라고! 너한테 져주는 척 하려고 처음에 일부러 많이 불렀을 뿐이잖아?’
암천제는 구혈에게 턱짓을 했다.
자영이 승낙했으니까 빨리 끝내버리라는 의미였다.
구혈은 목례를 한 후 기수 앞에 서서 말했다.
“일어서라.”
기수는 마지못해 일어나 자영과 한백랑 쪽을 봤다.
한백랑은 상황을 파악하고 약간은 걱정하는 눈빛인데 반해, 자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열심히 싸우라고 응원하는 표정이었다.
‘내 여동생이 너 같으면 진짜 한숨 나오겠다.’
외아들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구혈이 몸을 한 차례 풀더니 말했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해볼까?”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급격히 간격을 좁히며 기수의 명치로 주먹을 뻗었다. 웅크린 자세인데다 팔도 다 뻗지 않아서 어딘가 소극적인 느낌이었지만, 기수는 그 주먹에 실린 위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젠장!’
기수는 약간 과장된 보법으로 황급히 물러서며 아슬아슬, 간신히 그 주먹을 피했다.
주먹이 옷에는 닿았지만 살에는 닿지 않은 간발의 차이였다.
구혈의 표정이 변했다.
“흥! 제법 몸이 날랜 놈이구나.”
기수가 그에게 물었다.
“반격을 해도 됩니까?”
“당연하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두 초식 남았다.”
상대가 반격하면 죽인 뒤 변명하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기수는 황급히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기합을 내지르며 자기 쪽에서 먼저 선공을 가했다.
‘두 초식을 흘려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구혈을 눈을 빛내더니 검결한 손으로 기수의 천돌혈을 찔렀다.
몹시 기민하고 예리한 수법.
과연 천마교가 자랑하는 108마령 중의 1인다운 솜씨였다.
기수 입장에선 그 초식을 파해하면 실력이 들통 날 것이고, 그렇다고 그냥 맞으면 중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기수는 내민 발을 일부러 미끄러트려 중심을 잃었다.
하수가 고수를 상대로 싸울 때 나와서는 안 되는 실수.
그러나 기수는 그것을 고의로 만들어 급소가 찍히는 상황을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허우적거리는 팔 동작으로 구혈의 손을 쳐내려 했다.
“어딜 감히!”
구혈은 완강하게 버텼고, 오히려 내력이 약한 기수의 팔이 튕기면서 칼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기수의 손을 벗어난 칼이 공교롭게도 구혈의 얼굴로 날아갔다.
마치 암기처럼 똑바로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에 깜짝 놀란 구혈은 한 발 횡으로 디뎌 칼을 흘려보냈다.
바로 그때. 기수가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어이쿠!”
구혈이 칼을 피하며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팔을 휘젓는 동작에 얼굴을 맞은 것이다.
구혈은 당황했다. 암천제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느냐! 어서 일어나라.”
기수는 스코어 리드할 때의 중동 축구선수들처럼 얼굴을 감싸고 신음만 토했다.
한백랑이 잽싸게 자영에게 말했다.
“세 초식이 지났습니다.”
“아! 맞다. 처음에 주먹, 두 번째 검결, 세 번째…. 손등? 어쨌거나 살아남았으니까 이제 된 거지?”
기수는 그제야 슬그머니 일어섰다.
구혈과 암천제는 서로를 마주봤다.
세 번째는 제대로 살초를 쓸 생각이었는데 엉겁결에 휘두르는 팔에 자기가 다가와서 맞아버렸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암천제는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의 실력이 구혈에 비해 형편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우연이 겹쳐서 세 초식을 버텨낸 것이다.
운이 좋아도 그렇게 좋을 수 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자영이 기수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이젠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할 거야. 우리 오빠가 다른 건 몰라도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소인배는 아니거든.”
기수는 쪼르르 자영의 옆으로 가서 섰다.
암천제는 화가 났지만 더 이상 기수를 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좋다. 어쨌거나 세 초식이 지났으니까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기수는 그에게 군례를 올렸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너다. 계속 몰아붙였으면 네놈 대가리에 구멍 날 뻔 했어.’
그렇게 암천제의 시험에 합격하고 돌아오자 자영은 기수를 자기 군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의 군막 안에는 휘장 쳐진 침상과 두 개의 탁자, 서너 개의 상자 들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온갖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주로 장기니, 마작이니, 구련환이니, 화용도니 하는 퍼즐게임들이었다.
‘머리 쓰는 걸 좋아하나보군.’
좋아한다고 해도, 처신을 보면 똑똑한 건 아니었다.
“거기 앉아.”
기수는 자영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자영은 천막과 이어진 다른 천막으로 들어가 차 주전자를 들고 나왔다.
‘천막을 몇 개나 이어붙인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다 보니까 비록 행군용 천막이라고 해도 여인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거라 기분이 묘했다.
“다치진 않았어?”
“턱이 약간 얼얼하지만 괜찮습니다.”
“너. 무공 연마 좀 더 해야겠더라.”
“나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핫!”
기수는 그녀가 왜 이러는지 궁금했다.
“시키실 일이 없으시면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자영과 단둘이 있는 게 두근거리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행동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나가면 오빠가 또 잡으러 올 거야. 아니. 어쩌면 이번엔 자객을 보낼지도 몰라.”
“설마요….”
“우리 오빠가 얼마나 집요한 성격인지 넌 몰라. 어쨌거나 당분간은 나하고 함께 지내는 게 안전할 거야.”
밤에도? 라는 질문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차를 다 마신 뒤에도 멀뚱멀뚱 가만히 앉아 있자니 자영이 물었다.
“너 바둑 둘 줄 아니?”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랬나? 그럼 장기는?”
“장기라면 몇 번 둬 본 적 있습니다.”
“그래? 잘 됐다!”
그녀는 즉시 장기판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한 판 두자!”
“그러죠 뭐.”
별 생각 없이 알을 집어 들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알의 크기가 크고 작은 한국 장기와 달리 크기가 왕부터 졸까지 똑같았다.
판 가운데 빈 사각형이 길게 놓인 것도 그렇고 마를 전부 바깥으로 놔야 하고 왕도 1선으로 내려놓고 시작해야 했다.
“야! 너 장기 둘 줄 아는 거 맞아?”
기수가 차 길을 열려고 졸을 옆으로 쓸자 자영이 곧바로 화를 냈다.
“왜 그러십니까?”
“졸이 어떻게 옆으로 움직이니? 장강도 안 건넜는데?”
졸이 옆으로 가면 안 된다니… 뭐 이런 룰이 다 있나?
중국 장기는 한국 장기와 완전히 다른 게 분명했다.
기수는 자수하기로 했다.
“사실은… 가는 길을 잘 모릅니다.”
자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처음부터 가르쳐줄게.”
하나하나 얘기를 듣고 보니 왕, 사, 포, 상, 졸의 규칙이 달랐다.
그러니 한국 장기식의 기본 전략이랄까, 판을 짠달까 하는 게 전혀 불가능했다.
첫 판은 가는 길 익히는 셈치고 두다가 가볍게 져버렸다.
“호호호!…. 내가 이겼다.”
자영은 벌떡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거의 춤까지 출 기세였다.
“한 판 더 두자!”
기수는 멀뚱멀뚱 앉아있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하자는 대로 했다.
그렇게 연달아 세 판을 지고 나니까 은근히 열이 올라왔다.
‘한중전을 이렇게 계속 질 수만은 없지.’
가는 길이 익숙해지니까 조금씩 전술이 눈에 들어왔다.
진법 공부를 했던 것도 약간은 도움이 되는 느낌이었다.
결국 다섯 번째 판에선 기수가 이겼다.
“끼얏호! 오, 예!…..”
기수는 히딩크 세리머니를 하며 천막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자영이 화난 얼굴로 말했다.
“방금 건 한 수만 물러줘. 내가 착각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제까지 한 번이라도 물러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요!”
자영은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굴렀다.
“흥! 좋아. 이리 와서 앉아!”
그녀는 기물을 새로 놓았다.
기수도 심호흡을 한 후 진형을 갖추었다.
자영이 실수를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못 이길 상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전의가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