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46
새벽에 교도 한 명이 들어와서 물 한 모금 마시게 해준 게 전부일 뿐, 마령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기수로서는 괴로운 시간이었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초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한 말이 모두 맞더구나. 미안하다.”
그는 손가락을 퉁겨 간단히 점혈을 풀어주었다.
확실히 다른 마령들보다 월등한 무공.
멸천제를 따라왔던 흑승, 등활보다도 한 단계 위인 것 같았다.
‘멸천제가 자기 없는 동안 군영의 지휘를 맡겨둘 만 하구나.’
기수는 그가 사도는 아니지만, 동창의 곽염처럼 특별 레슨을 받은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따라 온 교도가 수갑과 족쇄를 풀어주자 기수는 굳어 있던 몸을 골고루 스트레칭하며 마령에게 물었다.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무림맹 공격은 계속한답니까?”
초열은 비록 상대가 마령은 아니지만 자영소저의 호위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자기가 아는 대로 얘기해주었다.
“작전은 중단되었다. 우선은 천제님의 사인을 밝히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양 진영에서 사람들이 오기로 했다.”
“그렇군요.”
“넌 가장 중요한 증인이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야 한다.”
“배고픕니다.”
초열은 교도에게 턱짓을 했다.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갈아입을 옷을 갖다 줘라.”
기수가 얼른 덧붙였다.
“깨끗한 붕대도 부탁합니다. 잘 듣는 금창약도 있으면 좀… 그리고 큰 거울도 하나 있으면 좋겠네요. 혹시… 따듯한 물 가득 채운 목욕통이 준비될 수 있을까요?”
초열이 한 대 때리려고 하다가 참는 기색을 보였다. 말 그대로 중요한 증인이고, 또 암천제 진영 사람이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수가 그런 엉뚱한 요구를 한 것은 정말 그런 것들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곧장 나가려는 마령을 조금이라도 오래 잡아두고 싶어서였다.
‘왜 염정구심술 동조가 잘 안 되지?’
심령 제어는 상대의 내공이 강한 만큼 상당히 부담스러운 도전이지만, 마음을 동조하여 읽는 것은 그보다 난이도가 훨씬 낮은데 좀처럼 연결이 잘 안 됐다.
‘아!…. 지금 내 몸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그렇구나.’
온몸에서 통증이 전해져 오고, 기력이 쇠해서 일단 자기 마음부터 안정이 안 되니까 동조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자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맞춰 줘라.”
초열이 신경질적으로 교도에게 명령한 후 나갔다.
기수는 덕분에 남의 군영에 와서 따듯한 목욕을 하게 되었다.
벗고 보니 정말 온몸이 다 멍투성이였다.
‘고마워. 멸천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노래도 있지만, 어쨌거나 실컷 두들겨 맞은 덕분에 얻은 것도 많은 대결이었다.
뜨거운 물로 몸을 풀고, 붕대를 새로 감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기름진 음식을 양껏 먹고, 운기조식 한 번 하고 나니까 그나마 기혈 흐름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기수는 밖으로 나가 마령을 찾아갔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아까 그 군막에서 기다려라.”
“마령님을 따라 다니게 해주십시오. 안 그래도 미지의 적에게 당했는데, 저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압니까?”
그럴듯한 얘기인지라 초열도 더 이상 돌아가란 말을 하지 않았다.
기수는 마령을 따라다니며 다시 한 번 동조를 시작했고, 이번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금씩,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점유율을 높여서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
군영 재배치를 명령하고 그 보고를 받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중에 기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마령님은 우리 진영의 마령들보다 훨씬 무공이 고강하신 것 같군요. 멸천제님이 무슨 특별한 수련이라도 시키셨나봅니다.”
“특별한 수련이라….”
초열은 멸천제와의 옛 기억을 더듬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기수는 그의 회상을 읽을 수 있었다.
인적 없는 계곡, 거기까지 가는 길, 그 안에서 있었던 여러 상황들이 빠르게, 단편적으로 휙휙 지나갔다.
기수는 그것들을 잘 기억해두었다.
안타까운 점은, 멸천제와 두 마령은 보이는데, 주군이란 남자는 발이 쳐진 초옥 안에서 말만 할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아 얼굴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목소리만으로 추정해보자면 40대쯤 될 것 같았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성우처럼 근사했다.
초열의 회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교도 한 명이 들어와 급한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암천제님과 혈천제님이 곧 도착하신다고 전갈이 왔습니다.”
“맞을 준비를 해야겠구나.”
초열은 급히 교도들을 불러 모았다.
멸천제와 두 마령의 시신을 혈천제, 암천제에게 보여 정밀하게 살해수법을 검증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해야 하는 중요한 회합이었다.
기수는 갈등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초열 옆에 있으면서 자세한 정보들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암천제가 온다면 자영도 따라올 가능성이 컸다.
그녀와의 재회가 기대되기는 했다.
그러나 주군이란 자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에 비하면 우선순위가 낮았다. 그 어여쁜 미소, 따끈한 속살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쳐야 할 때인 것이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자제력이 강한 거지?’
자영 같은 미녀를 앞에 두고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기수는 초열에게 허락을 구했다.
“전 잠시 뒷간에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겁니다.”
“빨리 와야 한다.”
기수는 자연스럽게 그 길로 도주를 시작했다.
암천제와 혈천제를 맞이하느라 다들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기수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었다.
숲길로 숨어들어 거리를 벌린 후 본격적으로 선풍비를 시전한 기수는 잠깐 사이에 산 하나를 넘어 멸천제의 군영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청탑산이란 이름이었지?’
기수는 초열의 기억을 자기 기억처럼 더듬어서 동쪽으로 달렸다.
그 근처까지만 가면 길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달리고 또 달리고. 한참 동안 경공술을 펼치면서 기수는 조금씩 한계를 느꼈다.
원래, 인적 없는 산에서 경공을 펼치는 것은 기수의 취미 중 하나였다.
뚜껑 없는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는 기분, 뉴욕의 빌딩 숲을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몸이 땅을 박차고 오를 때, 땅에 착지할 때 모두 전신에서 통증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찌릿찌릿한 고통이 모든 뼈마디에서 다 느껴졌다.
기수는 결국 경공을 멈추었다.
‘아!…. 아무리 나라고 해도 하루 만에 완치는 무리인가?’
뼈가 부러지지 않았을 뿐, 사실 온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내공도 잘 모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오줌을 누면 피가 섞여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사지가 뜻대로 움직이고 내공이 기경팔맥을 따라 순환하는 데서 만족하자.’
무리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는 인가로 내려가 평범한 옷을 사서 갈아입고, 박도도 한 자루 사고, 밥도 챙겨 먹고, 건량도 충분히 장만한 후 다시 산길로 돌아와 조금씩 경공의 시간과 속도를 늘려갔다.
그래도 가만히 누워 있는 것보다 계속 움직이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경공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통증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 열흘? 아냐… 1주일이면 100%가 될 것 같군.’
기수는 자신의 강인함을 믿었다.
그렇게 사흘을 더 간 기수는 마침내 목적지 근처에 도달하게 되었다.
청탑산(靑塔山).
글자 그대로 마치 푸른색 탑처럼 생긴 뾰족 봉우리들이 수십 개나 이어진, 몹시 험준한 산이었다.
‘봉우리가 높으면 계곡이 깊다던데….’
기수는 일단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 바퀴 빙 둘러 살펴보기로 했다.
적의 근거지.
어쩌면 주군이란 자를 만날지도 모르는 상황.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그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군이 아닌 사도를 만난다고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개방의 이곤, 그리고 천마교의 멸천제와 차례로 싸운 경험을 통해 추정해보자면, 남은 3명의 사도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워서 최소한 멸천제, 혹은 그 이상의 무공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서둘러 들어갔다가 당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우선 상황파악부터 할 필요가 있었다.
관도를 따라 산을 한 바퀴 돌면서, 기수는 기감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산에 있는 고수의 기도를 감지하려 했다.
잰 걸음으로 서둘렀지만 산의 규모가 커서 꼬박 하루가 걸렸다.
결과는 허탕.
고수는커녕 사람의 기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산골에 사는 화전민이나 약초 캐는 심마니, 사냥꾼 정도의 미약한 기도가 전부였다.
객잔을 잡아 휴식을 취하면서, 기수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도 없는 모양이네…’
하긴, 사도가 이런 산골에 오래 머물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기 임무가 있으니까 특별교육은 짧고 심도 있게 했을 것이었다.
‘내일은 들어가 볼까?’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미지의 담 너머에 수백 마리의 맹수들이 우글거리는데 괜히 넘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 기분.
‘이제까지처럼 사도를 만나는 날까지 기다리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이 점점 강해지는데 수동적인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도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들어가 보자. 나는 길을 아니까 조금씩 들어가다가 만만치 않은 기도가 느껴지면 그때 멈춰도 되잖아. 아니면 끝까지 들어가는 거고…’
여기까지 와서 겉만 맴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정을 내린 기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문득 세상에 자기 혼자뿐이고, 모든 위험을 스스로 감당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중원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동료도 여럿 생겼지만 결국 운명과 맞설 사람은 자기 혼자였다.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약간 춥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기수는 곧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맞서 싸워주마! 덤벼라, 운명아.’
어찌되었건 나머지 4명을 마저 죽여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 3분의 2를 지나왔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강하게 마음을 먹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다른 생각이 났다.
‘자영은 내가 없는 걸 보고 당황했겠지? 후후…’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미안하기로 따지면 합비와 사하, 비룡검문의 문주와 제자들. 더 멀리 가자면 혈매궁의 사매들까지 생각해야 했다.
그들을 뒤로 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자기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니까 용기를 내어 한 발 내디딜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건량과 물을 충분히 챙긴 기수는 청탑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열의 기억에서 읽은 장소는 상전곡이라는 협곡.
전에 와 본 것 같은 느낌으로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툭 트인 장소는 피해서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계곡 입구까지 가도록 적의 기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혹시 캠프가 폐쇄된 거 아냐?’
사도와 그 부하들을 소수정예로 훈련시키는 시스템이라면 필요할 때만 잠깐 모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긴장도 풀렸는데, 계곡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이건…. 기문진이다!’
깜짝 놀란 기수는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기가 디뎠던 자리를 기억해서 뒷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보니 주변 경관이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미묘한 각도로 변하고 있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기수는 난감함을 느꼈다.
‘아! 중요한 장소라면 기문진으로 숨겨 놓는 게 당연하지.’
문제는, 초열의 기억에 기문진 여는 법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멸천제를 따라 들어갔다가, 그를 따라 나온 기억 뿐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이제 와서 천마교 군영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기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초열이 멸천제 뒤를 따라다녔다고 해도 어쨌거나 발을 디딘 기억은 있으니까 그걸 자세히 되짚어 내서 그대로 따라가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1시간 넘는 노력은 무위도 돌아가 버렸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기문진을 푼 기억이 없는 이상, 남을 따라간 기억만으로 기문진을 돌파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기수는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을 떠 마시고, 싸온 건량을 씹으면서 계곡 주변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하고 기문진은 진짜 악연이구나. 악연.’
그래도 옛날에 비해 지식이 좀 있다 보니 대략적으로 기문진의 구동 형태가 눈에 들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막히니까 결국 못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건량을 다 먹는 동안 관찰을 통해 알게 된 것은 협곡의 기문진이 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위적인 기운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기운과 흡사했다.
그런 기운을 만들어낸 목적은 기문진 내부의 기운을 감추기 위한 의도일 것이었다.
기수는 남은 건량을 싸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적의 기도를 감지하지 못한 것은 저 안에 정말로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기문진이 감춰줬기 때문일 수도 있는 거네.’
그렇다면 힘으로 뚫고 들어가기도 조심스러웠다.
모처럼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기문진에 가로막히고 보니 허탈했다.
기수는 협곡 양쪽의 절벽을 살펴보았다.
‘저쪽을 통해서는 침투가 가능하지 않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자신의 경공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리고 일단 그 위로 올라가면 협곡 내부 상황을 내려다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두드리면 열리고, 구하면 얻는다니까. 후후…’
기수는 암벽등반에 도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그때.
협곡 한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기수는 급히 몸을 숨기고 소리 난 곳을 봤는데, 아무 것도 없던 덤불 사이에서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