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51
아투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혈관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의식을 놔버리면 한없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소모해가면서 구해주려고 애쓰는 기수를 생각하면 차마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기경팔맥에 퍼져 있던 암경이 빨려 나가고 있었다.
자석을 모래 속에 휘저으면 쇳가루만 붙어서 빠져나가듯이, 기수의 뜨거운 진기가 고통스런 암경들을 쏙쏙 뽑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투사는 너무나도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일 각도 지나지 않아 몸 전체가 날아갈 듯 가벼워졌고, 기수의 손이 명문혈에서 떨어졌다. 끔찍한 암경이 모두 빠져나간 것이다.
“고, 고마워요…”
그때 신음이 들리며 기수가 벌러덩 뒤로 누웠다.
아투사는 깜짝 놀랐다.
“양소협! 정신 차려요!”
그녀는 자기가 고통에서 해방된 것만 기뻐했지, 그걸 고스란히 뽑아 간 기수가 얼마나 괴로울까에 대해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급히 기수를 부축해 안으며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애썼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 올려주고 대신 쓰러진 이 남자에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쳐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기수는 신음을 토하며 눈을 뜨지 못했다.
그가 뒤로 쓰러진 것은 사범과 싸우면서 탈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다.
자칫하면 사도도 아닌 자에게 목숨을 잃을 뻔 한 것이다. 지금이 가장 인원이 적은 때라는 사실을 알고 완전치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한 탓이었다.
아투사에게서 뽑아낸 단정홍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자기가 만들어낸 단정홍과 같았기 때문에 몸에 들어오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여서 얼마 되지 않지만 자신의 진기로 만들어버렸다.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뜰 수 없었다.
미녀가 자기를 안고 오바하고 있는데 어떻게 실망시킬 수 있겠는가.
아투사는 기수를 살려보겠다고 손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내공엔 차이가 있지만 일종의 추궁과혈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아! 시원하다.’
안마 받는 기분이라서 더 더욱 눈을 뜨기 싫었다.
그러나 문제가 한 가지 발생했다.
주인도 가만히 있는데 존슨이 자꾸 반응을 보이려고 했다.
‘아! 놔…. 눈치 없는 놈 같으니라고.’
기수는 대충 정신을 차리는 척 하면서 일어섰다.
아투사가 반색을 하며 손등으로 양쪽 눈가를 훔쳤다.
“아! 깨어나셨군요. 어떠세요? 기경팔맥이 마비되진 않았나요?”
기수는 그녀가 참 정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아투사 입장에서 기수는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사나이라 신뢰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그러나 부모님을 잃고 세상에 오로지 자기 혼자만 사명을 짊어진 채 남겨진 그녀 입장에선, 몸을 던져 대신 칼을 맞아주고, 위험한 암경을 자신의 몸으로 옮기기까지 해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함빡 기울었다.
기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고통스럽긴 했지만 내 심후한 내공으로 녹여버렸으니까.”
“아아!… 괴, 굉장해요.”
“내가 좀….”
“아! 잠시만요.”
그녀는 자신의 풀린 장비 안에서 약통을 꺼내 와서 기수의 칼에 베인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기수는 치료에 정성을 다하는 그녀를 힐끔거렸다.
‘집중한 모습도 예쁘네. 하아! 참….’
치료가 끝나자 기수는 사범의 옆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의외로 무거운 편이었다.
“사명완수를 축하해.”
아투사는 감회어린 표정으로 그 칼을 받아들었다.
다시금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오려고했다.
그녀는 꾹 참고 기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양소협 없이 저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지금쯤 부모님의 뒤를 따랐을 것이었다.
기수는 가볍게 미소 지은 후 말했다.
“자! 이제 좀 뒤져볼까? 나도 뭔가 건지는 게 있어야지.”
기수는 촉옥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기문진으로 방어되고 있는 곳이니까 특별히 비밀유지에 신경 쓰지는 않았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침상이 하나뿐이라 사범이 묵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초옥에서 과연 책상에 놓인 장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수는 맨 위의 것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곧 실망감이 번졌다.
“뭐야… 설마….”
기수는 두 번째, 세 번째 장부들을 차례로 살펴보다가 그것들을 집어던졌다.
차분한 필체로 꼼꼼하게 적힌 내용들은 쌀이나 야채, 고기의 구입 수량과 가격이었다. 먹고사는 데 쓴 지출 내역을 적은, 일종의 가계부였다.
“다른 게 있을 거야.”
기수는 무슨 비밀공간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벽과 바닥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침상도 뒤집어 보았다.
그러나 그 장부들 말고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투사가 들어오며 말했다.
“옷가지와 식기, 병장기 말고는 없어요.”
“여기도 마찬가지야. 식량 사 온 내역을 적은 장부뿐이야. 결국 여기 들어와서 적에게 경계심만 높였을 뿐, 알게된 건 아무 것도 없네.”
입맛이 썼다.
그나마 주군이란 자의 얼굴을 본 것이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놈은 어디 있을까? 생긴 걸 보면 한 자리 하게 생겼던데…’
야망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아투사가 장부를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걸 보면 적어도 여기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는 알겠네요. 쌀을 사온 양과 기간을 비교해보면 되니까.”
기수는 그녀가 머리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 말대로 쌀 항목만 찾아서 날짜와 비교해 보니까 뭔가 이상했다.
시작도 한참 오래전부터 했거니와 소비량이 상당히 많았다.
‘189명이 이걸 다 먹었다고?’
기수는 사범이 자기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 뭐지? 혹시…. 아!’
기수는 자기가 사범에게 ‘네 제자가 몇 명이야?’라고 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사범이 기른 189명 외에 이곳 캠프 출신이 훨씬 많을 수도 있는 것이다.
기분이 좀 더 나빠졌다.
아투사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응? 아, 아냐…”
“혹시 이 쌀을 먹은 자들이 전부 당신의 적인가요?”
기수는 쩝! 소리를 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었다.
아투사는 장부와 기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검지로 짚어가며 수를 세기 시작했다.
기수는 장부를 빼앗았다.
“됐어. 숫자를 세는 건 무의미해.”
“하지만 적의 규모를 미리 알아둬야죠.”
“장부가 이게 단지, 아니면 더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
아투사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곰팡이를 보면 초옥을 지은지 상당히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장부만으로 알아낼 일이 아닌 것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기수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100명이 덤비면 100명을 죽이고, 1,000명이 덤비면 1,000명을 죽이면 그뿐이지.”
아투사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기수의 자신감에 자신도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기수의 속마음은 달랐다.
‘내 적은 4명뿐이야. 거기에만 집중하면 돼.’
녹림72채, 수로맹, 삼황맹의 그 수많은 떼거지들과도 싸웠지만 결국 죽일 놈은 정해져 있었다. 한 놈씩만 잡아가면 되는 것이다.
기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네. 마침 이슬 피할 지붕도 있고 식량도 있으니까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야겠군.”
“제가 밥을 지을게요.”
아투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청해서 주방으로 갔다.
쌀은 넉넉했지만 반찬은 별 게 없었다.
앞서 협곡을 나섰던 두 사람은 부식을 사러 간 것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협곡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탁자를 놓고 밥을 먹었다.
좌우 암벽 때문에 날도 빨리 어두워졌고 하늘의 달과 별도 일부만 보여서 분위기가 묘하게 아늑했고 모닥불에 비친 아투사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다.
마치 연인과 캠핑이라도 나온 것처럼 밥을 다 먹고 나니까 피곤이 몰려왔다.
진기 소모도 심하고 피도 많이 흘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아투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고맙긴 뭘… 내가 살자고 싸운 건데.”
“그래도요.”
“피곤할 텐데 먼저 눈 좀 붙여.”
“양소협은요?”
“혹시 적이 올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지키고 있을 거야.”
“상처가 심하고 피도 많이 흘려서 힘드실 텐데…”
“고수는 이 정도쯤 아무 것도 아냐. 운기조식 한 번만 하면 돼.”
“그러면 조금 있다가 교대해요.”
“그렇게 하지.”
아투사는 초옥에 걸려 있던 옷을 찢어 되찾은 킬리지를 잘 닦고 둘러 감은 후 침상에 올라가 정좌하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기수도 차분한 호흡으로 진기흐름을 조절했다.
정식 운기조식은 아니지만 기혈 흐름이 순조로워지면서 기운이 났다.
아투사는 초옥 안에서, 기수는 밖에서 각각 한참을 그렇게 보낸 후 그녀가 나왔다.
“이젠 교대해요. 들어가서 좀 주무세요.”
“아니. 됐어. 여기서 밤을 새도 괜찮을 것 같아. 아투사나 눈 좀 붙여.”
“전 괜찮아요.”
그러더니 기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아투사였다.
“이걸로 끝인가요?”
“뭐가?”
“이곳을 치기 위해 힘을 합쳤잖아요.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기수는 그녀의 심정을 염정구심술 없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찾아야 할 물건이 하나 더 있다고 했던가?”
“예. 카드라는 작은 단검이에요.”
“그럼 그걸 찾을 때까지만 협력관계를 유지하기로 해볼까?”
“저, 정말요?”
아투사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킬리지를 찾은 것은 전적으로 기수 덕분이었다.
카드도 자기 혼자 힘으로 찾는 것은 어려울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기수가 도와준다면, 부모님의 염원이자 자기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루어야만 하는 사명을 달성할 확률이 크게 높아지는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저도 양소협을 최대한 도울게요.”
기수는 그녀에게서 도움 받고 싶은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만난 지 하루 만에 적 진영 한가운데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적을 기다리면서 하기엔 좀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도움이었다.
기수는 자꾸만 머리를 드는 욕망을 잊기 위해 아투사에게 질문을 했다.
“그 카드라는 단검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
“아뇨. 아직은 몰라요.”
“어! 그럼 좀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아투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거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단검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닐 정도의 시간 여유는 없어.”
“아!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찾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어떻게?”
아투사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다.
기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불편하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독심술 같은 건 쓰지 않을 테니까. 빠르게 찾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로 족해.”
아투사가 결심한 듯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사실, 제겐 이게 있어요.”
“와!….”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비단주머니에 들어 있던 것은 커다란 타원형 에메랄드였다.
“엄청나군. 이렇게 큰 건 처음 보네.”
팔면 얼마나 할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아투사는 기수의 표정변화를 살폈다.
사실, 정체가 불분명한 남자에게 함부로 보여줄 보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수는 자기 목숨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보물을 찾을 때까지 협조를 약속한 상태. 그리고 독심술 때문에 어차피 숨길 수도 없다고 판단해서 공개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다행히 기수의 얼굴에 탐욕의 표정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건 사만조의 세 가지 보물 중 첫 번째를 차지하는 왕관의 보석이에요. 킬리지에 박힌 홍옥, 카드에 박힌 황옥과 상호 감응하죠.”
“감응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자석처럼? 이건 돌인데?”
“그게 아니라 주술이 걸려 있어서 정해진 배열을 하고 주문을 외우면 현재 킬리지 혹은 카드가 있는 방향을 가리켜요.”
“주문이라…”
현대 과학을 공부한 기수 입장에선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 머나먼 페르시아에서 중국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