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52
기수가 에메랄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내가 한 번 만져 봐도 될까?”
아투사는 망설였다. 그러나 일단 꺼내서 보여준 이상 각오한 일이었다.
“예. 떨어트리지만 마세요.”
기수는 에메랄드를 집어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모닥불에 비춰 보니 영롱한 빛이 더욱 아름다웠다.
그러나 의외로 그게 돈이라는 느낌은 잘 들지 않았다.
애당초 화폐 개념이 다른 시대와 공간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람 눈을 즐겁게 해주는 반짝이는 돌이 돈과 바뀌는 게 이상하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 원 내라면 사겠다.’
2만원이라면 좀 망설일 것 같았다.
“꽤 아름답군. 그런데 칼 두 자루는 빼앗아갔다면서 이건 왜 놔둔 거지?”
“그건 모르겠어요.”
기수는 그 삼태성이란 사람들이 자기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칼과 단검은 단단한 철로 만들었다면 실용적이고 쓸모가 있지만 왕관의 보석은 그저 반짝이는 돌에 불과한 것이다.
“이걸로 어떻게 단검을 찾는다는 거지?”
기수가 스스럼없이 에메랄드를 돌려주자 아투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칼로 땅바닥에 선을 여러 개 긋더니 그 한가운데 에메랄드를 놓고 뭔가 주문을 한참 외웠다.
그러자 에메랄드 한쪽 귀퉁이가 빛을 냈다.
“와! 신기하네…”
기수는 에메랄드 안에 LED라도 감춰 놓은 줄 알았다.
다만, 빛이 너무 약하고 은은해서 겨우 알아볼 정도에 불과하긴 했다.
아투사가 보석을 챙긴 후 북동쪽을 가리켰다.
“카드는 저쪽에 있어요.”
“흐음… 이런 방식인가? 그럼 일단 저쪽으로 가다가 한참 지나서 또 한 번 확인해 보면 다른 방향일 수도 있겠네?”
“예. 지도에 직선을 그으며 따라가다 보면 점점 범위가 좁아져요.”
“좋아! 이런 식이라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군.”
기수는 그녀와 협력하기로 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녀 미모에 더 관심이 간 게 사실이었다.
미녀와 헤어지기 싫어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일정부분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것은 어쩌면 자기가 매달려야 할 일이었다.
킬리지와 카드가 원래 한 쌍이었다면, 지금 카드라는 단검을 가진 사람 역시 주군이란 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협곡 안을 뒤져도 소득이 없고, 사범이란 자의 기억을 스캔해도 알아낸 게 없는 지금. 왕관의 에메랄드가 단검의 위치를 찾아준다는 것은 기수 입장에서도 놓칠 수 없는 최고의 기회였다.
아투사가 자기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침 그녀도 기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도 기수를 마지막 사명을 완수에 꼭 필요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기수는 슬쩍 미소 지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뇨….”
“그럼 나한테 반했어?”
아투사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경계심이 고마움을 거쳐 호감으로 바뀐 것은 이미 아까 전부터였다.
이제 보석에 대해 털어놓고 나니까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친밀도가 더욱 상승했다.
그동안 혼자 외롭게, 정말 외롭게 사명 완수를 위해 고군분투 했는데, 이 남자가 함께 해준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고마웠다.
그러나 차마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어서 기수의 농담 섞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만 돌린 것이다.
기수는 아니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은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만하면 슬슬 진도를 나가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처음 읽었을 때, 가족 아닌 남자와 말하면 안 된다고 버티던 게 생각났다.
“이봐 아투사. 조로아스터교는 뭐야? 불을 섬기는 건가?”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밝음은 좋은 거고 어둠은 나쁜 거니까 없애야 한다는…”
“남의 종교 말하듯 하고 있군.”
“남의 종교니까요?”
“으잉? 페르시아 출신 아니었어?”
“우리의 종교는 하나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예요.”
“기독교?”
“그건 뭐죠? 우리는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믿고 따르는데…”
“무함마드?”
“예. 시아파에요.”
“이슬람교?”
“맞아요.”
“아!… 그랬구나.”
옛날에 미국과 맞장 뜬 것도 그쪽 종교라서 그랬던 거고, 이웃한 나라들도 전부 다 이슬람교였던 것 같았다.
‘이슬람교는 여자를 꼭꼭 숨겨놓는데…’
눈만 내놓고 온몸을 다 가리는 옷을 입히는 건 알고 있었다. 어떤 나라는 운전도 못하게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런 종교를 믿는다면 외간 남자와 얼굴을 드러낸 채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혹시, 남자와 말을 했으니까 그 남자한테 시집가야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없어요. 게다가 여긴 중원이잖아요.”
의외로 담담한 대답이었다.
기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가족이나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거나 얘기를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천국에 못 가죠.”
“그게 다야?”
아투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중요한 거죠.”
“하지만 살인을 한 시점에 이미 거긴 못 가는 거 아닌가?”
“아사신파의 사명은 지하드에요. 신을 위한 살인은 정당해요.”
“지하드라…..성전이란 말이지…”
자살폭탄 테러 기사에서 얼핏 본 거 같은 단어였다.
‘그래. 과격파 이슬람 언급될 때마다 시아파란 말도 들은 것 같아.’
페르시아 시절부터 그 전통이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고의 칸을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시아파 회교도 어새신의 전통이 현대에 미국과 싸우면서까지 이어지다니…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이제까지 보고 들은 바를 종합해보자면. 아투사로 하여금 죽음까지 무릅쓰게 만드는 동력은 바로 먼저 죽은 부모를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천국이 있고 없고와는 별개로 그녀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렇다면 가족도 아니고 남편도 아닌 자기가 그녀와 러브러브 모드가 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일로 천국 갈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투사가 아무리 예뻐도 강제로 취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자존심 문제였다.
처음 강호에 출도하고 염정구심술을 연습할 때는 재미로 비슷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지만,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 또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잘못이 있었다면 반성을 하고 두 번 다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기수는 슬그머니 아투사의 콧날과 턱선, 목선을 감상하며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안지 않더라도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을 해줄 거니까…’
카드란 단검을 찾는 그날까지 고문의 연속이 될 것 같았다.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참을 수 있어!’
정신적으로 그 정도의 자제력은 갖추고 있었다.
특히 회음혈에서 존슨으로 가는 혈류를 의지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미모의 여인이 알몸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다 해도 무념무상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기수는 결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 아투사에게 말했다.
“아투사. 네가 천국에 가도록 도와줄게.”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 오해하지 마. 그 천국이 아니고 그 천국이니까.”
“예?”
“그, 그러니까 이슬람의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아! 예…. 고마워요.”
아투사는 왠지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만으로 밤을 보낸 두 사람은 날이 밝자 협곡을 나왔다.
아투사는 복면 대신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수는 첫 번째 만난 마을에서 그녀가 남장할 옷과 죽립 등을 사주었다.
“동행이 있으니까 좋네요.”
혼자가 된 이후 인적 없는 곳으로만 골라 다녔는데,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사먹게 되었으니 좋아할 만도 했다.
단검을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왕관의 보석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길이 직선이 아니라 산과 강에 막힐 때마다 꼬불꼬불 돌아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네비게이션은 커녕 지도를 개인이 가지는 것조차 군사적 의미에서 불법으로 취급되는 시대이다 보니 아투사가 가진 꼬깃꼬깃한 소형지도 한 장에 의지하는 여정이 효율적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방향을 찾는 주문도 하루에 한 번만 되기 때문에 자칫 방향을 잘못 잡으면 되돌아오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이들을 공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수는 그녀와 함께 가는 여정이 마냥 즐거웠다.
아투사도 비슷한 심정인 것 같았다.
저녁이 되면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투사가 남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방을 두 개 빌리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한 방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기수는 그녀에게 침상을 양보하고 바닥에 정좌하고 앉아 운기조식으로 밤을 샜다.
견물생심이 될까봐 꼭 벽을 보고 앉았다.
다행히 욕정을 누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단 운기조식 상태에 들어가면 몸 상태를 회복시키는데 집중하느라 전혀 잡념이 일지 않았다.
아투사가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을 듣고 눈을 뜨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아투사가 말했다.
“양소협은 수양이 대단히 깊으신 것 같아요.”
“하하!.. 왜 그렇게 생각해?”
“이제까지 여러 밤을 한 방에서 지냈는데…”
“내가 침상에 올라가길 바라?”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걱정 마.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기수는 장담했다.
아투사는 가볍게 미소 지었지만 왠지 섭섭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석이 비추는 길을 따라간 두 사람은 닷새 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제국의 중심에 숨어 있는 건가?’
과연 사도의 우두머리가 웅크리고 있을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투사는 북경성의 거대한 규모에 놀랐다.
“여긴 처음 와보는데… 정말 넓네요.”
“3일만 투자하면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왜 3일이죠?”
“이제까지와 달리 성 안의 길들은 반듯하게 나 있으니까 형태를 잡기 쉬워. 성의 동문, 남문, 서문에서 각각 보석으로 방향을 찾아서 직선을 그으면 세 선이 한 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거든.”
“그렇게 되겠네요.”
아투사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이제 자신의 사명 완수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기수가 말했다.
“마음껏 즐겨보자고.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생애 마지막 3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떤 적을 만날지 모르잖아. 몇 명이나 될지도 모르고.”
기수는 이곳에 오는 5일 동안 잡념 없는 운공요상을 통해 예전 컨디션을 거의 회복했다. 그러나 멸천제 수준의 사도를 만난다면, 그리고 그 주변에 청탑산에서 키운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다면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두려움이 느껴지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서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아투사 역시 적이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요. 마음껏 즐겨 봐요.”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북경 성 안의 명소를 빠짐없이 찾아다녔고, 유명한 객잔에서 매 끼니를 해결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종교적 이유 때문이라며 그녀가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작이 없으니 흥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수는 유명한 술들은 좀 마셔줬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밤에는 선 하나를 그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명소 순방이 이어졌다.
제국의 중심이다 보니 이름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정말 생의 마지막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곳들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하루.
마치 아투사와 데이트, 어쩌면 신혼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기수를 바라보는 아투사의 눈빛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저녁 무렵. 두 사람은 저자를 거닐었다.
아투사는 양고기 꼬치를, 기수는 월병을 사서 각각 손에 들었다.
사람 많은 시장 거리를 군것질 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기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투사는 중원에서 태어난 거지?”
“맞아요.”
“그럼 이때까지 어디서 뭐 하면서 살았어?”
그녀의 이국적인 미모라면 주목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았다.
“기예단에 소속되어서 떠돌았어요. 부모님과 함께.”
“아! 그거라면 천하를 종횡하면서 칼을 찾으러 다니기 편했겠네.”
“예. 매일 무공을 연마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았고요.”
인종이 다른 부분도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 같았다.
“기예단에서는 뭘 했는데?”
“그냥 여러 가지요.”
“그래도 특기가 있었을 거 아냐? 얘기해 봐.”
“주로 칼을 다뤘어요.”
기수는 그녀가 쌍칼 다루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무슨 기예를 선보였건 구경꾼들에게서 탄성을 이끌어내기는 충분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당시 얘기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기수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시장구경을 실컷 하고 새 객잔에 묵은 두 사람은 왕관을 보석을 꺼냈다.
주문을 외우고 에메랄드가 빛을 발하자 두 번째 직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다.
종이에 대략적으로 그린 지도에 마침내 교차점이 생겼다.
기수는 그 지점을 보고 놀랐다.
“여기는….”
그곳은 황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