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56
기수는 경양궁(景陽宮)이라는 현판을 확인했다.
큰 건물들이 경양궁 앞뒤로도 쭉 서있는 모습에서 황궁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수가 아투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한 번 더 방향을 확인해보자.”
건물까지는 왔지만 다 뒤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방향이라도 잡으면 나머지 각도는 다 제외해도 되니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투사는 한참 꼼지락 거리다가 북서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그녀가 가리킨 방향엔 다행히 불 켜진 방이 없었다.
“좋아. 하나씩 뒤져보는 거야.”
두 사람은 지붕 하나를 건너뛴 후 조심스럽게 처마 아래로 내려가 들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점이 고무적이었고, 내부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데다가 칸이 나누어진 선반에 온통 비단이며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처음 들어온 게 창고라니… 아! 난 왜 이렇게 운이 좋지?’
그러나 그것은 곧 혼자만의 착각임이 드러났다.
일단 창고 안에 멸절강기 막을 펼쳐 소란을 피워도 되는 상황으로 만든 뒤 압수 수색 영장 발부 받은 경찰처럼 다 뒤집어엎으며 찾기 시작했는데, 양이 너무 많았다.
비단은 패스하고 상자들만 뒤지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아투사. 단검의 길이가 어느 정도라고?”
“이만큼이요.”
아투사가 양손을 벌려 대략적인 길이를 보여주자 기수는 그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상자만 열어보았다.
“아!… 이건 뭐야. 단검이 아니라 금이잖아.”
기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주머니에 넣으면서 다음 상자를 열었다.
“이건 전부 보석이네.”
역시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선반을 다 뒤진 두 사람은 탈진하다시피 했다.
이 안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거의 2시간은 소모한 것 같았다.
아투사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막연하게 뒤질 바엔 차라리 사람이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동감이야. 그런데 여긴 누가 사는 건물이기에 이렇게 보석과 금은이 많은 거지?”
“황족이겠죠.”
기수는 흠칫했다.
‘혹시 공주의 거처는 아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기수는 문가로 가서 밖을 살핀 후 아투사에게 말했다.
“다음 건물로 가자. 어쨌거나 여기를 다 치우지는 못할 테니까 내일 아침엔 발각될 거야. 오늘밤 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지. 하나라도 더 뒤지자고.”
“알았어요.”
왕관의 보석이 하루에 한 번만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사각형 하나, 직선 하나.
그 정도 기준을 잡았으면 금방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궁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아직도 확인해야 할 공간이 너무 넓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들어온 들창을 통해 나간 후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순찰병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다음 지붕으로 건너뛰었다.
그 때 바닥에 툭!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기수는 당황했다.
누군가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파공음과 함께 두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수는 순간 강력한 고수의 기도를 느꼈다.
‘이것들이 기척을 숨기고 있었구나.’
더욱 놀라운 점은 그들이 금군이 아니라 궁녀 차림의 여인들이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바닥에 떨어져 소음을 낸 물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깨진 녹옥.
두 궁녀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지?”
두 여인은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다.
기수는 황급히 상체를 숙여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젠장! 너무 많이 챙겼나?’
원래 돈을 밝히는 성향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황궁. 그 안에 쌓인 보물을 보니까 왠지 모르게 ‘긁어모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왕창 축내자’는 쪽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사고를 친 것이다.
아투사가 손짓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강기 막으로 소리를 차단하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진 한 가운데 들어와서, 저들이 언제 뒤질지 모르는 옥상 위에 자리 잡았는데 내부와 외부를 격리시킬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강기 막을 의심할 것이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게 분명한데 안에서 바깥 상황도 모른 채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두 궁녀는 서로 눈짓으로 신호를 하더니 허리띠를 풀었다.
그것은 풀리자마자 팅! 소리를 내며 연검으로 변했다.
기수는 그녀들이 지붕 위를 조사하러 올라올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선공을 했다.
민첩하게 몸을 날리며 잔백지를 날려 둘을 동시에 제압한 것이다.
두 궁녀가 금군보다 훨씬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라고 해도, 기수는 그녀들보다 적어도 두세 단계 이상은 고수였다.
더구나 기습까지 했는데 그녀들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쓰러진 그녀들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추려고 하는데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다른 궁녀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젠장!”
기수는 그녀들 모두를 잔백지로 제압하려고 했다.
슈슉!… 슈슈슉!…
앞의 두 명은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는 시간이 좀 더 걸렸고, 네 번째 궁녀는 두 초식이나 받아냈다.
그러는 사이 그 뒤쪽의 궁녀들 중 누군가가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에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나가보아라!”
여인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을 뿐만 아니라 멀리에서 갑주로 무장한 사람들이 뛰어오는 철걱철걱 소리도 들렸다.
기수는 조용히 처리하기는 다 틀렸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도망치자!”
포위망이 갖춰지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아투사도 두 말 없이 몸을 날려 기수를 따랐다.
그러나 나렵한 파공음과 함께 궁녀들이 몸을 날려 앞을 막았다.
“게 섯거라!”
“웬 놈들이냐!”
기수는 그녀들의 향해 잔백지를 날렸다.
그러나 이미 눈에 익어서인지 두세 초식, 서너 초식까지 받아냈다.
기수는 그녀들이 보통 궁녀가 아님을 확신했다.
‘청탑산 출신이 분명해.’
아투사 수준에 필적하는 궁녀들이 계속해서 지붕 위로 올라오자 기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자기 혼자라면 싸우건 도망치건 자유롭게 선택해도 되지만 아투사의 안전까지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수는 열 손가락 끝에 파천강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뒤에 바짝 붙은 아투사에게 말했다.
“돌파한다. 준비해!”
기수의 손가락에서 발출된 파천강기는 가로막는 궁녀들의 다리를 꿰뚫었다.
“아악!….”
“크아악!…..”
피가 튀면서 궁녀들이 굴러 떨어졌고, 기수와 아투사는 그 한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그런 식으로 지붕 두 개를 넘어가자 더 이상 궁녀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금군이 고함을 지르며 간격을 좁혀왔다.
“저쪽이다!”
“놓쳐선 안 된다!”
화살이 날고, 몇몇 장교인 듯한 자들이 지붕 위로 올라오는 것도 보였다.
기수는 금군의 움직임과 장교들의 추격 속도를 면밀히 관찰한 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투사의 스피드가 그들보다 확실히 빨랐기 때문이다.
추격자들과의 간격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졌다.
‘됐어. 이 정도면 빠져나갈 수 있어.’
일단 탈출에 성공하면 단검 찾기는 나중에 다시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쉬는 기간에 뭔가 즐거운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상상의 나래를 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예리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기수는 깜짝 놀라 아투사를 잡아당겼다.
피하고 보니 날아온 물체는 돌멩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던진 사람이 곧바로 주먹을 날려왔다.
기수는 황급히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엄청난 고수!’
기수는 바짝 긴장했다.
돌멩이의 날아오는 속도도 무시무시했지만,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대의 경공술이 입신의 경지에 달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주먹에 실린 경력이 엄청났다.
닿는 순간 팔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이런 고수가 있었다니! 도대체 누구….’
일 합을 겨룬 후 곧바로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으윽!…..”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상대는 바로 공주 주예림이었다.
“용서할 수 없다. 감히 황궁의 담을 넘다니!”
기수는 그녀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아! 맞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짓쳐들어오는 공주의 공격은 좀 심각했다.
‘헤어질 당시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파워가 장난이 아니었다.
팔이 저리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기혈이 격탕하고 있었다.
헤어진 뒤에 혼자 영약을 꾸역꾸역 먹은 것인지, 내공이 자신을 압도했다.
‘말도 안 돼! 내가 밀리다니…..’
기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막상 반격을 하려고 보니까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주예림을 상대로 단정홍이나 파천강기를 쓸 수는 없었다.
분광권도 어쩌면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다.
순간, 퍽! 소리가 나면서 정신이 아뜩해졌다.
한 방 제대로 맞은 것이다.
“으으…..!”
기수의 몸은 뒤로 날아가 지붕의 처마장식에 부딪혔다.
쾅! 와르르….
지붕 구조물이 부서지면서 무너져 내렸다.
“양소협!”
깜짝 놀란 아투사는 공주에게 암기를 던진 후 황급히 달려와 기수를 들쳐 업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주는 아투사의 암기를 간단히 피한 후 냉소를 지었다.
“흥!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몸을 날린 그녀는 아투사의 앞을 막아섰다.
아투사는 다급한 신음과 함께 절망감을 느꼈다.
아무리 기수를 업고 있다고 해도 경공 능력에서 차이가 너무 났다.
자신보다 까마득한 고수.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이다.
“아! 양소협…”
자기는 그렇다고 쳐도, 기수는 괜히 끌어들여서 함께 나락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니까 미안한 마음이 한없이 몰려왔다.
그때 기수가 말했다.
“내려 줘.”
“괜찮으세요?”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 있어.”
기수는 공주와 마주 섰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은근히 화도 났다.
강적을 앞에 두고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불필요하게 망설인 것은 분명 자기 잘못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감히 나를 쳐?’
남녀를 떠나 전사로서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주예림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몸이 제법 단단하구나. 한 번 더 덤벼보겠느냐?”
기수는 대답 대신 두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주예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수의 내력 집중에 놀란 것이다.
기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솔직히 여자를 이겨서 뭐 하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기혈이 격탕하고 피를 토한 것에 대한 보답은 해줘야 했다.
죽이거나 내상을 입히는 정도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힘의 우위를 확실히 각인시킨 후에 엉덩이를 한 대 때려줄 작정이었다.
기수가 진심으로 무공을 펼치자 주예림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했다.
난해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한, 어느 유파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초식들이 정신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펼쳐졌고, 팔에 실린 힘도 장난이 아니었다.
한 걸음 뒤로 밀린 주예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한 순간.
“타핫!”
그녀가 기합을 내지르며 정신을 집중하자 황금빛 광채가 번뜩이며 정권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찔러 들어왔다.
기수는 깜짝 놀라 팔을 들어 막았다.
쿵! 하는 격렬한 충격과 함께 기수는 뒤로 날아갔다.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것이다.
“이건 또 뭐야!”
욕이 나오려고 했다.
전에 함께 연공하던 시절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수법이었다.
기수는 지붕 기와들을 수백 장 연달아 깨트리며 물러서다가 겨우 신형을 바로 세웠다. 공격을 막았던 팔은 욱씬거렸고 호흡은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주예림이 바닥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이제 보니 도둑놈이었구나.”
기수가 밀려나간 자리엔 금은 조각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주머니 하나가 터진 것이다.
기수는 공주의 무공에 놀라서 금은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공주가 미소 지으며 검지를 까닥거렸다.
“맷집이 마음에 드는데, 다시 싸워보자구나.”
“오냐. 좋다!”
기수는 그녀를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