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57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기수는 정신적으로도 바짝 긴장했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공주의 볼기를 때려주기 전에 자기가 먼저 맞아죽을 판이었다.
일단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주예림은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이것저것 사정 봐주면서 싸우면 필패.
황금빛이 번뜩이는 타격법만 해도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기수는 새로 배운 파동식 격산타우 타법을 쓰기로 했다.
그녀와 헤어진 뒤에 익힌 거니까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본 것이다.
장과 장이 격돌하는 순간,
공주의 팔은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까지가 마치 물결처럼 출렁였다.
“으으!….”
주예림이 처음으로 신음을 토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수는 타법이 제대로 먹혔다는 사실에 득의양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어깨까지 밀려 올라갔던 물결이 마치 벽에 튕긴 공처럼 반사되어 되돌아 왔다. 더구나 속도는 훨씬 더 빨랐다.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기수는 뒤로 날아갔다.
“크으윽!…..”
아투사가 황급히 달려와 부축했다.
“괘, 괜찮으세요?”
“우욱!….”
이번엔 장난이 아니었다. 뼈마디가 전부 비명을 질러댔고, 기혈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기수는 콧등을 가리던 두건을 내리고 지붕 바닥에 피를 토했다.
“씨발!…. 세 번이나 다운 당하다니….”
한 라운드에 3번 다운 당하면 KO패가 되는 WBC 룰이 적용되었다면 공주에게 진 거다. 어이가 없었다.
그때 좌우에서 기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군들 중 무공이 뛰어난 장교들이 몰려온 것이다.
“여기 있었구나!”
“꼼짝마라!”
기수는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공주의 일격. 그것도 자신의 파동타격을 되치기 한 크로스카운터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큰일이다!’
금군 따위에게 잡힐 생각을 하니까 정신이 아뜩했다.
자기는 물론이고 아투사까지 1+1로 묶음 체포되는 끔찍한 상황!
그때 주예림이 손을 내저었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 있어라.”
금군 장교들은 공주를 알아보고 즉시 군례를 올렸다.
“마마! 어이하여 나와 계십니까?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주예림은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지켜주겠다는 것이냐? 뭐, 하긴… 그게 너희들의 임무이기는 하지…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하명하십시오.”
“이제까지 너희들이 본 일은 모두 잊어라.”
“무,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 이 지붕 위에선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다.”
금군 장교들은 공주가 이 시간에 왜 여기에 나와 있는지, 어째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침입자와 대치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예림은 답답했다.
“너희들. 감히 내 명을 거역할 셈이냐?”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금군 장교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게 아니라… 저 자는 흉악한 도적입니다. 게다가 무공의 고수입니다. 저희들은 공주마마의 안전을 위해서…”
주예림은 바닥에 떨어진 기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걸 잘 봐라.”
금군 장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주예림은 그 기와를 손바닥으로 아기 토닥이듯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기와는 모래처럼 잘게 부서지며 흘러내렸다.
금군 장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들도 상당 수준 무공을 익힌 터라 방금 공주가 보여준 한 수가 얼마나 고명한 수법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깨부수는 거라면 자기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소리도 없이 가루로 만드는 것은 어마어마한 내공이 담긴 중수법이 분명했다.
그 외엔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들 앞에 서있는 공주는 사실 무서운 내가 고수였던 것이다.
주예림이 손을 턴 후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겠지?”
“그, 그렇습니다.”
“너희들은 황궁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다. 그런데 도적이 둘씩이나 들어와서 횡행하는데도 미리 막지 못했으니 그 죄가 결코 작지 않다.”
공주의 말에 장교들 모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침입자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미뤄두었던 책임 문제.
그것은 자기들의 목이 왔다 갔다 하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주예림은 장교들의 표정을 확인한 후 다시 말했다.
“지금 당장 지붕에서 내려가라.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변을 조용히 시켜라. 그러면 누구도 너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하, 하지만… 다친 궁녀들이 있습니다.”
“그들 입막음까지 나에게 시킬 작정이냐?”
장교들은 움찔했다. 그들 중 상급자로 보이는 한 명이 다시 물었다.
“허면, 마마… 저 두 도적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내가 처리할 것이다.”
처리란 말에서 장교들은 뭔가 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공주마마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금군 장교들이 모두 지붕에서 내려갔고, 병력 이동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주예림은 두 도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내공 흐름은 여전히 제멋대로였고, 호흡은 거칠었다.
옆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는 계집은 제법 날래긴 하지만 자기 적수는 아니었다.
공주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아투사가 황급히 암기를 던졌지만 주예림은 소매를 휘저어 그것들을 간단히 쳐냈다.
“헛수고야.”
절망감에 휩싸인 아투사는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기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울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기수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하지 마. 이건 내 일이야.”
단검을 찾기 위해 황궁에 들어온 건데 왜 자기 일이 아닌 그의 일이라고 하는지, 아투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앞에 선 주예림은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그녀는 예전에 기수가 달랑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달아난 상황에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분노가 살심으로 변해 추살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만나게 되면 자기 손으로 죽일 생각으로 황궁 비고의 서적들을 연구했다.
그래서 가장 효율이 좋은 배열로 영약들을 섭취했고, 운룡비결이라는 고대 죽간에 적힌 무공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그 묘의를 깨닫게 되었다.
운룡비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구름과 용이 서로 어울리듯 강유를 조절하며 상대에 맞춰 대응하는, 가히 궁극의 무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천하제일인이란 단어가 자신을 위해 있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오늘 엉뚱하게 도둑놈에게 그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손가락 하나로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여지없이 무너졌고, 세 번째 격돌에선 청-합-반이라는 궁극의 기법을 이용해서야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주예림은 그 도둑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냐?”
절대로 보통 도둑은 아닐 것이었다.
이 정도 고수가 황궁에 침입했다면 그 의도 역시 심히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정체와 의도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말은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두를 물러가게 한 것이다.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졌다. 솔직히 지금은 내공이 모이지 않아.”
“흥! 당연하지. 네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 해도 하늘이 보살핀 거다.”
물론 기수는 단전 3개를 따로 운용할 수 있기 때문에 100% 무기력한 것은 아니었다. 하단전은 엉망이지만 상단전과 중단전엔 그럭저럭 진기가 남아 있었다.
“일 각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그 정도면 회복될 것 같은데… 다시 싸우자. 응?”
주예림은 도둑의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왠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고개 좀 들어봐.”
“아, 놔…. 귀찮게…”
주예림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수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의 입장에선 공주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힘으로 이미 밀렸고, 기혈 흐름을 진정시킬 시간은 부족했다.
아투사도 있는데 그냥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설마… 진짜로 죽이기야 하겠어?’
그게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기수의 얼굴을 확인한 주예림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너….”
“오랜만이야.”
아투사는 두 사람이 구면인 것을 알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때.
공주의 발이 기수의 가슴을 퍽! 소리 나게 밟았다.
“으윽!…”
기수는 입에 고였던 피를 토하며 뒤로 자빠졌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공주는 한 번 더 밟았다.
분노와 증오가 담긴 일격이었다.
“죽어! 이 개자식아!”
기수는 속절없이 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투사는 깜짝 놀라 칼자루를 잡았지만 기수가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공주의 발길질에 내력이 담기지 않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기는 무지하게 아팠다.
“저, 저기… 쿨럭!… 이러지 말고 우리 대화로…”
“웃기지 마! 그렇게 매정하게 날 떠나더니 고작 도둑질을 하려고 돌아와?”
말하는 도중에 화가 나는지 발길질이 더 강해졌다.
“으윽!… 커억…. 도둑질 아냐! 절대 아니라고!…”
그러나 발에 차여 다른 주머니가 터지는 바람에 지붕 위에 홍옥, 청옥, 진주, 산호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에라! 이 도둑놈 새끼. 죽어! 죽어!”
계속 이어지는 발길질 연타.
어찌나 세게 차는지 기수 아래 기와들이 쩍쩍 갈라질 정도였다.
기수는 남은 진기를 목숨 보전에 모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태아처럼 오그린 자세를 잡았는데도 아픈 자리만 골라서 차는 공주가 야속했지만 그녀 심정이 이해도 되었다.
오죽하면 추살령까지 내렸을까.
한 100대쯤 차였을까. 공주가 발길질을 멈추고 검지로 아투사를 가리켰다.
“저 년은 또 누구야?”
“그, 그러니까… 쿨럭! 쿨럭! 전부 다 얘기를 해줄 테니까.”
“닥쳐! 이 도둑놈아!”
구타가 다시 시작되었다.
발로만은 만족할 수 없는지 주먹이 추가되었다.
“물어봐놓고 닥치라니. 으윽!… 아악!… 때린 데 또 때리… 아악!”
기수는 이렇게 맞다가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상대가 현현각주나 사도였다면 파천강기건, 단정홍이건, 수류의 태포련이건, 멸절강기건 최대한 사용해서 어떻게든 죽이려 했겠지만 애당초 살심을 일으키지 않았고, 거기다 그녀의 무공 증진이 상상을 벗어났기에 속절없이 당한 상태.
이제 와선 오로지 그녀 처분에 맡길 뿐이었다.
“지치지도 않냐? 제발 그만…”
“웃기지 마!”
괜히 한 마디 했다가 주먹질이 더 매워졌다.
기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난 황실에 감돌고 있는 모반의 기운을 조사하기 위해서 온 거야!”
“거짓말 하지 마!”
“정말이야! 믿어 줘.”
“네가 뭐라고 그런 일에 관심을 가져? 도적놈에 불과하잖아?”
“난 천하의 화평을 바라는 사람이야. 황실에 문제가 생기면 만민이 도탄에 빠지게 될 텐데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지. 그리고 나 도둑 아냐.”
그때 기수의 옷깃 사이로 금원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약간 누그러져서 얘기를 들어보려던 공주는 곧바로 다시 기수를 밟았다.
“도둑놈! 도둑놈!”
자기 마음을 훔쳐갔고, 잔인하게 버린 나쁜 도둑놈.
결국 기수가 마른 걸레처럼 늘어진 다음에야 공주는 발길질을 멈추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아투사에게 물었다.
“네가 대답해 봐. 뭘 훔치러 들어온 거야?”
아투사는 금군 장교들이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고 상대가 공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이제까지 봐 온 중 가장 고수인 기수를 개 패듯 한 무서운 실력자였다.
“제, 제발 용서해주세요. 양소협은 저를 위해서…”
“잠깐!”
공주는 손바닥을 내밀어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너. 저 남자하고 무슨 사이야?”
아투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공주의 표정과 말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이다.
“양소협과 저는….”
기수가 힘겹게 검지를 세워 좌우로 가로저었다.
아투사도 눈치가 있어서 진실을 전부 말하지 않았다.
“제가 물건 찾는 일을 양소협이 도와주셨어요.”
“아니. 그거 말고 둘의 관계를 묻는 거야.”
“양소협이 저에게 도움을 주는…”
주예림은 부아가 치밀었다.
“둘이 잤냐고!”
설마 그런 질문까지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답답하다 보니까 그냥 나와 버렸다.
아투사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것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인 공주의 두 눈에 불길이 번져 나갔다.
극도의 분노와 질투심.
두 주먹을 꽉 움켜 쥔 공주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기수는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