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58
기수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위를 봤다.
주예림이 발을 번쩍 들어 자신을 짓밟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지 상태를 유지했다.
‘왜 안 밟지? 내가 방심하기를 기다리는 건가?’
기수의 예상과 달리 공주는 발을 도로 내렸다.
‘아아!…. 드디어 나를 용서하는구나.’
몸이 집어던진 행주 꼴이 되었으니 더 때릴 데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공주의 화가 식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수가 아닌 아투사를 향해 말했다.
“너. 복면 벗어 봐.”
“예? 왜, 왜요?….”
“벗으라면 벗을 것이지 말이 많아!”
공주가 한 걸음 다가서자 아투사는 깜짝 놀라 복면을 벗었다.
그녀는 공주와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기수를 놔두고 어떻게 혼자 간단 말인가.
아투사의 얼굴이 드러나자 공주는 짧게 아! 하고 신음을 토했다.
유창한 한어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아투사의 아름다움은 공주에게 극도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 년이 기수에게 꼬리를 쳤구나! 저 얼굴로 내 남자를 빼앗아갔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절대로 아니지만, 어쨌거나 공주의 심정은 그랬다.
그 분노는 곧바로 살심으로 이어졌다.
기수는 한 번 더 밟으면 진짜 죽을 것 같고, 분노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결국 남은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실눈을 뜨고 있던 기수는 그녀의 그런 의도를 알아차렸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왜 여자들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조지려고 하지?’
경쟁자를 다 없애면 남자가 자기만 볼 거라고 생각하는 본능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아투사가 죽는 것은 막아야 했다.
기수는 바닥을 구른 후 손을 뻗어 주예림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녀를 해치면 안 돼!”
“이거 못 놔?”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그녀는 역모의 주동자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그녀 없이는 잡을 수 없다고.”
역모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강하게 넣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주예림은 좌우를 둘러보더니 기수와 아투사의 혈을 눌렀다.
기수는 이미 ‘날 잡아 잡수’하고 포기하고 있던 터라 속절없이 당했고, 아투사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뻣뻣하게 굳자 공주는 한 손에 한 명씩 멱살을 잡아 짐처럼 들고 건너편 지붕으로 몸을 날렸다.
금군 장교들을 돌려보냈다고 해도 아무래도 사방이 열린 지붕 위에 오래 있기는 거북한 모양이었다.
기수는 지붕 위에 널려 있는 보석과 금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감도 느꼈다.
‘설마 나와 아투사는 죽이거나 고문하지는 않겠지?’
공주의 성품이 악독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다르다고 봐야 했다. 걷어차인 횟수만 해도 도대체 몇 대인가.
그리고 방금 전의 살기로 보면 아투사를 죽일 의지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둘 다 점혈 당했으니 공주가 마음만 먹으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몇 번인가 지붕들을 건너뛰고, 마침내 공주가 내려선 곳은 어느 정원이었다.
상당히 공들여 꾸민 흔적이 있었다.
“마마! 돌아오셨군요.”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굽니까? 도적을 잡으셨습니까?”
앳된 여인 두 명이 주예림을 맞았다.
그녀의 시중을 드는 궁녀들인 듯 했다.
“쉿! 너희들은 지금 본 걸 잊고 들어가서 자라.”
두 궁녀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목례를 한 후 총총히 사라졌다.
평소에 교육이 잘 된 것으로 보였다.
기수와 아투사는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냄새로나 화려한 가구로 보나 공주의 침실이 분명해 보였다.
한쪽 벽에 검이니 극이니 하는 병장기들이 걸려 있는 게 좀 미스매치였다.
공주는 두 사람을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힌 후 마혈을 풀었다.
“자. 이제 얘기해 봐. 역모란 게 무슨 소리지?”
“그게 말야….”
“잠깐! 너… 괜히 허튼 수작으로 시간 끄는 거라면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럴 리가 있나. 진짜 역모 사건이야.”
주머니에서 진주 한 알이 똑 떨어져서 데구르르 굴렀다. 눈치도 없다.
공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턱짓을 했다.
“말해 봐.”
기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공주의 얼굴부터 살폈다.
밝은 곳에서 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내가 이런 미녀를 놔두고 왜 떠났던 거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재촉하는 듯 인상을 쓰는 모습은 꽤 냉정해 보였다.
‘설마 복수한답시고 고문을 하거나 괴롭히는 건 아니겠지?’
점혈당한 상태에서 괴롭힘 당하는 건 정말 상상만 해도 싫었다. 동창의 곽염에게 한 번 당한 이후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다.
공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너. 지금 거짓말 지어내려고 잔머리 굴리는 거지?”
“아냐! 절대로 아냐.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가워서…”
공주는 주저 없이 기수의 다리를 발로 찼다.
하도 맞아서 그 정도는 아프지도 않았다.
“거짓말 하면 죽여 버릴 거야!”
기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른대로 말하면 살려준다는 얘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역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인가? 크크….’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구타였지만…
기수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역모에 대해 얘기했다.
“너. 동창에 곽염이란 천호가 있었다는 거 알아?”
아투사는 기수가 공주를 다시 만난 게 반갑다고 하고, 또 말도 함부로 하는 것을 보고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님을 알았다.
살 길이 보인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질투심이 일었다.
다른 부인들을 질투하면 안 된다고 배우긴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공주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동창에 새로 천호가 된 내관 아닌가? 알고 있지. 장안에 파견 나갔다가 흉수의 손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기수는 씩 웃었다.
자기가 바로 그를 때려죽인 흉수이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네? 의왼데?”
“환관들은 다 우리 집안의 노복이나 마찬가지니까 신경을 써야지.”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보기엔 무시무시한 동창, 환관들도 황족 입장에서 보면 가장 충실한 하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환관들은 오로지 황제와 그 가족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 대신 그 이외의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무리인 것이다.
“그 곽염이 주군이라고 부르는 자가 있어.”
“황상이겠지.”
“아냐. 분명히 주군이라고 불렀어.”
“그럴 리가 있나. 동창에서 중용될 정도라면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아도 돼.”
“그 충성의 대상이 네 아버지가 아니라니까.”
“흥! 네 말을 어떻게 믿냐?”
“제독동창을 불러서 확인해 봐. 그도 지금쯤 낌새를 눈치 채고 조사하는 중일 테니까 내 말을 뒷받침해줄 거야.”
주예림은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기수가 덧붙여 말했다.
“곽염뿐만이 아냐. 그의 동료들이 무림 각 문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무림맹과 천마교뿐만 아니라 삼황맹, 일월신교에 각각 숨어서…”
공주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냉소를 지었다.
“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지낸다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아냐! 그럴 리가 있나.”
“아니긴 뭐가 아냐? 동창과 무림맹과 천마교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집단인데 그곳에 모두 동료가 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말이 돼. 그들에겐 공통의 목적이 있거든.”
“그게 뭔데?”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
주예림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뭘 어쩌려고.”
“난세가 이어지면 기회를 틈 타 자기가 황제가 되겠다는 거지.”
“호호호!….”
주예림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그런 허황된 얘기를 믿으라고? 너 정말 절박하구나? 그런다고 내가 너희 두 사람을 살려줄 것 같아?”
“하핫! 설마 진짜로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기수의 목소리는 불안감에 살짝 떨렸다.
황궁비고에서 지낼 때는 공주의 사랑스러운 면만 봤지만, 아까 지붕에서 밟힌 상황. 지금 처한 상황, 그리고 금군 장교와 궁녀들 다루던 모습들을 종합해 보면 진짜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공주가 기수와 아투사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기수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이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그것처럼 빛났기 때문이다.
‘정말로 죽일지도 모른다.’
그런 절박한 마음이 일었다.
“우리가 황궁에 온 건…”
공주가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보물을 훔치기 위해서지.”
그러면서 발로 기수의 허리를 툭 차자 금원보와 보석들이 한 무더기 쏟아졌다.
“이, 이건… 그냥 성 밖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챙긴 거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어. 황궁에 숨어 있는 그들의 동료를 찾기 위해서라고.”
“흥! 끝까지 그 헛소리를 반복할 생각이군.”
“헛소리가 아냐! 정 못 믿겠으면 제독동창을 불러서 물어 봐. 아! 그리고 오늘 경양궁에서 부상당한 궁녀들이 있을 거야. 그녀들을 조사해 봐. 그러면 내 말이 진짜란 걸 알게될 테니까.”
“경양궁이라고?”
“그래. 그 안에 사는 궁녀들이 무공 고수라면 믿을 수 있겠어?”
“궁녀들이 무공을 익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냐. 내 시비들도 어느 정도는…”
“취미 수준이 아냐. 동창 고수들 못지않은 수준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진짜라니까! 너. 지금 내 말 안 믿고 흘려들었다가 나중에 진짜 이 나라에 난세가 찾아오고 반역의 무리가 날뛰면 어쩔래?”
공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주의를 끄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기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하잖아. 경양궁 궁녀들 중 다리에 관통상 입은 애들을 조사해 봐. 내 말이 거짓이면 그땐 마음대로 해.”
“진짜 뭔가 있는 거지?”
“내 목을 걸게.”
공주는 걸상을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한참 생각한 후에 말했다.
“좋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 둬서 나쁠 건 없지. 만약 또 한 번 나를 속이는 거라면 그땐 정말….”
“하핫! 나는 너를 속인 적 없어. 한 번도…”
공주가 노려보는 눈이 너무 무서워서 기수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공주의 무서운 시선이 아투사 쪽으로 향했다.
기수는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역도를 찾아내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하고 있어.”
“역도를 찾아내? 어떻게?”
“하루에 한 번, 해가 진 뒤에 적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보석을 가지고 있어.”
공주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아냐! 진짜야. 그것도 내일 저녁이면 확인할 수 있어. 이번에도 목을 걸게.”
“네 목은 하나뿐인데?”
“그, 그러니까 날 좀 믿어달라는 뜻이지.”
아투사는 단검을 찾는 자신의 능력을 왜 반역도와 연관시키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공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좋아. 내일이면 다 판가름이 나겠지.”
기수가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부탁했다.
“이제 우리 좀 풀어주면 안 될까?”
“웃기지 마. 어림도 없어.”
“그러지 말고 좀 풀어주라. 어차피 지금 정도의 무공 차이라면 네게 저항도 못 해. 그리고 부상도 입었고, 여긴 황궁 한가운데니까 도망도 못 쳐.”
“그래도 안 돼.”
“좋아! 그렇다면 네가 해결해 줘.”
“해결? 뭐를?”
“나 지금 오줌 마려워. 혈도 안 풀어줄 거면 네가 잡아줘. 마지막에 털기까지.”
곧바로 발이 날아왔다.
“으윽!…. 인간의 생리현상을 나더러 어쩌라고. 아악!… 악! 거긴 왜 밟아!”
이제껏 그렇게 많이 때리면서도 한 번도 건드리지 않던 부위가 집중적으로 밟혔다. 기수는 고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강기로 최대한 보호했다.
점혈 당한 상태라 기혈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서 정말 힘들었다.
공주는 10번쯤 밟다가 멈추고 씩씩거리며 말했다.
“조금씩 싸서 말려.”
“아! 너무한다. 진짜…”
“너무 해? 지금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아! 밟지 마. 밟지 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기수는 솔직히 잘못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글쎄… 보물 훔친 거?”
“으으!….”
공주의 발이 다시 기수의 전신을 강타했다.
기수가 비명을 지르자 공주는 마혈을 눌러 입을 막아버리고 분이 풀릴 때까지 무차별 구타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