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59
경양궁은 발칵 뒤집어졌다.
황궁의 경비망이 뚫려서 창고가 털리고 궁녀들이 부상을 입은 것이다.
뒤늦게 달려온 금군대장은 범인을 놓쳤다는 부하 장교들의 보고에 발을 구르며 분노했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그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손찌검에 발길질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태가 수습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붕 위에 올라갔던 금군 장교들은 얻어맞으면서도 자기들이 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문제가 불거졌을 경우, 금군대장 뒤에 줄을 서면 함께 날벼락을 맞겠지만, 공주 뒤에 줄을 서면 빠져나갈 길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황족 중에서 공주의 위치라는 것은 애매했다.
나이가 차면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존재.
어떻게 보면 권력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머나먼 사막의 오랑캐한테 시집보내는 게 아니라 조정대신의 자제와 짝을 맺어주어 가까이 있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직무태만으로 파면된 군관들을 귀양지에서 끌어 올려 다시 복직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자기들처럼 5품, 6품 짜리 하급 군관들은 귀양 간지 한두 달만 지나도 말 한 마디로 빼내줄 수 있을 것이고, 애당초 파면을 막아줄 가능성도 컸다.
주예림을 놓고 보자면 결혼 적령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혼담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었다. 황상이 아끼는 딸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금군대장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쪽으로 줄을 설 수밖에 없었다.
금군대장은 창고의 피해조사를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신고 된 피해 목록이 의외로 검소했기 때문이다.
비단과 면포, 피륙 정도에 불과했다.
비빈들이 거처하는 경양궁이니만큼 적어도 은원보, 금원보에 대한 피해 신고가 있어야 정상인데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궁까지 들어온 도둑이 고작 비단을 훔쳐갔단 말인가?’
크기와 무게에 비해 돈으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았다.
부서진 지붕을 조사하면서, 과연 널브러진 금은이며 보석들이 보고되었다.
금군대장은 감을 잡았다.
잃어버린 사람이 부정하는 재물이라면 뭔가 떳떳하지 못한 과정을 거친 게 분명했다.
‘아무도 잃어버린 사람이 없는데 뭐 하러 보고서에 쓰겠는가.’
그는 수거된 보물들에 대한 보고를 자기 선에서 슬쩍 빼버리고 극히 일부 수량만 기재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벼슬길에서 쫓겨나거나 머나먼 임지로 발령날 것 같은데,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줄여주는 걸 피해자도 바랄 거라고 확신했다.
오전 내내 바삐 돌아다니던 금군대장은 오후에 공주도 영접해야 했다.
“다친 궁녀들이 있다고 해서 와봤어요.”
“아랫사람들을 두루 헤아리는 마마의 은덕에 모두들 감복할 것입니다.”
“범인에 대한 단서는 잡으셨나요?”
“죄, 죄송합니다. 아직….”
“이해할 수 없군요. 어떻게 저 높은 궁궐의 담과 해자를 넘어 도망칠 수 있죠?”
“저희들도 철저히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공주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혹시 아직 궁에 남아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제 이 근처에 동원된 금군이 수 천을 헤아립니다. 그들 모두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주예림은 속으로 한 번 웃은 후 말했다.
“어쨌거나 빨리 잡아주세요.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금군대장과 헤어진 공주는 부상당한 궁녀들이 치료받는 방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런 공주의 행차에 부상자들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도 성치 않은데 일어날 필요까지는 없다. 어서 누우렴.”
주예림은 급히 환자를 부축하러 가다가 실수로 탁자에 놓인 찻잔을 쳐서 떨어트렸다.
찻잔에 담긴 뜨거운 물이 공주와 부상당한 궁녀에게 튈 뻔 했는데, 옆에 있던 한 궁녀가 잽싸게 그것을 잡아 올려놓았다.
공주는 그걸 확인했지만 못 본 척 하고 다리 다친 궁녀를 침상에 뉘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완맥을 잡았다.
“내가 의술을 좀 배웠는데, 진맥을 해주마.”
“아, 아니옵니다. 저처럼 미천한 것에게 어찌 공주마마께서.”
“괜찮다. 사람 목숨에 귀하고 천한 게 어디 있겠느냐?”
공주는 기어이 궁녀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갸웃거리다가 종국에는 손을 놓고 말았다.
“공부가 부족한지, 아무리 맥을 세어도 잘 모르겠구나. 어의를 보내주마.”
“아, 아닙니다. 소녀는 마마께서 관심을 가져주신 것만으로도 그저 황공하옵니다.”
주예림은 계면쩍을 표정으로 일어나 나이 든 궁녀들을 위로하고 격려한 후 돈까지 얼마간 집어준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경양궁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냉정한 얼굴로 바뀌어 자신을 따르는 두 시녀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따라올 필요 없다. 돌아가서 일을 도우면서, 아까 찻잔 잡은 아이와 다리 다친 아이들이 어느 비빈을 모시고 있는지 알아 와라.”
“예. 마마.”
그들과 헤어져 자기 방으로 돌아온 주예림은 병풍을 걷었다.
밤새 굳은 자세로 버려졌던 기수와 아투사가 그녀를 쳐다봤다.
공주가 마혈을 풀어주자마자 기수가 물었다.
“어때? 확인했지? 내 말이 맞지?”
공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상을 초월하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동창 소속의 환관이라면 몰라도 궁녀는 진상된 영약에 접근이 불가능한데…”
“이상하지? 이상하지? 그들을 키운 암중 세력이 있다니까.”
“그들이 모반을 꾀한다고?”
“그래 틀림없어.”
아투사는 장담하는 기수를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봤다.
사실, 기수도 무슨 확신이 있어서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풀려나기 위해서 그럴듯한 건 다 갖다 붙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막상 조합시키다 보니까 앞뒤가 맞는 느낌이 들었다.
난세를 만든다.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사도들과 연관된 신 역시 인간세상에 간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그들이 주군으로 모시는 자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겠는가, 자기는 소박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지만 그들은 그런 꿈을 가질 리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
그것은 황제 자리밖에 없었다.
난세를 만들면 마신은 힘을 얻어서 좋고, 사도들은 천하의 주인이 될 기회를 얻어서 좋은 것이다.
‘난 천재가 분명해.’
적 진영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한 것이다.
“꼭 잡아야 돼!”
지금 황궁에 단검을 가지고 있는 자는 청탑산에서 군도를 가지고 있던 사범과 한통속이고, 그 배후에 이 모든 음모의 주재자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공주도 기수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정말로 역도가 있다면 반드시 잡아야만 해.”
“자! 그런 의미에서 이젠 점혈을 풀어 줘.”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냐.”
“아… 왜? 이제 확인됐잖아? 제네바 조약에 따르면 비록 적이라고 해도 무기를 버리고 전투 의지를 포기하면 인도적인 대우를 해주도록 되어 있다고.”
“제네자?”
“솔직히 밥도 좀 먹이고, 물도 좀 마시게 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게 해줘야 할 거 아냐. 이건 너무한 거 아냐?”
공주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아투사의 혈을 풀어준 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시녀 한 명을 불러 지시했다.
“이 여인이 화장실에 다녀오도록 해주고 물과 음식을 줘라.”
공주가 돌아오자 기수는 애절하게 외쳤다.
“나는? 응? 나는? 나도 목마르고 배고파.”
“너는 완전히 확인될 때까지 풀어줄 수 없어.”
그러더니 찻잔에 식을 차를 따라 가져와서 입에 넣어주었다.
기수는 일단 갈증부터 해소했다.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야 좀 살 것 같았다.
“화장실은?”
“안 풀어준다고 했잖아.”
“아투사는 왜 풀어줬어?”
“그녀는 너를 놔두고 도망칠 것 같지 않으니까.”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아투사를 잡아두고 자기를 교대로 풀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구속을 대가로 풀려나는 건 내키지 않았다.
기수는 슬슬 오기가 생겼다.
솔직히, 그냥 도망친 것도 아니고 분명히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간다고 편지를 썼는데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시기를 빌어요. 서방님 파이팅!’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감히 추살령을 내려? 그리고 어제 쉬지 않고 이어진 구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옆에 아투사가 있었기 때문에 질투심을 좀 느끼긴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길 밟아?
‘이상한 신공 하나 재수로 찾은 모양인데, 그런다고 네가 나보다 센 줄 알아?’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까 세지긴 무지 세진 것 같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힘에서 확실히 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실전 감각이 부족해서 그렇지 내공은 대단했어.’
황제의 딸 정도 되니까 영약을 밥처럼 먹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음양대법만 시전하면 저게 다 내 건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수는 작전을 바꾸어서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파에서 위급하다는 전갈이 온 것은 사실이야.”
목소리를 착 까니까 과연 공주도 듣는 태도가 달라졌다.
기수는 한 단계 더 낮은 톤으로 말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강호행을 한다는 것은 매 순간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위험한 순간의 연속이야. 강적과 만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기도 하고, 암수에 걸려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하지만 난 그 모든 기간 동안 한시도 널 잊은 적 없어.”
“저, 정말로?”
주예림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기수는 거기서 톤은 살짝 부드럽게 바꾸었다.
“난 오로지 여기로 돌아와서 너를 만날 순간만 꿈꿨어. 그래서 역모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후에도 다른 여러 곳을 제쳐두고 황궁에 가장 먼저 온 거야.”
주예림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몸을 살짝 비틀었다.
자기가 너무 심했다고 반성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아투사가 시녀와 함께 들어왔다.
기수가 걱정 되서 밥을 최대한 빨리 먹고 돌아온 것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공주의 발이 기수의 얼굴에 꽂혔다.
“한시도 날 잊은 적이 없다며?”
기수는 ‘쟤하고 하면서도 네 생각만 했어.’라고 말하려다가, 그랬다간 둘 다 적으로 만들게 될 것 같아서 그냥 입 꾹 다물고 맞았다.
‘아! 혈도 짚인 채로 맞는 거 진짜 신물이 난다.’
그러나 공주의 발길질은 어제와 달랐다.
어딘가 맥이 빠져서 구타라기보다는 마사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이 자신을 대하는 심리의 변화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을 감정의 교환, 그러니까 일종의 전희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한 순간, 기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안 돼! 그쪽 취향으로 발전하는 건…’
공주는 별로 흥이 나지 않는지 오래지 않아 발길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투사가 자신의 주술을 공주 앞에서 선보였다.
공주는 에메랄드의 크기에 몹시 관심을 보였지만, 그 안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고는 꺼림칙하게 느껴졌는지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빛이 가리킨 방향에 역도가 있다고?”
“예. 그렇사옵니다.”
아투사는 공손히 대답했다.
사실은 단검을 가리키는 거지만, 눈치가 빠른 그녀이다 보니 기수가 꾸며낸 얘기에 동조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단검의 소유자가 청탑산 사범과 한통속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공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투사를 노려봤다.
기수를 보면 조금씩 마음이 풀리다가도 아투사를 보면 가슴 속에 불덩어리가 들어앉은 것처럼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탁자에 놓인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본 희한한 술법은 아투사만 펼칠 수 있는 것이니까 역도를 찾을 때까지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선 안에 있단 말이지?”
서고를 뒤져 찾아온 황실 내부 지도엔 세부사항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공주의 거처에서 보석이 가리킨 방향으로 자를 놓으니까 경양궁을 지나갔다.
공주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보고 기수가 물었다.
“왜 그래? 뭐 짚이는 데라도 있어?”
“일단은… 다친 궁녀들이 한귀비를 담당한다는 건 알아냈어.”
“한귀비? 그 여자 예… 어떤 인물이야?”
하마터면 예뻐? 라고 물어볼 뻔 했다.
“경양궁에 사는 건 확실한데, 언제 궁에 들어왔는지, 집안이 어떤지는 아직 몰라. 조사하라고 시키긴 했지만…”
“나도 지도 좀 보자. 응? 좀 일으켜주라.”
아투사가 슬쩍 다가가려 하자 공주는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아투사는 찔끔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공주는 손가락을 퉁겨서 기수의 혈을 풀어주었다.
후궁전에 수상한 무리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고. 보석을 이용한 술법으로 역도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까 계속 묶어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기수는 뻐근한 팔다리를 풀면서 하마터면 울 뻔 했다.
‘내 의지대로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할 수가!…’
이번엔 자기가 공주를 제압해서 괴롭혀줄 생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막상 지도를 보며 고민하는 공주를 보니까 손을 쓸 수 없었다.
‘좋아. 딱 한 번만 봐준다. 어쩌면 나도 약간은 잘못한 게 있을지 모르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나한테 발을 들이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필살기를 쓰지 않고는 이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간지럼이나 태워줄까?’
그보다는 맞을 일을 하지 않는 게 쉬울 것 같았다.
기수는 지도와 자를 보고 주예림에게 물었다.
“그 한귀비라는 여자를 이리 불러와.”
“어쩌려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내가 알아낼 수 있어.”
공주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정말이야? 무슨 수로?”
“다 방법이 있다니까.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