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60
공주는 기수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진짜 뻔뻔한, 그러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방법이 있다고 해도 안 돼. 나는 그녀를 부를 수 없어.”
“왜 안 돼?”
기수는 질문을 해놓고 자기가 무리한 요구를 했음을 바로 깨달았다.
금군 장교들한테는 공주의 말 한 마디가 직방으로 통하지만, 상대는 귀비.
즉 비빈 중에서도 황제가 각별히 총애하는 후궁이라는 뜻이었다.
항렬로 따지자면 어머니뻘이 되니까 공주가 명령 내릴 대상이 아니었다.
“흐음…. 그러면 내가 몰래 접근해서 확인해볼까?”
“미쳤어? 지금은 금군뿐만 아니라 동창까지 쫙 깔렸어. 안 그래도 말 하려고 했는데, 넌 여기에 있으면 안 되니까 지하 창고에 들어가 있어.”
“무슨 소리야? 역도를 찾는데 나 없이 너 혼자 어쩌려고?”
“역도를 찾는 것보다 공주 처소에서 남자가 발견되는 게 더 큰 문제야.”
“환관 흉내 내면 안 될까?”
“환관도 여기까지 들어올 수는 없어. 따라와 봐.”
공주가 침상 귀퉁이를 누르자 덜컹하고 바닥의 세로 판이 들렸다.
“와! 여기가 지하통로야?”
기수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혹시라도 황궁에 변란이 생길 경우, 잠자다가 곧바로 일어나서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비밀통로야.”
“아! 이게 그 비고로 연결되는구나?”
공주는 아투사 쪽을 힐끔 본 후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과 기수의 황홀한 추억이 담긴 공간을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게 싫었던 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뒤 지하통로를 약간 들어가자 석실이 나왔다.
등을 켜자 실내가 훤히 보였는데, 상당히 넓은 공간에 한가운데 방석 하나가 놓인 게 전부였다.
기수는 벽을 둘러보다가 여러 흔적들을 발견하고 말했다.
“너 여기서 연공했구나?”
“맞아. 아무리 기합을 지르고, 발을 진각하고, 파공음을 내도 밖에선 안 들리거든.”
기수는 바닥에 손을 대보았다.
지하인데도 돌을 깔아서 그런지 바짝 말라 있었다.
“내가 여기서 지내려면 적어도 이불은 있어야지.”
“이불은 물론이고 먹고 마실 것 다 줄 테니까 당분간 여기서 지내.”
“그러지 뭐.”
기수는 선선히 응했다. 혈도 짚어놓고 밟을 때에 비하면 그녀의 목소리와 태도 모두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공주는 아투사에게 턱짓을 했다.
“넌 나를 따라와.”
기수는 그녀 앞을 막아섰다.
“워, 워! 어디로 데려가려고?”
“걱정 마. 해치지 않을 거니까.”
물론 역도를 잡을 때까지는 아투사가 필요하니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기는 마찬가지 아냐?”
“아니지. 여자니까 궁녀 옷을 입혀서 내 곁에 두면 괜찮아.”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그러자 공주가 언성을 높였다.
“그럼 너와 함께 놔두란 말야?”
이유가 그거라면 기수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깜깜한 지하실에 혼자 남게 된 기수는 잠시 후 내려온 이부자리와 음식 바구니를 받아 들고 배를 채운 후 숙면으로 그동안의 피로를 풀었다.
그 사이 아투사는 야행복, 갑옷, 무기, 암기들을 모두 내려놓고 시녀 차림을 했다.
비록 낮은 신분의 옷이지만 그녀의 미모를 가리기는 어려웠다.
주예림은 아투사의 흰 피부, 크고 깊은 눈을 보며 다시 열불이 났지만 꾹 눌러 참았다. 정말 역모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사적인 감정 따위로 그르칠 수 없는,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제독동창 만욱이 공주의 처소를 찾았다.
“부르셨사옵니까? 마마.”
만욱은 공손히 절을 했다.
서슬 퍼런 동창의 우두머리라고 해도 황족 앞에선 말 잘 듣는 하인에 불과했다.
만욱도 평소와 달리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연신 헤헤거리는 소리를 냈다.
공주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시비를 시켜 차를 내어준 후 말했다.
“요즘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 가지 있어요.”
“황궁에 도둑이 든 것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지금 금군이 조사하고 있지만, 저희들도 따로 경위를 알아보고 있으니 곧 범인을 잡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아니에요.”
“아니라시면….”
“우선 한 가지 물어볼게요.”
“예. 하문하십시오.”
“곽염은 누가 천거해서 천호가 되었나요?”
만욱의 안색이 굳었다.
공주가 갑자기 곽염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그, 그를 천호에 임명한 것은 바로 접니다.”
“무슨 근거로 그럴 선택했죠?”
“우선 그의 무공이 고강하고. 또 사람됨이 영리해서…”
“그런 조건을 충족하면 다른 건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만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혹시라도 공주가 그와 관계된 소문을 들은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다른 것도 충분히 알아봤습니다.”
“흥!”
공주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자 만욱은 흠칫 놀랐다.
주예림은 한기가 느껴지는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구중궁궐 깊은 곳에 갇혀 지낸다고 대충 속이고 넘어갈 생각인가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곽염이 역모와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를 왜 하지 않습니까? 나는 알 필요 없다는 겁니까?”
“그, 그것은….”
만욱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공주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더 숨기는 것은 무의미했다.
“사실, 그런 소문이 있긴 했습니다만…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사를 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조사를 했는데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은 건가요?”
만욱은 진땀을 흘렸다.
“영반 두 명을 배정해서 알아보도록 지시했습니다.”
“고작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적들이 모의를 하는데?”
“마마. 아직 확인된 일이 아닙니다. 자꾸 역모라 하시면…”
“왜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역모를 사전에 찾아내는 일보다 태감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만욱은 의자에서 내려가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공주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증명하세요.”
만욱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봤다.
겉보기엔 금기서화를 익히며 시집갈 날짜나 세고 있을 조신한 아가씨인데, 속을 알고 보니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상전 중의 상전이었다.
“마마. 혹시 우리 동창에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공주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단 도둑 사건에 투입된 인원은 전부 철수 시키세요.”
“예? 하, 하지만…”
“그깟 금은보화 좀 없어진 건 중요하지 않아요. 역모가 성사되면 나라가 남의 손에 넘어갈 판인데, 경양궁 하나 털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 그건 그렇습니다.”
“도난사건 수사는 금군에게 일임하고, 이제부터 동창은 곽염의 주변과 한귀비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철저하게.”
만욱이 깜짝 놀라 물었다.
“한귀비 마마를 말씀입니까?”
“창주님과 저 사이의 일들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오로지 황상께 충성을 바칠 뿐입니다. 아무리 총애가 깊다고 해도 귀비는 결국 비빈 아닙니까.”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주님은 과연 사리에 밝으시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귀비의 궁녀들이 무공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것도 다들 고수입니다.”
“예? 비빈을 모시는 궁녀들이 무슨 이유로….”
“바로 그것 때문에 조사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만욱의 눈빛이 반짝였다.
비록 공주 앞에선 쩔쩔 매고 있지만 동창의 주인 자리엔 아무나 앉는 게 아니다.
천호 두 명을 연이어 잃고 사기가 떨어진 상태지만 역모라는 큰 건수가 눈앞에 떨어졌으니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역량을 자랑할 최고의 기회였다.
더구나 공주가 조사 대상을 콕 짚어주기까지 했는데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마. 저를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서 모든 음모를 백일하에 밝혀내도록 하겠습니다.”
“서두르지는 마세요. 목표는 한귀비를 잡는 게 아니라 그녀와 관련된 자들을 전부 다 끌어내는 거니까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만욱의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을 보며, 공주는 비로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달게 자던 기수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공주였다.
“왔어?”
이불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공주가 심호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동창의 창주를 만났어.”
“응? 그랬어? 잘 했네.”
“곽염과 한귀비의 배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부탁했어.”
기수는 이불을 들추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낌새를 알아차리면 어쩌려고?”
“안심해. 은밀한 조사라면 천하에 누구도 동창보다 더 잘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가?”
공주는 기수가 정색하며 걱정하는 것을 보고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로 역모에 대해 신경 쓰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도둑질은 도대체 왜 한 거야? 그렇게 돈이 부족했어?”
“도둑질이 아니라고 했잖아. 원래는 역모의 증거를 찾으려고 창고를 뒤지던 거였어. 그러다가 부정한 재물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성 밖의 빈민들한테 나눠주려고 챙겨 나온 거야. 놈들을 자극해서 어떻게 나오나 보려는 의도도 있었고…”
“그, 그런 거였어?”
기수는 공주의 슬그머니 표정을 살폈다.
‘고작 그 얘기 하려고 여기 내려왔나? 나한테 보고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기수는 딱 감을 잡았다.
‘그래. 근질근질, 후끈후끈 하지? 그게 나에게 중독된 증상이야. 흐흐흐…’
기수 입장에선 복수의 시간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공주가 많이 나긋나긋해진 어조로 물었다.
“어디 부러진 데는 없어?”
“나야 뭐 원래 튼튼하니까.”
“내가 좀 심했지?”
“뭐…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주먹으로 내 얼굴 때렸잖아. 그때부터 이미 과격하고 흉폭한 성격이란 건 알고 있었어.”
공주는 발끈했다.
“그건 네가 멋대로 입을 맞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간 거지!”
“어제 밟은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닌데.”
“그, 그건 네가 잘못했으니까…”
기수는 그녀가 완전히 꼬리 내린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크크크….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나?’
기수는 일부러 토라진 척을 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데? 오로지 이 나라, 이 황실의 위기를 막아보겠다는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는데 그렇게 발로 차다니…. 아! 정말 몇 번이나 밟힌 거야?”
“미, 미안해….”
“뭐라고? 잘 안 들려.”
“미안해. 정말…. 하지만 너도 너무했잖아!”
“너무하긴 뭘 너무해? 난 잘못한 거 없어. 문파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떠났을 뿐이고, 지금은 황실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돌아왔잖아.”
기수가 뻔뻔하고도 당당하게 나가자 공주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자존심을 굽히기는 싫었다.
“정말 떠날 일이 생겼다면 얼굴 보고 얘기했어야지.”
“그런다고 추살령을 내리냐?”
공주는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그건 어떻게 알았어?”
“모를 리가 없잖아? 내가 쫓기는 당사자인데.”
“그, 그것 홧김에 나도 모르게…”
“발로 밟을 때처럼?”
“그, 그건 아니고… 어쨌거나 그 명령은 곧바로 거둬들였어.”
기수는 홱 돌아서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어쨌거나 난 좀 더 자야겠으니까 이만 나가 줘.”
그러자 공주가 다가와서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미안해. 그러니까 화 그만 내. 응? 응?”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이게 그냥 넘어갈 일이냐고.”
“그럼 어떻게 해줄까? 응? 말해 봐.”
기수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뚱한 표정으로 되돌린 후 돌아앉았다.
“어떻게 해줄지는 네가 상상력을 발휘해 봐.”
“상상력?”
공주의 호흡이 살짝 가빠졌다.
더불어 양쪽 뺨에 발그레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기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심박수가 점점 빨라졌다. 등불에 비친 공주의 얼굴은 그동안 맞은 것을 모두 잊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아투사의 아름다움은 이국적이라는 데서 오는 특별한, 신선함에 기인한 바가 크지만 주예림은 달랐다.
얼굴 자체의 비례와 균형, 이목구비 각각의 아름다움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화내고 소리 지를 때의 얼굴이 아니라, 지금처럼 살짝 흥분되어서 부끄러운 듯, 수줍은 듯 한 표정을 지을 때는 정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공주의 손이 기수의 허벅지에 얹혔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 내가 어떤 식으로 사과하기를 바라?”
기수는 그녀의 손닿은 자리로부터 전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