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62
공주의 머리를 말리고, 빗기고, 정리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아투사는 내내 공주의 희고 긴 목과 거울에 비치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두려움에 떨면서 올려다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찬찬히 살펴보니까 정말 아름다웠다.
여자인데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공주가 거울 너머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뭘 그렇게 힐끔거리지?”
“아, 아닙니다.”
예쁜 얼굴로 미소까지 지으니까 더욱 아찔했다.
아투사는 공주가 자기 남자를 홀린 무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에 비하면 자기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우울해졌다.
공주가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 거울을 보며 말했다.
“손재주가 좋구나. 앞으로 내 머리는 네가 맡아라.”
“예? 예… 알겠습니다.”
공주는 한 번 더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투사는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하루 만에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긴장을 풀면 안 돼!’
아투사는 발길질 해대던 무시무시한 그녀를 떠올리며 정신무장을 새롭게 했다.
공주는 상선감에 시비를 보내 맛있는 요리를 챙겨 오라고 시킨 후 콧노래를 부르며 기다렸다. 지하실에 들어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음식보다 뜻밖의 손님이 먼저 왔다.
“공주마마. 한귀비 마마께서 뵙겠다고 찾아오셨습니다.”
공주는 깜짝 놀랐다.
아투사도 마찬가지라 둘은 경계의 시선을 교환했다.
공주는 아투사를 다른 곳에 가있도록 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후 시비에게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잠시 후 한귀비가 두 명의 시녀들 대동하고 들어왔다.
공주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맞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호호호!…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한귀비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웃을 때마다 살짝 올라간 눈 꼬리 끝에 애교 넘치는 주름이 잡혔고 오똑한 코와 도톰한 입술도 매력적이어서 가히 황제의 눈을 잡아 끌만 한 미모였다.
공주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웃으며 맞기는 했지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다.
너댓 살 많은 언니뻘이면서 부황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 그리고 지금은 역모의 배후로 의심하는 대상이기에 공주는 자연히 긴장이 되었다.
‘왜 찾아온 거지? 혹시…동창이 서툴게 접근했나?’
한귀비는 좌우를 둘러보며 손을 가슴에 얹고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공주는 그녀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아, 아뇨.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이상하게 가슴이 뛰네요. 호호호!…”
“차부터 한 모금 드세요.”
한귀비는 차를 마시고 심호흡을 몇 차례 한 후에 진정했다.
공주가 물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찾아주셨나요? 오실 줄 알았으면 준비를 좀 했을 텐데…”
“아! 사실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왔어요.”
“예? 뭐가요?”
“요번에 도둑이 들어서 우리 아이들을 해쳤는데, 공주가 찾아와서 문병을 했다면서요? 어쩌면 그렇게 마음 씀씀이가 넓고 자비로우세요? 호호호!….”
공주는 그녀의 방문 목적을 알아차렸다.
자기가 맥을 짚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보러 온 게 분명했다.
“아! 그녀들이 귀비마마의 시녀들이었나요?”
“예. 모르셨어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낭 궁녀들이 다쳤다기에 가봤던 거죠.”
“아! 그러셨구나. 호호호!….”
한귀비는 웃으면서 습관처럼 소매를 들어 올려 입을 가리다가 실수로 찻잔을 쳐서 탁자 위에 엎었다.
찻물이 확! 쏟아졌는데, 공주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귀비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미소 지었다.
공주의 반응이 굼떴기 때문이다. 무공을 모르는 보통 여자의 움직임이었다.
공주도 속으로 웃었다.
‘이게 어디서 내가 썼던 수법을 써먹고 있어?’
한귀비는 급히 찻잔을 바로 세웠다.
“어머! 미안해요…”
“아, 아뇨. 시녀들을 불러서 치우라고 시킬게요, 놔두세요.”
한귀비는 일어나서 작별을 고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추태만 부리고 가네요. 미안해요. 그리고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선 공주의 눈이 빛났다.
기수의 말, 그리고 보석의 빛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는데, 지금의 방문으로 심증이 완전히 굳어졌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하지만, 평소 전혀 왕래가 없던 사이에 갑자기 방문하여 찻잔을 넘어뜨리는 건 정말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이다.
의자에 앉아 검지로 탁자를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상선감에 다녀온 시녀가 음식 바구니를 올리자 즉시 일어섰다.
“꿀은 챙겨왔겠지?”
“예. 작은 단지에 들어 있는 게 전부 꿀입니다.”
고민은 나중에 하고 일단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침상 아래 판을 열고 들어가면서, 공주는 꿀을 기수의 어디에 바르고, 어떻게 핥아먹을지를 상상하면서 킥킥 웃었다.
그런데 기수가 사다리 아래서 불쑥 나와 그녀를 맞았다.
“어머! 깜짝이야.”
“아! 미안… 놀랬어?”
“왜 나와 있어? 그렇게 날 보고 싶었어?”
“응? 아! 마, 맞아. 보고 싶었지…. 그런데, 방금 전에 누가 왔다가지 않았어?”
“응. 한귀비가 왔었는데….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기수가 석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쪽에 객청이 있나?”
“맞아. 그쪽에서 만났는데…”
“아! 역시 그랬구나.”
“뭐가 역시 그래?”
기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역적 무리 중 한 명인 게 확실해!”
공주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만, 기수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지 궁금했다.
“증거라도 있어?”
기수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분명히 느꼈어.”
공주는 웃었다.
“불이 밝혀지는 보석에 이어서 역도를 느끼는 가슴이라…”
기수는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느낌은 분명했다.
공주에게서 얻은 내공을 3개의 단전으로 돌리며 열심히 운기조식 하고 있는데 사도의 접근이 감지되어서 깜짝 놀라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걸릴 뻔 했다.
간신히 기식을 조절하고 좌우를 아무리 둘러봐도 사도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지하 통로를 문이 잠긴 곳까지 왕복해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석실에서만 그 기운이 느껴졌다.
기수는 좌우가 아닌 위쪽, 즉 지상에 사도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공주가 들어오자마자 누가 왔다갔었느냐고 물은 것이다.
‘한귀비가 사도였구나. 그녀를 잡으면 이제 셋이 남는 건가?’
공주가 꿀 단지에 검지를 넣어 기수의 가슴에 찍은 뒤 혀로 핥으며 말했다.
“너한테도 기회를 줄게. 하지만 일단 나부터…”
“자, 잠시만…. 생각 좀 하고.”
“생각은 무슨 생각? 일단 이 놀이부터…”
그러나 기수는 정색하고 그녀를 제지했다.
“한귀비가 왜 너를 찾아온 거지?”
공주는 자기가 너무 애처럼 굴었다는 생각에 살짝 볼을 붉혔다.
“지난번에 내가 다친 궁녀들 만나러 갔던 것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갔어.”
“그럼 눈치를 챈 거잖아?”
“그런 것 같기도 했어.”
기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럼 위험한데.”
“뭐가?”
“만약 네가 역모를 꾸민다고 해 봐. 가장 어려운 부분이 뭐일 것 같아?”
“명분을 세우는 거지.”
“그래. 하지만 만약 황제가 죽는다면? 그러면 일이 훨씬 쉬워지잖아?”
“말도 안 돼. 백만대군을 일으킨다고 해도 부황폐하께 접근도 못할 걸.”
“백만대군까지 필요 없어. 한귀비가 자객이라면 간단히 해결되니까.”
공주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표정이 변했다.
한귀비와 마주 앉았었지만 그녀가 무공을 익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모시는 시녀들은 분명 만만치 않은 고수들이었다.
만약 한귀비가 자신이 감지해내지 못할 정도로 깊은 내공을 지닌 고수라면 황상을 시해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침실에까지 호위병을 데리고 들어가지는 않으니까 어쩌면 후궁이야말로 최고의 자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 어쩌지? 그녀가 진짜로 일당이라면…”
“들켰다고 생각하면 일정을 앞당길 수도 있어.”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주는 음식바구니를 내려놓고 급히 사다리를 올라갔다.
기수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어쩌려고?”
“어쩌기는. 당장 동창을 불러서 한귀비를 체포하라고 해야지.”
“무슨 증거로?”
“증거가 없더라도 잡아야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기수는 그녀를 따라 올라갔다.
“넌 왜 나와?”
“말리려고. 증거도 없이 들이댔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하, 하지만 당장 오늘 밤이라도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해도…”
소란스러워지자 시녀들이 몰려왔다.
공주는 손짓으로 모두 물러가도록 했다. 아투사만 남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기수를 보고 하마터먼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아! 뼈만 남은 거 봐.’
사실 기수의 몸엔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 눈엔 그렇게 보였다.
공주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어쨌거나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는데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오늘 안에 그녀를 잡을 거야.”
기수가 말했다.
“좋아! 그럼 나도 간다. 너 혼자는 못 보내.”
그는 사도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다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급격하게 전투력이 향상되어서 멸천제의 경우는 정말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다.
한귀비 역시 만만치 않은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주변에 무공이 뛰어난 궁녀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공주가 운룡비결을 익힌 후 예전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고는 해도 반드시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한귀비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게 되면 몰려드는 훼방꾼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공주는 펄쩍 뛰었다.
“넌 안 돼! 어떻게 남자를 데리고 가?”
“환관 옷을 입을게.”
“그래도 마찬가지지. 소속이 불분명한 환관과 동행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을 살 일이란 말야.”
“그래도 난 꼭 가야겠어!”
“안 된다니까!”
둘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자 아투사가 조용히 말했다.
“여장을 하면 되잖아요.”
기수와 공주가 동시에 그녀를 봤다.
아투사는 당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남자도 안 되고, 환관도 안 되면 궁녀로 변장하면 되잖아요? 옷과 가발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기수와 공주는 동시에 기수의 얼굴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더러 여장을 하라고?”
“이 얼굴이 화장을 한다고 여자로 보일 것 같아?”
아투사가 말했다.
“양소협은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자 얼굴형으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거기에 면도 깨끗이 하고 분만 좀 바르면…”
공주가 기수의 양쪽 뺨을 잡고 좌우로 돌려보면서 미소 지었다.
“화장을 한단 말이지….”
“으으…. 무슨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안 돼!”
“따라오고 싶다면 그 길밖에 없는데… 그래도 싫어?”
제독동창 만욱은 급한 호출을 받고 공주의 처소로 갔다.
“부르셨사옵니까?”
“병력을 준비해주세요. 한귀비를 잡으러 갈 거니까요.”
만욱은 깜짝 놀랐다.
“예? 지, 지금 말입니까?”
“그래요. 그녀가 황상 시해를 노리는 자객이란 사실이 밝혀졌어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손발이 떨릴 정도로 무서운 얘기였다. 귀비가 자객이라니.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공주마마. 이것은 몹시 중대한 일입니다. 혹시 입증할 근거가 있습니까?”
공주는 입맛을 다시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녀 좌우엔 예쁘장한 서역 출신 궁녀, 키 크고 못생긴 궁녀가 서 있었다.
둘 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만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동창의 수장이라고 해도 궁녀들 얼굴까지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공주가 말했다.
“증거는 현장에서 밝히겠어요. 그러니 당장 준비해 주세요.”
“하,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귀비마마를 체포하러 가는 것은…”
“일이 잘못되면 책임은 전부 제가 지겠어요.”
공주가 그렇게까지 말하다면야 만욱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동원하겠습니다.”
공주가 일어서며 말했다.
“소문을 듣고 도망칠지도 모르니 저는 먼저 가서 그녀를 잡아놓겠어요.”
그리고는 두 시녀와 함께 경양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