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65
공주는 절을 올린 이후에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오랜만이구나. 공주.”
“예. 부황폐하.”
황제는 주예림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장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나 싶었다.
더불어 자기도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염에 희끗거리는 백발이 섞이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였다.
공주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큰 키에 살이 쪄서 거대해 보이는 체격.
둥글고 살 오른 뺨에는 푸근한 미소가 가득했다.
여염집 같았으면 ‘아빠~’하고 응석도 부려봄직 하건만, 황궁엔 법도가 있었다.
부녀지간의 정이 살가워지기엔 격식이 너무 번거로웠다.
그래도 핏줄은 어쩔 수 없는지 공주를 보는 황제의 눈빛엔 정이 가득했다.
“만태감에게 보고는 받았다. 네가 공이 컸다면서?”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허어! 그 고얀 계집이 감히 내 딸에게 칼을 겨누다니…”
황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공주는 부황의 표정에 어린 그늘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부황 폐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지 않을 일이 무엇이겠느냐.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알아냈으니 다행이지.”
공주는 부황이 한귀비를 몹시 총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그녀가 자객으로 밝혀졌으니 배신감이 클 것이었다.
황제는 책상에 잔뜩 쌓인 서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잔뜩 보고를 하긴 했는데, 다 읽어봐도 결론이 없더구나. 누가 사주한 일인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으니. 쯧쯧….”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제국의 뿌리를 흔들 사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상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화도 나고, 두렵기도 한 상태였다.
황제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대책회의를 위해 동창과 장군부, 5군도독부, 6부의 수장들을 모두 불러 모았으니 그들에게서 적절한 대책이 나올 것이었다.
공주를 앞에 두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 공주. 이번에 큰 공을 세웠는데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보거라. 네 소원이라면 전부 다 들어주마.”
주예림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부황폐하의 무사무탈하심이 제겐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하하!….”
황제는 큰소리로 기분 좋게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참으로 고맙구나. 그러나 그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터는 조정 대신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공주는 만태감의 보고서에 뭔가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귀비의 무공수위에 대해 언급이 되지 않았거나 두루뭉술한 표현이 사용된 게 분명했다.
하긴, 공문서에 적어 넣기에는 좀 무리한 부분이 있을 것 같기는 했다.
“부황 폐하. 제가 오늘 뵙자고 한 것은 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다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귀비를 잡아오겠습니다. 그러니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하하하! 네가 말이냐?”
“예. 제가 가야만 합니다..”
“너는 내 딸이다. 어찌 그런 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 너 말고도 그런 일 할 사람은 많다. 이럴 때 쓰려고 녹봉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
“아닙니다. 제가 아니면 그녀를 잡을 수 없습니다.”
황제는 웃음을 그쳤다.
공주의 표정을 보니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네가 아니면 잡지 못한다는 게 무슨 소리냐?”
“한귀비는 무공의 고수입니다.”
“그러니까 더 더욱 무공을 익힌 무관을 보내야지.”
“소녀. 부황폐하께 한 가지 고백하고 벌을 청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말해보거라.”
“저는 어려서부터 무단히 황궁 비고의 영약을 먹고 그곳의 무공을 익혀왔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은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중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표정은 곧 펴졌다.
“그건 문책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내 딸이 먹었는데 뭐가 아깝겠느냐. 무공을 익히는 것도 건강에 좋은 일이니 탓할 게 아니지. 그러고 보면 네 어미도 무공을 꽤나 좋아했었지….”
황제는 회상에 잠기는 듯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 상태로 있던 황제는 긴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래. 몰래 익힌 무공으로 한귀비와 싸운 것이냐? 허허!…”
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공주가 말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배웠다고 하기엔 정도가 좀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번 시범을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냐! 한 번 보자구나.”
황제의 딸의 재롱을 기대하는 아버지의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었다.
“이 방안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무엇입니까?”
“글쎄….”
황제는 좌우를 둘러보다가 벼루를 가리켰다.
“저게 가장 단단한 것 같구나.”
“놀라지 말고 잘 보십시오.”
공주는 벼루를 들어 바닥에 놓고 장심을 댔다.
그리고 손바닥에서 금광이 번뜩였다.
황제는 갑작스런 빛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공주가 들어 보이는 벼루를 보고는 더욱 크게 놀랐다.
한가운데 그녀의 손모양이 파여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잘 해야 격파 정도를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진흙도 아닌 돌덩이가 깨지지 않고 움푹 파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무공을 가르쳐주시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혼자 있을 때마다 조금씩 익혔는데, 지금은 이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공주와 벼루를 번갈아 보았다.
그 역시 건강을 위해 운기토납법 입문공부 정도는 했기 때문에 무공의 수위에 어느 정도 단계가 있는지 대략 알고 있었다.
“너… 너, 이제 보니까….”
“죄송합니다. 말씀드리지 않아서…”
“아, 아니다. 네 어미가 보면 정말 기뻐했겠구나. 허어!…”
공주는 황제의 놀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말했다.
“그런데 저의 실력으로도 한귀비를 잡기는 버거웠습니다. 만태감이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놓쳤으니, 일반 무관들이 그녀를 찾는다 해도 잡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흐음…..”
황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한귀비가 그런 정도의 고수라면 역적 도당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왔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동안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손을 쓰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단순히 자기를 죽이기만 원한 게 아니라 어떤 때를 기다려 왔다고 봐야 했다.
황제는 한 차례 식은땀을 흘렸다.
공주는 그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비로소 황제가 사태를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차분히 기다렸다.
한참 뒤 황제가 말했다.
“그 무거운 임무를 네가 어찌 혼자 감당하겠느냐?”
보내주겠다는 의미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만큼, 방금 시범을 보인 정도의 무공이라면 도움을 거절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혼자는 아닙니다. 무공을 가르친 시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창이 도와준다면 어렵지 않게 한귀비와 일당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오냐, 그래.”
황제는 내관을 불러 어떤 물건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두 개의 번쩍이는 금패였다.
“이것은 동창과 금의위를, 이것은 장군부를 네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는 금패다. 네가 필요할 때 마음껏 부리대로 해라.”
“아!… 감사합니다.”
기대 이상의 지원이었다.
“장태감에게 얘기해둘 테니 돈도 넉넉히 가지고 가거라.”
“고맙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고맙고 또 미안했다.
“다른 건 또 필요한 것 없느냐? 무엇이건 다 말해 보거라.”
“없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니다. 사양하지 말고 얘기하거라.”
공주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사실은…. 이번 일과는 상관이 없지만…”
“괜찮다. 말해 보거라.”
공주는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니중에… 제 배필을 제가 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뜻밖의 요구에 황제는 눈을 크게 떴다.
여염집에서도 그렇게 하는 법은 없는데, 하물며 황실에서 될 말인가.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라도 있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다만, 나중에 언제가 되더라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기보다…”
“흐음….”
황제는 당황하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공주는 그의 그런 표정에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오래지 않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래! 좋다. 네 뜻대로 하거라.”
“가, 감사하옵니다!”
공주는 뛸 듯이 기뻤지만 황제 앞이라 조신한 태도를 유지하느라 애먹었다.
“기필코 한귀비와 그 일당을 잡아 부황폐하 앞에 꿇어앉히겠습니다.”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네 뜻대로 하거라.”
“예?”
“일에 성패와 상관없이 네 혼인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줄 테니까 괜히 무리해서 덤벼들지 말란 뜻이다.”
“아, 알겠습니다.”
공주는 긴 소매 안에 감춰진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아싸!를 외쳤다.
황제는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적 도당 잡는 일에 딸을 내보내는 판에, 부마를 스스로 고르겠다는 소원 하나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허락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시집을 가면 남이 된다는 사실에 좀 더 자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거의 뛰듯이 자기 거처로 돌아온 공주는 문을 벌컥 열었다.
“해냈어! 해냈다고! 나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그녀는 소리 지르며 자기 침실로 달려갔다.
기수에게 최대한 빨리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궁 밖으로 나가 그동안 꿈꿔오던 강호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기수와의 혼인까지 승낙 받았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혼인 얘기는 지금 하지 말고 나중에 놀래켜줘야지!’
그러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공주가 놀라고 말았다.
“하핫!… 왔어?”
“공주마마… 오셨습니까?”
여장한 기수와 아투사가 뭔가 어색한 기색으로 반가이 맞는데 직감적으로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주는 정색하고 물었다.
“너희들… 왜 단둘이 내 방에 있는 거지?”
“응? 청소하려고. 청소….”
기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먼지털이개를 황급히 집어 들었다.
아투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볼만 붉혔다.
공주의 목소리가 저음으로 깔렸다.
“청소가 문제가 아니라 왜 둘이 함께 있냐고!”
기수는 공주의 발부터 살폈다.
그리고 탁자가 커버해줄 수 있는 방위로 슬쩍 옮겨 서면서 말했다.
“방이 크잖아. 어떻게 혼자 청소를 다 해.”
그리고 겉에서 만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벗겼다면 다시 입을 시간은 없었을 것이었다.
공주는 기수의 변명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아투사를 노려봤다.
“너! 바른대로 말 해. 당장!”
아투사는 겁에 질렸다.
요 며칠 자기를 대하는 공주의 태도가 많이 온화해진 것을 느꼈다.
지하실에서 자기 남자를 괴롭히는 게 미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공주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보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저, 저희는 아무 짓도…”
기수가 얼른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녀에게 앞으로 내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해 얘기했어. 다른 시녀들은 들어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에 이리로 온 거야. 절대로 다른 일은 없었어. 맹세해!”
기수는 너무 강한 부정을 했나 싶어서 속으로 아차 했지만 다행이 공주는 다른데 의문을 가졌다.
“네 입장이 어떤데?”
“응. 한귀비는 너 혼자서 잡을 수 없잖아. 나 혼자도 좀 힘들 것 같고… 그래서 그녀를 잡을 때까지 우리 둘은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된 거지.”
공주의 표정이 살짝 펴졌다.
붙어 다닌다는 말에 왠지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좋아하는 남자와 강호행을 함께 하며 매일매일 대법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 이젠 부황폐하께 허락을 받았으니 기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건 이 세상 끝까지 따라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아투사를 보는 순간 입술 모양이 바뀌었다.
“이제 얘는 필요 없지?”
기수와 아투사 모두 당황했다.
“아냐. 아투사가 있어야 한귀비를 찾을 수 있어. 그녀는 꼭 필요해.”
기수는 단검 카드를 찾아주겠다고 아투사와 약속한 바 있었다.
한귀비가 가지고 도망갔으니 그 약속은 아직 이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공주 입장은 달랐다.
“동창과 장군부의 인원을 동원하면 천하에 있는 태화각은 전부 다 찾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빛나는 보석 따위는 필요 없어.”
“그, 그렇지 않다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너!”
공주의 호통에 아투사는 움찔했다.
“예. 공주마마.”
“당장 짐 싸. 황궁에 침입한 죄는 눈감아줄 테니까 당장 떠나!”
아투사는 놀란 얼굴로 기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