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67
아투사는 기분이 좋았다.
조백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몹시 공손했기 때문이다.
단지 공주의 시녀라서가 아니었다.
손을 섞어 봤기 때문에 실력을 존중해주는 것이었다.
제국에서 동창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투사는 잘 알고 있었다.
문무백관들은 책잡히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무림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그 조직의 현재 서열 2위라고 할 수 있는 조백호가 자신을 존중해준다는 사실이 아투사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한껏 느끼게 해주었다.
개운하게 목욕을 한 그녀는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보석과 카드를 연결하는 주문을 외워 바닥에 칼금도 그었다.
느긋하게 차도 한 잔 마신 아투사는 침상에 누웠다.
꽤 피곤한 하루였는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혼자 쓰게 된 너른 방이 더욱 허전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지금 함께 자고 있겠지?’
허탈감은 시간이 지나자 질투와 분노로 바뀌었다.
아투사는 이불을 걷어 젖히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황궁에서도 매일 지하실에 들어가서 함께 지내더니 이젠 궁 밖으로 나와서도 나를 따돌려?’
공주가 궁 밖으로 처음 나와 본다며 호들갑을 떤 것도 어쩌면 자기를 먼저 보내기 위해 수작을 부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아!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
아투사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
다음 날.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기수와 공주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아투사가 밤에 그은 칼금을 보고 지도 위에 새 선을 그었다.
“각도가 달라졌잖아?”
공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기수와 아투사를 번갈아 봤다.
기수가 말했다.
“그건 좋은 현상이야. 한귀비가 칼을 버리지 않고 계속 지닌 채 이동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공주는 한참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귀비가 한 자리에 진득하니 눌러앉아 있어주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리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뒤를 쫓을 수만 있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뒤를 밟힐 거라고는 꿈도 못 꾸겠지?’
감히 부황을 시해하려고 한 못된 계집의 뒤통수에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자! 이제 따듯하게 목욕이나 하고 오늘을 여기서 쉬어갈까?”
공주는 기지개를 켜며 기수에게 야릇한 눈길을 보냈다.
그때 아투사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떻게 해야 기수와 단둘이 있을까를 생각하던 공주는 미소와 함께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부름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 뭔데?”
“왜 언니만 양소협하고 자요? 그건 불공평해요.”
공주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언니라니….”
“궁을 나오면서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다른 사람들 있을 때 얘기지!”
“어쨌거나 저도 양소협과 자고 싶어요.”
공주는 물론 기수도 아투사의 폭탄 발언에 적지 않게 놀랐다.
설마하니 이렇게 대담하게, 노골적으로 얘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투사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공주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한 것은, 자기가 단검 카드를 되찾으려면 기수와 공주의 힘이 필요하지만, 그들 역시 한귀비를 찾으려면 자신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무공은 공주에 비해 딸리지만 맡은 역할의 중요성은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늘 혼자 한숨만 쉬어야 하는가.
황궁 안에서 지낼 때는 제국의 공주라는 자리가 주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궁 밖으로 나온 지금.
서로 평상복을 입고 보니까 주변의 위세는 힘을 잃었다.
용기를 내어 ‘언니’라고 부른 후에는 자신감이 더욱 솟아났다.
공주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곧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이게 죽고 싶어서!”
홧김에 뺨을 한 대 후려쳤는데, 아투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이게 감히 피해?”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날 때리려고 하는 거죠?”
“자격이라니!”
“솔직히. 내 남자를 빼앗아간 건 언니 쪽이잖아요. 화를 낼 사람은 저죠.”
“어머! 얘 좀 봐. 너 뭐 잘못 먹었니? 아니면 미친 거니? 내가 누구란 걸 잊었어? 이게 꼬박꼬박 언니라고 하면서 대드네?”
아투사는 침을 꿀꺽 삼켰지만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따지고 보면 난 이 나라 백성도 아니에요. 섬기는 신과 섬기는 왕이 따로 있다고요. 그러니까 언니가 공주라고 해도 내겐 소용없어요. 자기가 잘못해놓고 신분와 지위로 누르려는 게 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나요?”
공주는 허! 허! 거리며 호흡을 조절한 후 말했다.
“그래. 좋다. 이치를 따져보잔 말이지? 이 남자는 원래 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중간에 가로챘던 걸 내가 되찾은 거야.”
기수는 ‘난 물건이 아냐. 그리고 너희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라며 끼어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자기를 놓고 두 미녀가 싸운다는 사실에 기분이 참 묘했다.
아투사는 공주의 주장을 인정해주었다.
“좋아요. 언니가 먼저 알았다고 쳐요. 하지만 저도 분명히 양소협의 여자인데 왜 언니만 독차지하나요? 너무한 거 아닌가요?”
공주는 대놓고 공유하자는 아투사의 요구에 할 말을 잊었다.
기수가 자기편이 되어줄 거라는 기대에 쳐다봤지만 그는 무엇을 상상하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투사가 기수를 향해 말했다.
“양소협도 나빠요!”
“응? 내, 내가… 왜?”
“어쩌면 저를 이렇게 대할 수 있죠? 저는 양소협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데…”
말하는 중에 아투사의 큰 눈엔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뚝뚝 떨어졌다.
공주는 그런 그녀를 보고 버럭 화를 냈다.
“이게 어디서 눈물로 남자를 홀리려고.”
그녀가 달려들려 하자 기수가 사이에 끼어들어 제지했다.
“됐어. 이제 그만 해.”
공주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되긴 뭐가 돼? 설마 저 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림아. 사실… 내겐 너 말고도 다른 여인들이 있어.”
짝! 소리가 나며 기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뺨을 때린 공주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누군지 몰라?”
기수는 피식 웃었다.
‘아! 진짜 이 공주마마 손버릇, 발버릇 안 고쳐지네.’
기수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어준 후 말했다.
“네가 누군지 알아. 그런데 넌 내가 누군지 아냐?”
“그, 그게 무슨 뜻이지?”
“너는 오로지 네 생각만 한다는 뜻이야.”
“아, 아냐. 그렇지 않아.”
“후후…. 그렇지 않기는. 너는 공주로 태어났고 평생 떠받들여졌으니까 세상이 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의 세상이 따로 있어. 아투사도 마찬가지고. 남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너도 인정받지 못해.”
공주는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자기한테 그런 식으로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녀는 기수가 어떻게든 아투사와도 자고 싶어서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말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래. 아투사가 나를 독차지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너를 인정해줄 테니까 자기도 인정해 달라는 거 아냐. 그녀의 나라에선 원래 한 남자가 네 명의 아내를 맞이하는 게 합법적으로 인정되거든.”
아투사가 덧붙여 말했다.
“이 나라에서도 3처4첩까지는 인정되는 거 아닌가요?”
공주는 기가 막혔다.
감히 공주를 앞에 놓고 첩을 들이겠다는 얘기 아닌가.
그런 법도는 없었다.
부마는 황제의 사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지만 첩을 들이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제약이 있었다. 황제의 딸을 아내로 맞은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
기수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나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너한테 미안했던 일도 있고 해서 그냥 넘어갔지만, 아까도 얘기했듯이 내겐 다른 여인들이 있어. 그걸 포기하고 너만의 남자가 될 수는 없어.”
아투사가 용감하게 나서는 모습을 보고 기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공주는 이를 갈았다.
기수의 뻔뻔하고 건방진 태도에 불같이 화가 났다.
“다른 여인이 아니라, 여인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를 따지자면 네 앞에 이 정도는 돼.”
그러면서 한 손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였다.
실제로는 더 많겠지만 일단 발차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좋아. 그럼 나와 아투사는 떠난다.”
공주는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용서할 수 없다며? 그럼 갈라서야지.”
“너…. 너….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또 날 떠나겠다고?”
공주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기수는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워! 워! 그건 아니지. 내가 떠나는 게 아니라 네가 쫓아내는 거지. 우리 말은 똑바로 하자고.”
“한귀비 잡는 일은?”
“그건 우리 둘이 알아서 할게. 넌 궁으로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려.”
공주는 순식간에 화가 식는 것을 느꼈다.
아투사가 없으면 한귀비 추적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기수가 없으면 자기 혼자 한귀비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공주는 기수의 뺨을 한 대 더 때렸다.
그러나 이번엔 기수의 손에 팔목을 잡혔다.
“이거 놔! 나쁜 놈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도 나와 아투사의 사정은 생각해주지 않잖아. 피차일반이지.”
“나쁜 놈! 당장 못 놔?”
공주는 잡히지 않은 손과 발로 마구 기수를 구타했다.
기수는 그녀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주….려고 했지만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양손으로 그녀의 양 팔을 잡고, 두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막다 보니까 어정쩡하게 안은 자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내친 김에 욕을 퍼부어대는 그녀 입에 키스를 했다.
공주는 고개를 돌리며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아투사가 보는 앞에서, 그것도 화가 난 상태로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수가 집요하게 시도하자 결국 도리질이 잦아들었다.
기수는 그녀와 입맞춤을 나눈 후 말했다.
“독차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전과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저리 비키지 못해!”
기수가 놓아주자 공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옆방으로 건너가서는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았다.
둘만 남게 된 기수와 아투사는 한동안 공주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러나 잠이 든 것인지 불도 안 켜고, 소리도 안 들렸다.
‘이건…. 무언의 승낙인가?’
기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워낙 심하게 난리를 치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기 조심스러웠다.
기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아투사를 번쩍 안아들었다.
지금쯤 공주는 자기가 그 방으로 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세상 모든 미녀를 ‘공평하게’ 사랑해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조금 더 예쁘다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해줄 수는 없었다.
아투사를 침상에 누이자 그녀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어, 어쩌려고요?”
“네가 원하던 일을 하려고.”
“하, 하지만 공주님이 바로 옆방에 있잖아요.”
“하핫! 아까는 그렇게 용감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소심해졌어?”
“아직 확실하게 결론이 난 것도 아닌데 이러는 건…”
“괜찮아.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우리가 떠나면 그만이야.”
“양소협은 공주님을 사랑하잖아요.”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공주를 사랑해. 자기 생각만 하는 여자는 필요 없어.”
마지막 말은 들으라고 약간 크게 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강기막을 펼쳐 방을 둘러싼 후 아투사의 몸 위로 체중을 실었다.
“아아…. 양소협. 그, 그런데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되고 말고.”
살짝 빼던 아투사도 기수의 입술이 목과 가슴에 닿자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열기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기수는 공주가 언제라도 강기막을 건드릴 수 있다고 신경을 쓰면서 아투사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오랜만에 그녀의 흰 속살을 마주하니까 손이 다 떨렸다.
‘아!~ 역시 편식은 나쁜 거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구석구석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 아투사에겐 있었다.
기수는 밤새도록 아투사의 한을 풀어주면서 자신의 기쁨도 충족시켰는데, 그동안 강기막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공주의 자존심이 끝까지 기다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셋이 마주 앉아 먹는 아침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공주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투사는 그토록 원하던 밤을 보내고 얼굴이 활짝 피었지만 공주의 차갑고 무거운 표정에 기가 죽어서 그저 눈치만 살폈다.
공주는 조백호를 불러 다음 목적지에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한 후 일어나서 죽립을 쓰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걷기 시작했다.
기수와 아투사는 황급히 그녀를 따랐다.
하루 종이 말없이 걷기만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점심을 먹을 때는 답답한 기수가 먼저 말을 걸어보았지만 공주는 냉랭했다.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침묵의 행군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