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75
청탑산 사범의 기억을 적은 종이는 자꾸 늘어났다.
한참 몰두해 있는데 밖에서 아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식 식어요.”
방해하면 안 건드린다고 했더니 아무래도 공주가 아투사한테 시킨 것 같았다. 가위 바위 보를 했거나.
기수는 모처럼 가진 명상의 시간이 아까웠지만 약속을 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갔다.
이미 어두워진 저녁.
보양식으로 가득한 밥상.
그동안은 먼 길 걷느라 바빴지만 오늘은 시간이 충분해서인지 객잔 주방에 부탁을 좀 한 모양이었다.
기수는 공주와 아투사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일단 발동이 걸린 일도 마무리하고 싶어서 공주에게 말했다.
“하루 더 머무르자고 해.”
“알았어. 이거 좀 먹어 봐. 몸에 아주 좋은 거래.”
공주가 접시 하나를 밀었다.
기수는 젓가락을 가져가려다 멈추었다. 길쭉한 살덩이가 뭔가 수상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몸에?”
“응?”
“내가 먹으면 누구의 몸에 좋은 건데?”
“호호호!….”
“솔직히 말해 봐. 이거 어느 동물의 어느 부위야?”
아투사가 대답했다.
“사슴의…”
공주가 얼른 눈짓으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기수는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슴의 몸 중에 이런 부분은 혀와 숫놈에게만 있는 특정 부위밖에는 없을 터.
‘햐! 중국 사람들 진짜 별 걸 다 먹는구나.’
그러나 그걸 잘 쓰려면 그걸 먹어야 한다는 주술적 믿음을 가지기엔 기수의 사고방식이 너무 현대적이었다.
기수는 젓가락을 다른 쪽으로 가져갔다.
“그건 너희들이나 먹어.”
“어렵게 구한 비싼 건데!”
“난 그런 거 안 먹어도 돼.”
“정말?”
“증명이 필요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몸이 축나면…”
살짝 자존심이 상한 기수는 그날 밤 확실하게 증명해 보여주었다.
“너희들 둘로는 내 몸을 축낼 수 없단 말야! 자! 어때?”
“헉헉…. 하, 항복!”
“항복은 무슨! 다시 좌우로 정렬!”
“제, 제발… 그만!”
“싫어? 그럼 상하로, 아니 엇갈려서 정렬!”
그렇게 밤을 불태우고 나니 다음날 아침밥엔 채소반찬이 나왔다.
기수는 어제 했던 일을 반복했다.
명상은 여전히 어려웠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편이 쉽지, 잡념을 버리는 것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잠깐씩, 짧으면 1분에서 길면 10분까지 끊어서 기억 속의 장면들을 이끌어내는 일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기수는 공주에게 말했다.
“내일 하루만 더 머물자. 그러면 다 될 것 같아.”
“지금까지 쓴 거 봐도 돼?”
“아니. 아직은 뒤죽박죽이야. 나중에 한꺼번에 보여줄게.”
사실 기수는 그동안 쓴 걸 앞뒤로 맞춰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청탑산 사범이 주의를 기울였던 부분은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부분은 기억이 흐릿하거나 없었다.
마치 AV 비디오에 중요 장면만 책갈피 해놓은 것처럼, 다 아는 부분, 쉬운 부분, 별 거 없는 부분들은 죽기 전 주마등에서 빠졌다고 봐야 했다.
일단 떠오르는 걸 전부 다 적어놓고, 정리는 나중에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젓가락을 든 기수는 밥상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왜 오늘은 고기가 한 점도 없어? 아침에도 그러더니…”
“호홋! 그, 글쎄… 객잔 숙수가 푸줏간엘 안 다녀왔나?”
기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식사가 끝나자 공주가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한귀비의 목적지는 남경도 아닌 것 같아. 우리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 동쪽으로 확실히 진로를 틀었어.”
“양주, 남경 다 지나쳤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소주 아니면 항주겠지.”
“아!….”
“왜 그래?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어?”
“아, 아냐. 거긴 인구가 많은데 숨어버리면 찾기 어려울 것 같아서.”
“아투사의 보석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북경에서도 찾아냈으면서.”
“하긴….”
기수가 아! 하고 신음을 토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소주와 항주라면 일월신교의 근거지.
즉. 장군부와 혈매궁 여섯 사매가 강시를 청소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땅이었다.
‘혹시 한귀비가 일월신교와 관련된 건 아니겠지?’
그녀들 생각을 하니까 문득 보고 싶기는 했다.
공주가 슬쩍 옆으로 달라붙으며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해?”
“응? 명상으로 적어내는 무공.”
“다른 여자 생각이 아니고?”
“하핫! 너희들을 놔두고 내가 그럴 리가 있어?”
눈치도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을 너무 쉽게 읽히거나…
공주와 아투사는 배시시 웃었다.
“이제 생각은 그만 하고 행동으로 옮길 시간 같은데…”
“좋지!”
기수는 잠시 딴 생각 한 게 미안해서 어제와 달리 응징은 줄이고 대법은 최대한 길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애무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반응이 기대했던 것만큼 나오지 않았다.
특히 아투사는 자신의 혀가 닿을 때보다 공주의 혀가 닿을 때 교성이 더 큰 게 확실히 구분되었다.
‘쳇!’
노력을 인정받지 못해 삐진 기수는 전희를 그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본분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기수는 마침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적의 무공을 모조리 꺼내는데 성공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공주가 함께 종이들을 정리하다가 놀란 어조로 말했다.
“어! 이건 단정홍이다!”
그리고 기수에게 다그쳐 물었다.
“이게 원래 한귀비 패거리의 무공이었어? 그런데 넌 어떻게 배운 거야?”
“얘기하자면 길어.”
“그래도 얘기해 봐. 혹시 너…”
“하하하! 내가 역모 꾸민 놈들과 한 패일까 봐?”
“아니. 그건 아니지만… 단정홍과 은혈대법을 다 알고 있으니까 이상하잖아.”
기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것뿐만이 아냐. 파천강기도 원래 이들의 무공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들 중 한 놈이 내가 자기네 부하인 줄 알고 가르쳐줬거든.”
기수는 자기가 역용술로 그들 속에 침투했는데 실력을 인정받아 중간보스가 되고 비급을 받았다는 식으로 줄여서 얘기해주었다.
그 조직이 수로맹이었고 사도가 여자였다는 디테일한 부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얘기도 이어갔다.
“단정홍은 적에게 당한 후에 역으로 분석해서 알아낸 거야.”
“그, 그런 게 가능해?”
“천재란 말이 괜히 나온 줄 알아?”
공주는 생각에 잠겼다.
상승무공, 그것도 적의 무공을 이렇게 자세히,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뭔가 미심쩍기는 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수가 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전제를 깔고 본다면 이렇게 아낌없이 다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그을 더욱 믿을 수 있게 해주었다.
“좋아! 은혈대법 어디 있어? 내가 기필코 파해법을 찾아내고 말 거야.”
공주는 종이들을 뒤적거렸고, 아투사도 도왔다.
기수는 기수대로 찾는 게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이제까지 사도들과의 대결 중 자신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무공,
반칙이고 사기라고 생각했던 무공.
일월신교 교주의 둘째 아들 유지광이 사용했던 전기충격 공격이었다.
‘뇌전격이라…’
이름은 예상 범주 안에 있었다.
그러나 운기법은 처음부터 애매하고 뜬구름 잡는 내용의 연속이었다.
한자라는 게 한 글자가 함축하는 뜻이 많아서 딱 부러지게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무림에서도 비급보다 사부를 더 쳐주는 것이다.
비급에 적힌 그 글자가 무슨 뜻인지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말로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건 없을 테니까.
아투사는 공주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함께 은혈대법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간 중간 생략되고 요점만 적혀 있는 식이라서 무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약간 부족한 그녀로서는 이해가 쇱지 않았다.
하지만 공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손을 넣어 가슴을 더듬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투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언니…”
원래는 평복을 입고 한귀비를 쫓는 동안 공식적으로만 쓰기로 한 호칭.
그러나 지금은 공주가 진짜 자기 언니처럼 느껴졌다.
셋이 함께 알몸으로 뒹굴던 상황을 상상만 해도 아래쪽이 찌릿찌릿하고 목이 움찔움찔거렸다.
“이제 슬슬 잘 준비 해야죠?”
“응. 잠시만…”
공주가 은혈대법에 몰두해있자 아투사는 그녀를 놔두고 기수의 뒤로 가서 끌어안고 턱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손은 가슴이 아닌 자연스레 늘어뜨렸을 때 닿는 지점에 놔두었다.
치마와 속옷 너머로도 형태가 느껴졌다.
그걸 부드럽게 위아래로 만지며 아투사는 기수가 골몰하여 보고 있는 종이의 내용을 따라 읽었다.
공주처럼 기수의 몸도 평소와 달리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끄아아악!…….”
기수가 괴성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아투사와 공주 모두 깜짝 놀랐다.
“왜 그래? 갑자기…”
“양소협! 무슨 일이에요?”
두 여인이 모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기수가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부분이 이제 바야흐로 사이좋게 가지고 놀아야 할 부분이라는 데 있었다.
기수가 아투사를 향해 물었다.
“바,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예? 제가 뭘요?”
“손으로 만졌잖아?”
“예. 그런데요. 어머! 저 때문에 아프신 거예요?”
“어떻게 뇌전격을 일으킨 거지?”
“제가요? 전 그냥 종이에 적힌대로 해봤을 뿐인데…”
“다, 다시 한 번 해 봐.”
아투사는 손바닥을 들어올리고 방금 전의 운기를 그대로 해봤다.
그러자 빠지직! 하는 소음과 함께 엄지와 검지, 중지 사이에 시퍼런 불꽃이 이어졌다.
“꺅!”
아투사 본인이 그 낯선 상황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기수가 물었다.
“몸의 다른 부분은 괜찮아?”
“뭔가 찌릿한 느낌이 전체로 퍼지면서 솜털들이 일어서는 느낌이에요.”
“아프지는 않고?”
“전혀요.”
기수는 그녀에게 방금 한 운기법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아투사가 한 대로 따라하자 과연 기수와 공주의 손가락 끝에서도 파란 불꽃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크기가 너무 작았다.
건조한 겨울 날 잠깐씩 생기는 정전기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아투사의 뇌전격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커졌다.
공주가 뇌전격에 대해 적힌 부분을 보고 말했다.
“잘 해야 백만에 하나 정도라고?”
“뇌전격을 일으킬 수 있는 체질이 따로 있나봐.”
“우린 내공이 훨씬 깊은데 안 되는 거야?”
“체질이라잖아. 내공이 아니라… 요만한 거라도 만든 게 대단한 거지.”
아투사는 재미가 들렸는지 양손으로 뇌전을 만들고, 그걸 이어서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놀기 시작했다.
“양소협. 이게 도대체 뭐 하는 무공이죠?”
기수는 씩 웃었다.
“축하해! 너 방금 엄청난 기연을 얻은 거야. 아니지.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은 체질이었다고 봐야 하나?”
“이게 기연이라고요?”
너무 쉽게 얻어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기수가 설명해주었다.
“방금 나를 쓰러트렸잖아.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보통의 경우 네가 주먹으로 상대를 쓰러트린다고 생각해봐. 너와 몸집이 비슷한 상대라면 적당히 쳐도 되지만, 만약 팔 척 거구라면 웬만큼 쳐선 안 되잖아?”
“급소를 정확히 가격하거나 내력을 담아 쳐서 내상을 입혀야만 쓰러트릴 수 있죠.”
여성 무림인들에게 있어 체중에 따른 핸디캡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체력이 필수인 칼보다는 한 점을 정확히 찌르기만 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검을 선호하는 것이다.
기수가 아투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전기, 뇌전격은 달라. 상대가 아무리 덩치가 커도 한 방에 제압할 수 있어. 키가 5척이건 8척이건, 몸무게가 100근 이건 200근이건, 심지어는 내공이 얕건 깊건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닿기만 하면 쓰러지는 거야.”
“아아!….”
아투사의 눈이 커졌다.
자기가 어떤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진심이 담긴 표정과 말투였다.
“고, 고마워요. 언니.”
아투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기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벅찬 환희와 함께 입가에 차츰 미소가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