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8
산을 내려가는 내내 고황명은 기수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기수는 자기에게도 팬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뻐서 술 마시자는 제안에 대뜸 응했지만 상대가 쉬지 않고 칭찬을 계속하자 살짝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의구심도 일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은 자존심이 강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은 너무 저자세로 나오네. 혹시 물건 팔려는 잡상인인가?’
현대였다면 도를 아십니까부터 다단계까지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할 것 같은 상황이라 기수는 조심스럽게 염정구심술을 가동시켜보았다.
낯선 사람과 심리를 동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서 5분 정도가 걸린 뒤에야 비로소 고황명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어떤 장소를 찾고 있었다.
인적 없는 장소.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장소.
‘헉…! 이, 이자는 지금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기수는 고황명이 자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기수의 표정이 변하자 고황명도 안색을 싹 바꾸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반월도를 뽑아 기수의 목을 베었다.
엄청나게 빠른 발도술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기수는 상대의 속마음을 읽은 순간 진기를 끌어올렸기 때문에 그 치명적인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고황명은 첫 공격이 빗나갔음에도 멈추지 않고 제2, 제3의 공격을 가해왔다.
기수는 쩔쩔매며 피하다가 급히 손을 뻗어 잔백지를 날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황명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지풍을 칼로 쳐내면서 계속 치명적인 살초를 날려 왔다.
‘고수다! 존나 쎈 놈이야.’
기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드레날린이 확! 분비되면서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잔백지가 통하지 않는다면 태무신궁의 분광권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수가 내공을 잔뜩 끌어올리면서 본격적인 초식운용을 시작하자 고황명의 공격이 잠시 주춤했다.
기수의 권법에 워낙 막강한 경력이 내재되어 있는데다가 빠르고 변화가 다양해서 맞서기 어려웠던 것이다.
상대가 멈칫거리자 기수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놈은 나보다 강하지 않아. 쫄지만 않으면 이긴다!’
기수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고황명은 계속 뒤로 밀렸다.
그리고 마침내 기수의 정권이 그의 중단전에 정확히 꽂혔다.
“으윽…!”
고황명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날아갔고, 기수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 주먹맛이 어떠냐! 어디 감히 날 암살하려고…”
기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는 고황명에게 다가가서 한 대 더 때려주려고 하다가 손을 멈추었다.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수의 내력이 가득 실린 주먹에 정통으로 맞았으니 단번에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그가 죽기 전에 의문을 풀고 싶었다.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시켰느냐?”
고황명은 원한 가득한 눈빛으로 기수를 노려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기수는 급히 염정구심술을 시전하여 그와 심리 동조를 이룬 후 다시 질문했다.
“제갈세가가 너를 고용했느냐?”
고황명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기수는 답을 들었다.
‘개새끼들! 무림맹에까지 자객을 보내다니.’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가주가 아끼는 아들인 제갈륜을 죽였으니 그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너 말고 다른 자객이 또 있나?”
그 질문엔 마음의 반응이 없었다.
대신 고황명의 다른 생각이 들렸다.
‘아! 여기서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동안 모아둔 재물들이 동굴 속에서 썩어 갈 것을 생각하니 아깝기 짝이 없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벌자마자 다 써버릴 것을…’
기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걱정 마라. 내가 써줄 게. 유용한 곳에.”
고황명은 깜짝 놀란 눈으로 기수를 바라봤다.
기수가 그에게 말했다.
“입을 열지 않아도 돼. 동굴의 위치를 생각만 해. 그래! 바로 그렇게…”
기수는 죽어가는 고황명의 마지막 생각을 읽고 잘 기억해두었다.
돈이란 돌아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사람은 어차피 죽었는데 재물이 잊혀져버린다면 아까운 일 아니겠는가.
기수는 숨을 거둔 고황명의 시신을 숲에 던지고 무림맹으로 돌아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결에서 승패를 가르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무공의 고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황명은 자신보다 무공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기수는 그 원인을 의지라고 결론 내렸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상호간의 무공 격차를 상당부분 메꿀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요인은 운 같았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그냥 멍하니 있다가 한 칼에 당했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고황명의 발도술은 빨랐다.
‘무공과 의지와 운. 그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해. 운이야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제쳐놓고, 무공은 막강한 내공 덕분에 상당한 경지에 올랐지. 하지만 의지는?’
그것이 문제였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다른 상황도 생각해보자면, 자신은 의지가 강한 편이 아니었다.
무공도 엉겁결에 막강한 내공을 가지게 되어서 고수가 된 것일 뿐, 자신의 의지력으로 쟁취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기수는 나태했던 자신에게 채찍질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 이곳은 까딱 방심하면 목숨을 잃는 곳. 바로 무림이다! 난 정신적으로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어. 그래야 죽지 않고 살아서 현대로 되돌아가지.’
절벽에서 떨어질 때 의문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기수는 귀환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존재의 실존을 확인했으니까 그의 의지에 따라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 있는다면…
기수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집중 훈련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다른 무공은 다 대성했는데 염정구심술만 2성, 3성 수준에 머물렀던 것도 의지력, 정신력 부족이 원인이야.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도전할 생각을 안 했다니…’
그동안 흘려보낸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좋아! 이제부터라도 훈련하는 거다!’
결심을 굳히고 주먹을 불끈 쥐며 좌우를 둘러보니 그는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생각에 몰두하느라 도착한 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한 여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기공자. 여기서 혼자 뭐 하세요?”
“예? 아! 예. 그러니까… 좀 둘러보던 중이었습니다.”
말을 건 사람은 놀랍게도 사해문의 호운혜였다.
그녀가 살살 눈웃음을 쳐가면서 자신을 유혹하려 하고 있었다.
‘이거 뭐야? 어제 백서린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내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둘 사이의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백서린이 다른 내기 참여자들에게 말을 하지 않은 거라고 짐작되었다.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소문이 금방 퍼질 게 분명하니까 그냥 입을 다문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나만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자기 선에서 막고 싶었다면 어제 헤어질 때 연애편지를 졸라서 내기를 끝낼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기수로서는 유향경이 한눈팔고 있고, 당운영은 새로 합류한 가족들 때문에 당분간 빠져 나오기 힘든 상황이라 혼자 심심하던 차였다.
그래서 곧바로 마음을 정했다.
“호소저. 날도 화창한데 우리 산책이나 할까요?”
“좋죠. 호호호…!”
호운혜도 내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응했다.
기수는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호운혜는 그녀의 오빠만큼은 아니더라도 키가 상당히 컸다.
기수는 자기보다 5cm 정도 더 큰 여자와 데이트한다는 사실이 살짝 부담스러웠다.
힐을 신지 않고도 5cm 차이.
키스할 때 남자가 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상황이 먼저 떠올랐고, 뒤로 결합할 떄 여자가 다리를 구부려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덩치도 크고 힘도 나보다 센 여자와 정상적인 잠자리가 가능할까?’
왠지 주눅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기수는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질책했다.
‘마음 약하게 먹지 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지력을 키워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었잖아. 상대가 2m가 넘어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 의지력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후 호운혜에게 말했다.
“그런데, 호소저는 얼굴이 참 작네요.”
“어머? 정말요?”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상대가 기대하지 않는 부분을 칭찬하라! 는 원칙에 입각해서 기수는 두 번째 펀치를 날렸다.
“어려 보이는데다가 수줍음도 몹시 많이 타시는군요.”
“제, 제가 어려 보이나요?”
“예. 십대 초반의 소녀 같으십니다. 아! 혹시 기분 나쁘신가요?”
“아, 아뇨.”
호운혜의 큰 체격은 그녀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하는 게 분명했다.
뭐든 작다고 해주는 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작은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가슴은 어제 행복하게 주물렀던 백서린의 것보다도 훨씬 컸다.
‘와! 저기에 얼굴을 묻으면 귀까지 덮이는 거 아냐?’
주눅 들었던 마음이 서서히 호기심과 흥분으로 옮겨갔다.
엉덩이 사이즈도 컸다. 백서린은 허리와 힙의 비율 때문에 커 보이는 것이고 호운혜는 사이즈 자체가 컸다.
기수는 여자의 엉덩이 사이즈와 그곳 사이즈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급격한 의문을 지니게 되었다.
‘좋다! 오늘 확인해보자!’
기수는 어제 이용했던 낡은 사당 쪽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리고 염정구심술을 시도했다.
얼마나 빨리 제압할 수 있는가 도전해보고, 풀었다가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했다.
호운혜는 걷던 중에 갑자기 손으로 턱도 만지고, 귀도 만지는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기수의 배경이 든든하지 못해서 단지 내기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몹시 아쉽게 느껴졌다.
자신의 덩치와 배경에 주눅 들지 않고 사내답게 당당하게 대하면서, 동시에 듣기 좋은 얘기들을 해주니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기수도 백서린보다 그녀와의 데이트가 즐거웠다.
백서린은 가문과 얼굴, 몸매에서 모두 완벽했기 때문에 콧대 높고 도도했지만, 호운혜는 약점이 한 가지 있어서인지 몰라도 훨씬 상냥했다.
기수는 계속 염정구심술 빨리 펼치기 연습을 했다.
제대로 하려다 보니까 의외로 내력 소모가 심했다.
‘역시 이게 만만한 게 아니구나.’
그렇게 걷다 보니 마침내 두 사람은 사당 앞에 이르렀다.
기수가 호운혜에게 제안했다.
“우리 저기서 쉬었다 갈까요?”
“좋아요. 마침 볕도 따가운데…”
기수는 그녀 역시 자신의 무공을 믿고, 내기에서 확실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남자와 외진 곳에 단둘이 있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넌 개미지옥에 걸려든 개미나 마찬가지야. 후후…’
앞장서서 들어간 기수는 사당 바닥에 온통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와 다른 액체의 마른 자국들은 물론이고 먼지가 쌓인 위에서 몸부림 쳤던 형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수는 호운혜를 다른 쪽으로 인도했다.
“여긴 너무 먼지가 많군요. 저쪽 회랑 쪽에 앉읍시다.”
“네. 좋아요.”
기수는 그녀가 앉을 자리에 손수건을 펼쳐주었다.
호운혜는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기공자.”
기수도 씩 웃었다.
그녀의 얼굴만 놓고 보면 확실히 작고 예뻤다.
크고 맑은 눈망울은 사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기대되는데… 분위기도 이만하면 좋고…’
두 사람이 앉은 자리는 실외였지만 무성한 잡초와 나무들 때문에 사방의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어서 실내나 마찬가지였다.
기수는 사해문이 하는 일에 대해 물었고 호운혜는 자세히 대답해주었다.
기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호소저. 해양 무역을 한다면 상대국은 어디입니까?”
“주로 동영과 조선이죠.”
“조선! 배를 타고 그 나라로 갈 수 있나요?”
“물론이죠. 산동에서 개성까지 하루면 도착하는 걸요.”
기수는 가슴이 뛰었다.
비행기는 아니라고 해도, 하루면 조국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가고 싶다!’
그러나 그는 그 생각을 곧장 접었다.
자기가 만약 조선시대로 가서 뭔가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후손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일이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기수는 마음을 정리하고 눈앞에 있는 호운혜에 집중하기로 했다.
‘염정구심술을 신속하게 펼치는 연습을 하자!’
기수는 그녀의 마음을 장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접촉을 시도한 후 그녀가 화를 내거나 자기를 때리려고 할 때 염정구심술을 운용하기로 했다.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고, 아슬아슬한 극한 상황으로 밀어붙여야 수련의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호소저.”
“예?”
기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면서 동시에 손으로는 그녀의 거대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호운혜의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기수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