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81
여섯 명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자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 들렸다.
가장 큰 분위기 메이커는 조백호였다.
그는 찻잔에 손도 안 댄 채 이를 악믈고 탁지연과 춘매를 노려보기만 했다.
공주와 아투사도 탐색전에 바빴다.
탁지연과 춘매의 이목구비를 조목조목 뜯어보고 비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수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찻잔만 내려다봤다.
고문 받는 기분이었다.
탁지연은 그런 기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공주가 조백호에게 말했다.
“백호님.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예? 응? 아!.. 내가? 응. 맞아… 그랬지.”
그는 축객령에 물러났지만 혈매궁의 두 여인을 노려보는 시선만큼은 거두지 않았다.
다섯 명만 남게 되자 탁지연이 말했다.
“동창이 여전히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군요.”
공주가 약간은 경직된 어조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강시를 전부 잡을 때까지는 협조관계가 유지될 테니까.”
그 이후엔 어찌될지 모른다는 투로 얘기한 것은 기수를 그녀들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탁지연은 어제와 달라진 공주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런 기색을 지우고 말했다.
“협조를 거론하셨으니까 말인데, 서로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 탁매(卓梅), 이쪽은 춘매(春梅)라고 해요.”
공주가 웃으며 물었다.
“두 분 다 이름이 매화인가요?”
“혈매궁 식구들은 다 그렇답니다. 호호…”
”그렇군요. 저는 예림, 이쪽은 아투사, 그리고 이쪽은 양씨라고 해요.”
탁지연의 시선이 기수에 고정되었다.
“양씨라…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수가 고개를 들고 대답하려 하자 공주가 팔을 저어 막은 후 대신 말했다.
“성만 양씨일 뿐, 이름은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여자가 이름 없는 경우야 흔한 것 아닌가요?”
가시가 돋친 어투에 탁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춘매 역시 공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기수는 혹시라도 충돌이라도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했다.
사매들의 솜씨가 보통을 훨씬 뛰어넘긴 하지만 공주의 적수는 아니었다.
그때 탁지연이 갑자기 기수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
“양씨. 당신 이름이 기수 아닌가요?”
기수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역용이 풀리기라도 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탁지연이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역용술엔 문제 없으니까 만지지 말아요. 궁주.”
춘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궁주야?”
“틀림없어요. 내 눈은 속이지 못해요.”
“하, 하지만 여잔데… 겉모습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궁주의 역용술로 목소리 바꾸는 것쯤은 일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 탁지연의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로 변했다가 돌아왔다.
직접 시범을 보인 것이다.
그녀는 탁자를 쿵! 내리치며 기수에게 말했다.
“빨리 본래 얼굴을 보여요! 궁주.”
기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탁지연에게도 역용술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지금의 모습 어디에서 자기 정체를 알아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주가 기수 대신 나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궁주라니!”
“흥! 누굴 속이려고? 동창에서 왜 우리 궁구를 잡고 있는 거지? 혹시 너희 두 계집이 무슨 금제라도 가한 것이냐?”
“무, 무슨 헛소리냐!”
기수가 뭐라 해명을 하기도 전에 탁지연의 손에서 강력한 기도가 발출되었다.
바로 파천강기였다.
공주는 날카로운 기습에 천돌혈을 찔릴 뻔 했지만 잽싸게 손목을 비틀어 탁지연의 공세를 빗겨 흘렸다.
그리고 오히려 그녀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러자 춘매가 눈을 부릅뜨고 끼어들었다.
“이년이 어딜!”
춘매의 소매에서 암기 두 개가 튀어나와 공주의 겨드랑이로 향했다.
거리도 가깝고 각도도 예리해서 피하기 극히 어려운 공격이었다.
“언니! 위험해요!”
아투사가 달려들어 공주 대신 소매로 그 암기들을 쳐냈다.
네 사람은 순식간에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렸다.
기수는 공주가 흥분하여 살수를 쓸까봐 걱정되었다. 자기를 밟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탁지연과 춘매에겐 무슨 수단을 쓸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탁지연과 춘매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공주의 몸놀림을 통해 무공수준을 가늠한 두 사람은 즉시 합격진을 가동했다.
오랜 시간 매화육궁진을 함께 해온 둘이기에 손발이 척척 맞았다.
공주는 내공과 초식 모두 우위에 있으면서도 쉽게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한 쪽에 공세를 취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배후를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아투사는 그런 공주를 돕고 싶었지만, 그녀들의 협동작업은 침상에서 주로 이루어졌지 싸움 중에 합격진을 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2:2의 싸움이라고 해고 탁지연과 춘매가 매화육궁진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는데 반해 공주와 아투사는 따로 놀거나 서로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공주에겐 운룡비결의 진기운용법이 있었지만, 탁지연의 손에서 뻗어 나온 파천강기도 만만히 볼 수 없었다.
화가 난 공주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냐!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그리고 즉시 단정홍을 끌어올렸다.
기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가발을 벗어들고 한가운데로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 좋아. 네가 본 게 맞아. 내가 돌아왔어. 적이 아니니까 다들 그만 둬.”
순식간에 본래의 얼굴과 목소리가 돌아오면서 체격도 원래대로 돌아가자 양측이 동시에 손을 멈추었다.
“궁주!”
탁지연은 눈물이 글썽거렸고, 춘매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였구나! 궁주가 돌아왔어!”
그리고 탁지연과 춘매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체격이 환원되면서 꽉 끼는 여자 옷 입은 몰골이 우스웠던 것이다.
“궁주! 그게 무슨 꼴이야? 저 년들이 강제로 시켰어?”
“뭐 저년?”
공주가 발끈해서 나서려 하자 기수가 제지했다.
“잠시만, 잠시만. 흥분을 자제하고. 말도 조심하고. 우리 대화로 풀어보자.”
춘매가 물었다.
“궁주가 왜 동창과 함께 있는 거야? 저 년들이 수작 부린 거 아냐?”
“말조심 하라니까. 나 동창과 함께 일하는 거 아냐.”
“그럼 아까 조백호는?”
“그는 우리가 하는 일에 필요해서 데리고 온 것뿐이야.”
“동창의 백호를 따라온 게 아니라 데려왔다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데?”
“그걸 설명하려면 길고… 우선 지연이 너 내가 역용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
“눈동자.”
“눈동자라니?”
“역용해도 눈동자는 바뀌지 않거든.”
기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눈동자를 빼고는 전부 바뀌었는데, 설마… 내 눈동자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한다는 거야?”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홍채인식도 아니고…’
무공을 익히면 시력이 좋아지긴 한다.
하지만 눈동자 안의 색소나 주름 형태를 기억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탁지연이 화를 억지로 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떠났어? 그리고 그동안 어디 가서 뭘 했기에 소식 한 장 없었어? 저 두 계집은 또 뭐고?”
“하핫! 자꾸 함부로 부르면 곤란한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러자 공주가 기수의 겨드랑이를 쿡! 찔렀다.
아무리 문파 사람들이라고 해도 자기 정체를 밝히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 것이다.
춘매가 여차하면 다시 손을 쓸 각도로 옮겨 서며 물었다.
“저 년들이 누군데?”
“그, 그러니까 황제의 특명을 받고 역모에 대해 조사를 나온 후궁전의 궁녀들이야.”
공주는 역모 얘기를 꺼내면 어떻게 하냐는 표정으로 기수를 툭! 쳤지만,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걸 숨길 수는 없었다.
춘매의 눈이 반짝였다.
“역모?”
그녀는 지금 비록 장군부에 속해 있지만 동창에서 교육을 받은 몸.
역모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주모자가 누군데?”
자세와 태도, 목소리와 표정까지 착 가라앉았다.
기수는 공주의 눈치를 한 번 본 후 말했다.
“경양궁에서 지내던 한귀비가 황상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실패해서 강남으로 도망쳐 왔어. 그녀의 배우가 누구인지는 아직 몰라.”
“비빈이 황상을 암살하려 했다고?”
춘매는 크게 놀랐다.
TV도 인터넷도 없는 세상이다 보니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기수도 강남의 강시 문제를 모르기 마찬가지였다.
춘매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추천한 관리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오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일단 강남에 들어온 이상은 꼬리를 밟힐 수밖에 없어. 그동안 강시를 찾아다니면서 우리끼리 각 장원의 자료들을 모아 두었거든. 주인은 누구고, 벼슬은 어디까지 했고, 누구와 줄이 닿아 있는지.”
“그래? 장군부에서 시킨 일이야?”
“아니. 우리끼리 재미삼아 만든 거야. 일월신교가 강남에서 세력을 구축하는 동안 휘하 방파들뿐만 아니라 부자들, 상단들, 세가들과도 결탁했을 거라고 판단했거든. 그들 중 어딘가 강시를 숨겨놨을 수도 있으니까…”
공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강남의 세력가들 자료를 재미로 모았다고?”
거기에 대해선 기수가 설명해주었다.
“사매들은 원래 동창 출신이거든. 거기서 그런 일들을 했었어.”
“아! 그런데… 조백호와는 왜?”
“지금은 동창과 원수지간이야. 사소한 문제가 좀 있어서…”
“무슨 문젠데?”
자기가 천호를 죽였다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사소한 거야. 지금은 장군부에 의탁해서 그들을 돕는 중이니까 굳이 과거를 들춰낼 필요는 없잖아?”
“어쨌거나 그런 자료가 있다면 나도 좀 보고 싶은데…”
공주는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이었다.
아투사의 보석이 있지만 하루에 선 하나 긋는 것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력한 방파나 세력가를 골라낼 수 있다면 훨씬 확률이 높아질 것이었다.
그러나 탁지연은 그걸 공개할 마음이 없었다.
“꿈도 꾸지 마. 우리 궁주나 돌려줘.”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들이야 말로 꿈도 꾸지 마. 양씨는 황명을 받고 역모를 조사하는 중이야.”
“흥! 그런 거짓말에 속을 줄 알고?”
탁지연이 보기에 여우같은 두 계집이 기수를 여장까지 시켜가면서 끼고 도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공주가 품속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금패를 꺼내들었다.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춘매는 용이 새겨진 황금패를 보고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탁지연이 그녀를 일으키려고 잡아당겼다.
“왜 무릎을 꿇고 그래? 우린 동창 소속이 아니잖아?”
“저 가운데 깃발 문양은 장군부의 지휘권을 의미하는 표식이야.”
“우린 장군부 소속도 아니잖아?”
“하지만… 역모를 조사 중이라면 백성 된 도리로서 모른 척 할 수 없잖아. 어사금패를 보면 황상을 뵙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해야 하는 거야.”
공주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호호호!… 아주 제대로 알고 있구나.”
기수한테는 비밀을 지키라고 해놓고 자기가 금패를 공개하는 것이 좀 계면쩍기는 했지만, 무릎 꿇은 춘매를 보니까 보람이 있었다.
탁지연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춘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기와 다섯 사매는 출발점이 달랐다.
지금은 장군부에 의탁하고 있지만, 동창과 원수지간이라 근본적으로 신분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다섯 사매.
그녀들에게 역모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조사에 참여하고 해결에 도움을 준다면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동창과의 악연 종결은 물론이고, 큰 상금과, 어쩌면 관직까지도 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도망자 신세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춘매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은 것도 여우같은 계집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런 계산에 입각한 행동임이 분명했다.
장군부를 도와 강시를 잡는 것과 역모의 주모자를 잡는 것은 완전히 격이 다른 목표인 것이다.
공주가 턱을 높이 치켜들고 탁지연에게 물었다.
“너는 왜 아직도 꼿꼿이 서있는 것이냐?”
탁지연은 춘매와 기수를 번갈아 살폈다.
춘매의 행동을 보니 나머지 네 사매도 같은 마음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기수의 꼬락서니로 추정하건데, 여장을 하고 후궁전 뒷조사라도 한 모양이었다.
궁주와 사매들이 하나 되어 참여한다면 자기 혼자 반대해도 소용없는 일.
그러나 그냥 이렇게 무릎 꿇기는 정말 싫었다.
“그래서… 궁주가 그동안 연락도 없이 우리를 떠나 있었던 게 역모 조사를 위해서였다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기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래. 그게 워낙 비밀유지를 요하는 일이라서 말이지…”
공주는 기수를 노려봤다, 자기한테 편지 써놓고 튄 시점과 한귀비의 음모를 알게 된 시점 사이엔 아주 긴 시간차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옆얼굴이 따끔거렸지만 공주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탁지연이 말했다.
“좋아요! 일단 회의를 해봐야겠어요.”
“회의?”
“혈매궁의 입장을 정리하려면 궁주와 사매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해야죠.”
“안 돼!”
공주는 곧바로 빽! 소리를 질렀다.
모여서 뭐 할지 감이 팍!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