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82
기수는 공주의 격한 반응을 보고, ‘응. 그래. 우리 회의 좀 하자.’라고 말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탁지연은 공주에게 물었다.
“궁주님과 문도들이 의논하겠다는데 왜 막는 거죠?”
“그, 그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만 말로 할 수는 없었다.
탁지연은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싫으면 그만 둡시다. 어차피 우리는 강시 찾으러 다니기도 바쁘니까.”
무릎 꿇고 있던 춘매도 슬그머니 일어섰다.
탁지연이 회의하겠다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도 팔짱을 끼며 탁지연 옆에 섰다.
“우리 혈매궁은 역모의 주동자를 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궁주와 의논 없이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죠.”
두 사람이 모두 뻣뻣하게 나오자 공주는 애가 탔다.
“이 금패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탁지연이 말했다.
“우리는 장군부를 도울 뿐, 거기에 소속된 건 아니에요.”
춘매도 한 마디 했다.
“역적 처단도 좋고, 강시 토벌도 좋지만, 이거 저거 다 귀찮으면 그냥 떠나도 되요. 우리 혈매궁은 아쉬울 게 하나도 없으니까.”
기수는 공주에게 들키지 않도록 빙긋 미소 지었다.
떠날 때까지만 해도 사매들의 브레인은 탁지연이었는데, 블러핑 치는 춘매를 보니 그동안 꽤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기수는 슬쩍 공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콜이냐, 폴드냐. 아니면 레이즈냐?’
공주는 갑자기 분노의 화살을 기수에게 돌렸다.
“웃지만 말고 얘기 좀 해 봐! 네가 궁주잖아. 다들 당장 내 말 들으라고 해!”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싫은 걸. 내가 왜?’
기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후 주변에 강기막을 펼쳤다.
조백호가 듣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 봐.”
공주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앉긴 뭘 앉아? 어서 명령을 내리라니까!”
“너. 내 말 안 들을 거야?”
기수가 무게 잡고 낮은 음조로 얘기하자 공주도 더 이상 날뛰지 못하고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기수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기수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말을 시작했다.
“너희들에게 얘기할 게 있어. 사실 내겐 목표가 있거든. 바로 4명의 원수를 처단하는 일이야.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이번에 황궁에서 역모를 저지르고 도망친 한귀비고, 나머지 3명은 어떻게든 그녀와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 중이야.”
탁지연을 빼고 나머지 세 여인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공주가 물었다.
“그럼 네가 황궁 담을 넘은 건 역모를 밝혀냈기 때문이 아니라 네 개인적인 원수를 찾으려는 거였어?”
“그게 그거지. 내 원수가 역모의 일당이니까 난 목표를 달성하려면 한귀비의 패거리를 전부 찾아내서 처단해야 돼.”
“그게 그거인 게 아니지. 본말이 전도되었잖아.”
“자꾸 따질 거야?”
“아, 알았어. 네가 한귀비 패거리를 잡아야 하니까 네 문도들도 너를 따르라고 명령해. 그럼 다 잘 풀릴 거야.”
탁지연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궁주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저들을 버리고 우리들과 함께 하는 편이 더 나아요. 보아하니, 저들은 궁에서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 같은데, 그 한귀비라는 여자가 보고 금방 알아차리지 않겠어요? 하지만 우리 여섯 사매는 완전히 초면이죠. 게다가 사람 찾아내는 일이라면 절대 남에게 뒤지지 않고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요. 네?”
공주는 당황했다.
기수가 당연히 자기 말에 따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탁지연의 얘기를 듣고 보니 혈매궁과 함께 하는 편이 더 유리한 것이다.
“하, 하지만… 기수 너 혼자서는 한귀비를 제압할 수 없잖아?”
춘매가 말했다.
“왜 궁주가 혼자야? 우리의 매화육궁진이라면 무공이 10배쯤 강한 고수라고 해도 얼마든지 가두고 제압할 수 있어.”
“그런 진법이 세상에 어디 있냐?”
“못 믿어? 그럼 직접 경험해볼래?”
공주는 방금 전 무릎까지 꿇었던 춘매가 다시 팍팍하게 나오자 더욱 화가 나서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오냐! 너희들 오늘 죽었어!”
탁지연과 춘매 역시 일어나 좌우로 갈라서서 합격진의 형태를 갖추었고, 아투사도 공주 옆에 자리를 잡았다.
기수는 탁자를 쾅! 소리 나게 내리쳤다.
“야! 말 좀 하자. 다들 자리에 앉아!”
네 여인은 눈치를 보면서 의자를 제대로 놓고 앉았다.
기수는 탁지연과 춘매를 보고 말했다.
“난 예림을 떠날 수 없어.”
공주는 가슴을 펴고 고개를 높이 들었다.
“다들 들었지?”
기수가 부연설명을 했다.
“한귀비가 살아서 도망갔기 때문에 이제 저쪽의 4명도 나에 대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고 봐야 돼.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존재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예림과 아투사의 경우엔 얼굴과 신분까지 알고 있으니까 더 많이 노출된 셈이지. 만약 내가 예림과 떨어지면 한귀비가 그녀를 찾았을 때 절대로 혼자서 감당해내지 못할 거야. 내 원수들 손에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공주는 자기가 좋아서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서 실망했다.
춘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공주와 아투사를 노려보다가 기수에게 물었다.
“궁주. 저들과 잤어?”
기수는 당당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서, 네 명의 적을 모두 처치할 때까지 예림과 아투사는 나와 동행할 거야. 하지만 우리 셋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어려우니까 사매들도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이번엔 탁지연이 물었다.
“그러니까 궁주. 저들과 잤냐고.”
기수는 목소리에 더욱 힘을 줬다.
“우리 아홉 명이 지혜와 능력을 모으면 한귀비의 패거리가 한꺼번에 덤빈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봐.”
춘매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아! 왜 대답을 못 해? 잤냐고…”
그러자 공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잤다! 그걸 뭐 하러 물어 봐? 척 보면 몰라?”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공주가 나중에 아줌마가 되면 엄청나게 무서울 것 같았다.
침상에선 수동적인 하녀 취향이지만…
그는 얼른 명랑하고도 쾌활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역적을 처단하면 나는 목표를 달성해서 좋고, 너희들은 큰 공을 세우는 동시에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잖아. 어때? 내 제안이.”
탁지연이 대답했다.
“그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네요.”
기수는 살짝 놀랐다.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탁지연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기 생각을 먼저 해주는지…
어쩌면 항상 자신의 입장이 되어 걱정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탁지연 하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홍채의 패턴을 외우기까지 했겠는가.
갑자기 그녀의 아름다운 힙 라인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골반 쪽으로 향하자 탁지연은 허리를 살짝 비틀면서 메롱~! 하는 표정으로 혀를 살짝 내밀었다.
“으으….”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었다.
공주는 둘의 수작을 보고 열불이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혈매궁의 나머지 여인들도 앞의 두 사람 정도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나도 동감이야. 역도들을 모두 처단할 때까지, 아니 기수의 원수 4명을 모두 잡을 때까지 힘을 모으기로 하지.”
기수는 공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선선히 응해주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공주가 말했다.
“자! 이제 결정되었으니까 회의는 할 필요 없는 거지? 너희들은 이만 가 봐.”
탁지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회의는 필요 없지만, 문도들에게 해명은 해줘야지. 그동안 무슨 이유로 어디에 갔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건지, 우리의 적은 누구인지,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하지 않겠어?”
“기어이 데려가겠다는 거야?”
“내가 데려가는 게 아니라 궁주가 문도들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얘기야. 설마 우리 궁주가 그 정도 기본도 못 지키는 남자일까봐?”
기수는 자신의 복장상태를 내려다봤다.
사나이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공주는 어떻게든 기수를 빼앗길 마음이 없었다.
“네 명을 이리 불러 와. 내가 보는 앞에서 만나.”
“그러지 뭐.”
탁지연은 손짓을 했고, 춘매가 일어섰다.
그러자 공주가 당황했다.
“정말 불러오려고?”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조, 좋아.”
기수가 중재에 나섰다.
“금방 다녀올게. 나를 믿고 보내 줘.”
나머지 사매 4명이 자기 정체를 알면 한 바탕 난리가 벌어질 게 뻔했다.
그때 공주가 자기 성질대로 한 마디라도 하면 충돌이 생길 것이고, 지금과는 다른 양상이 펼쳐질 게 분명했다.
2명뿐일 때와 매화육궁진 정원이 다 찼을 때의 사매들은 전력이 단지 3배만 상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주도 마음이 움직였다.
강호의 법도 상 남의 문파 모임에 타인이 기웃거리는 것은 자칫 살인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결례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금방 올 수 있겠어?”
“상황을 모두 설명하는데 한 시진이면 충분할 거야.”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반 시진 만에 끝내고 돌아와.”
“그래 빠르면 반 시진, 늦어도 한 시진 안엔 돌아올게.”
“조, 좋아. 대신 설명만 하고 바로 와야 돼.”
“걱정 말라니까.”
그렇게 해서 기수는 드디어 사매들과의 모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경비병 사이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다시 가발을 쓰고 역용도 한 뒤 탁지연과 춘매를 따라가는데,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숨이 찰 정도였다.
마침내 네 사매 앞에 다다르자 다들 기수를 쳐다봤다.
동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확인할 게 있다더니… 저 여자는 왜 데려왔어?”
기수는 헛기침을 한 번 했고, 탁지연과 춘매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 한 번 맞춰 봐.”
“동창의 끄나풀?”
“그런 거라면 맞춰보라고 하겠어? 우리 모두가 애타게 찾던 사람이야.”
“설마….”
네 사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탁지연이 그런 기수를 팔꿈치로 툭 쳤다.
“후궁전 잠복근무 중도 아닌데 계속 그 흉악한 몰골로 있을 거야?”
“흉악하기까지 해?”
“어쨌거나 빨리…”
“아, 알았어.”
기수가 본래 모습을 보이고 가발을 벗자 추매, 동매, 풍매, 설매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궁주!”
“진짜 궁주 맞아?”
기수는 잽싸게 강기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다들 오랜만이야. 그리고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 떠나서 미안해. 거기엔 사정이 있었는데, 뭐냐 하면…”
“꺄아악!….”
“궁주다!”
기수는 말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여섯 명이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세는 흉포했고, 얼굴엔 분노의 감정이 가득 차있는 것으로 보였다.
기수는 일단 양손으로 얼굴부터 커버했다.
‘때리더라도 얼굴만은…’
그러나 갈퀴처럼 내뻗은 손들은 기수를 구타하는 게 아니라 옷을 벗겨냈다.
기수는 비로소 자기가 너무 쫄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공주 때문에 괜히 이상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서 속상했다.
탁지연이 물었다.
“아까 그 여우같은 계집한테 한 시진 내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이래도 괜찮을까?”
“손에 그걸 잡고 할 소리냐?
“호호호!… 이거 정말 오랜만이네.”
사매들도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바람에 기수가 계속 뒤로 밀렸다.
“야! 줄 서! 차례를 지키라고!”
아무도 기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굶주린, 그리고 분노한 공격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수는 벌 받는다는 생각으로 그녀들의 처분에 몸을 맡겼다.
체벌 당하는 아래쪽도 좋았지만 탁지연과 진하게 나눈 키스도 황홀했다.
입술을 뗀 후 기수가 말했다.
“너희들 정말 보고 싶었다.”
“우리도…”
“나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우리 오랜만에 밤을 불태워보자고!”
“여우와 한 약속은?”
“약속이란 게 늘 지켜지는 건 아니잖아?”
“그건 맞아. 호호호!….”
기수는 사매들을 밀어내면서 양해를 구했다.
“자, 자… 전부 차례가 돌아갈 거니까 서두르지 말고 우선 탁매부터….”
기수는 아까부터 자신을 설레게 하던 탁지연의 힙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