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85
공주가 성 동쪽에 배정된 것은 가장 먼 곳에 보냄으로써 강시와 접할 시간을 최소화 하려는 백무영의 의도였다.
석초도 거기에 맞춰 길안내를 느리게 했다.
마침내 성문을 지나 안으로 진입한 그들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화광이 충천한 것은 성 밖에서부터 봤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길 위에 흥건한 피. 그리고 시체들.
“아아!….”
공주는 수백구의 시신들이 사방에 나뒹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잠시 비틀거렸다.
절륜한 무공을 지녔지만 평생을 황궁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기수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인들끼리 싸우고, 죽고, 팔다리가 잘린 모습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지만, 지금 소주 시내 거리에 널린 시체들은 상황이 달랐다.
노인, 아녀자, 아이들의 시신이 대부분이었다.
도망칠 힘이 부족해서 당한 그들.
머리가 부서지거나 팔다리가 뜯겨나간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이라면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으리라.
“강시… 이놈들을….”
기수는 철창을 휘두르며 몸을 날렸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찾아 헤매는 강시 두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이! 너희들…”
소리를 들은 강시들이 기수 쪽으로 머리를 돌리더니 곧장 달려왔다.
이전에 만났던 놈들과 비교해 보면 몸놀림엔 차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태도는 상당히 호전적으로 보였다.
아마 강시를 부리는 자가 그런 식으로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기수 입장에선 놈들이 달려드는 게 반가웠다.
정신을 집중하고 철창 쥔 손에 힘이 잔뜩 주어 연달아 두 번의 찌르기.
퍽!, 퍽!
강시 두 마리는 뭔가 해볼 틈도 없이 머리가 박살 나 버둥거렸다.
기수는 놈들의 어기적거리는 몸에 볓 번 더 창을 찔러 넣었다.
그들이 이성도 의지도 없는 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을 대신해서 분풀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질기고 단단한 강시의 몸이지만, 기수의 진기 실은 창은 거침없이 푹, 푹 파고들었다.
문제는 창이 체액에 닿아 흰 연기를 낸다는 점이었다.
“젠장! 더러운 새끼들.”
기수는 창날을 놈들의 옷에 닦은 후 창대로 다리를 후려쳐서 부러뜨려버렸다.
뼈가 아니라 쇳덩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공주와 석초 일행이 달려와 합류했다.
그리고 때마침 길 맞은편에서 강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 너희들 다 죽었어!”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간 사람은 공주였다.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극심한 분노를 느낀 것이다.
조백호와 아투사는 그녀가 걱정되어서 즉시 따라붙었고, 석초도 쓰러진 두 강시의 처리를 부하들에게 지시한 후 가세했다.
기수는 잠시 남아서 뱡사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이전에 상주에서도 봤지만 그들이 머리 부서진 강시 다루는 솜씨는 능숙했다.
400마리를 잡았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무영 형님도 골치 아프겠군.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강한 놈들이 이렇게 떼거지로 나타났으니…’
기수는 철창을 빙그르 한 바퀴 돌린 후 전투현장으로 갔다.
상황은 1강 3약.
공주는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강시들을 제압해 나갔다.
아투사와 조유와 석초는 공주에 비하면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각자 한 마리씩 맡아 싸우면서 계속 우세를 점하고는 있는데, 정타로 머리를 깨부수는데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세 명 중 아투사가 가장 먼저 성공했고, 조백호와 석초가 뒤를 이었다.
석초는 자기가 환관보다 늦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다음 번 강시엔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는 사이 강시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동료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듯 했다.
그들은 수적 우위를 살리려고 모이는 것이지만, 기수와 공주 입장에선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고마운 일이었다.
기수가 적극적으로 가세하자 상황은 오래지 않아 종결되었다.
아투사와 조유, 석초가 두 번째 강시를 쓰러트리기도 전에 공주와 기수가 나머지 강시들을 전부 다 처치한 것이다.
두 번째 강시를 제압한 순서는 아투사, 석초, 조유였다.
석초의 무공이 동창의 백호보다 고강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강시를 처리하는 기술만큼은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었다.
기수가 공주에게 말했다.
“남문 쪽으로 가자.”
“좋아.”
담당구역의 강시는 다 처리했지만 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혈매궁이 맡은 북문 쪽, 백무영이 맡은 서문 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문으로 가자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이 경공을 펼치자 조백호와 아투사도 곧바로 따라왔다.
석초는 마무리 작업을 지휘해야 하기에 현장에 남았다.
남문으로 가는 도중에 기수와 공주는 약탈 중인 일월신교 패거리들을 만났다.
공주가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너희 둘은 저것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인 후에 따라와.”
평소보다 감정이 강하게 배어 있는 어조였다.
거리에 널린 백성들의 시신을 본 후 정신적으로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아투사와 조백호는 즉시 갈라져서 일월신교 교도들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무공이 강시를 일발 제압하기엔 약간 부족함이 있지만, 상대가 일월신교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렇게 역할을 분담한 기수와 공주는 오래지 않아 남문 쪽의 강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백무영 휘하의 장군부 무사들이 맞서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강시의 수는 별로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기수와 공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기수는 첫 번째 강시의 머리에 정확하게 철창을 꽂아 넣었다.
그런데 창끝이 미끄러지면서 관통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체액에 창날이 녹아서 끝이 무뎌진 것이다.
기수는 뒤로 휘청거렸다가 달려오는 강시를 발로 차서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철창의 중간이 아닌 자루의 맨 끝을 두 손으로 잡고 점프했다가 떨어져 내리면서 장작 패듯 철창 전체를 풀 스윙으로 내리꽂았다.
퍽! 소리와 함께 강시의 정수리가 ‘V’자 모양으로 함몰되면서 머리가 몸통 속으로 반 이상 잠겼다.
기수는 착지 후 횡으로 다시 스윙을 했다.
한가운데 몰린 직구를 때리는 슬러거의 레벨 스윙과 비슷했다.
정수리에 금이 가서 구조가 약해진 강시의 두개골은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주변에 체액이 튄다는 게 문제였지만, 시각적으로나 손맛으로나 아주 즐거웠다.
기수는 다음 강시도 철창을 몽둥이 삼아서 박살냈다.
창날에 똑같은 문제를 겪은 공주도 곧 그 모습을 보고 따라했다.
기수는 장군부 무관들에게 말했다.
“위험하니 잠시만 물러나시오!”
장군부의 자존심으로, 동창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듣고 순순히 따르는 것은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세가 워낙 무시무시하다 보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기네는 한 마리 잡는데도 한참이 걸리고, 반격과 부상에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아닌데, 두 사람은 몽둥이로 개 때려잡듯 하고 있는 것이다.
서너 걸음 물러섰던 장군부 무관들은 쇠도 녹이는 녹색 체액이 퍽! 퍽! 거리며 튀기자 아예 멀찌감치 뒤로 후퇴했다.
강시들은 주변에서 가장 큰 위협을 우선 타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는지 장군부 무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기수와 공주에게만 달려들었다.
기수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었다.
장작 패기와 레벨 스윙에 이어서 골프 스윙으로 턱을 날리기도 하면서 아주 제대로 손맛을 즐겼다.
결국 남문 쪽의 강시들도 오래지 않아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때 어디선가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강시들이 갑자기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달아나려고?”
기수와 공주는 따라가면서 기어이 놈들의 대가리를 전부 부숴버렸다.
장군부 무관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동창이라고 해도 솔직히 너무 대단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수는 그들에게 손짓을 해 보인 후 근처의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갔다.
방울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함이었다.
누군가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강시가 다 죽게 되자 아까운 마음에 퇴각명령을 내린 모양인데. 그건 기수와 공주의 무공수준에 대한 판단착오였다.
공연히 자기 존재만 드러낸 것이다.
뒤따라 지붕으로 올라온 공주가 서쪽을 가리켰다.
“아까 저 쪽에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가보자!”
기수는 기감을 바짝 끌어올린 상태로 전방을 주시했다.
방울을 흔든 자는 강시들을 자유자재로 부릴 능력이 있는 자일 것이고, 대대적인 동원 규모로 봤을 때 어쩌면 강시를 만든 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일정 간격으로 벌려 접근했지만 수상한 기척은 없었다.
건너편 지붕 쪽에서 살피던 공주가 다가와 말했다.
“없는 것 같은데? 그 사이 도망쳤나 봐.”
기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냐. 강시를 구해내려고 한 걸 보면 깊은 애착을 가진 게 분명해. 그렇게 쉽게 이 장소를 뜨지는 않았을 거야. 내려가서 좀 더 자세히 뒤져보자. 틀림없이 나올 거야.”
공주는 기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건물을 하나씩 뒤지며 이동하자 한 순간, 급격한 진기 응집이 느껴지면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저쪽이다!”
기수와 공주는 즉시 도망자를 추적했다.
상대의 무공은 예상 밖으로 고강해서 공주는 좀처럼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그러나 기수는 달랐다.
선풍비 덕분에 조금씩 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도망자는 꽤 큰 키에 깡마른 체형으로 검정색 장포와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엔 검은 두건을 썼는데 힐끔 돌아보는 얼굴은 붕대가 감겨 있고 눈만 노출된 모습이었다.
기수는 호통을 쳤다.
“거기 서라! 이 미이라 새끼야!”
상대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기수는 선풍비에 더욱 집중했고, 간격을 더욱 좁힐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보통 놈은 아닐 거야.’
제대로 꼬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다!’
기수는 뛸 듯이 기뻤다.
한귀비를 잡으러 온 곳에서 다른 사도를 만날 거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햇다.
게다가 하는 짓이나 행색을 보아하니 강시들과 연관이 있는 놈 같았다.
‘잘 하면 한귀비까지 함께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일석이조, 일거양득, 일타쌍피, 마당 쓸고 돈 줍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었다.
커피가 떨어져서 마트에 사러 갔는데 마침 1+1 할인행사 중이었다고나 할까.
한귀비가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다른 사도를 만나 향후 대책을 의논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의 붕대 사내가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 역시 존재감을 느낀 게 분명했다.
기수는 불현듯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한귀비가 은혈대법을 펼치면 나 혼자서는 버거울지도 모른다. 그동안 음양대법을 열심히 연마하긴 했지만…’
물론, 뒤따라오는 공주가 가세한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붕대 사내가 한귀비 정도의 고수라면 2:2 싸움에서 밀릴 수 있는 것이다.
기수는 사내가 한귀비와 만나기 전에 처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파천강기 수십 발을 사내의 뒤꿈치와 종아리 근처로 날려 보냈다.
파파파파팍!….
“크윽!….”
사내는 스텝이 완전히 엉클어지면서 자빠졌다.
그러나 곧바로 몸을 회전시키며 굴러 기수와 마주보는 자세를 취했다.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대응은 기수를 놀라게 했다.
특히, 파천강기에 적중된 두 발이 멀쩡하다는 게 의외였다.
구멍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튈 거라 예상했는데, 서 있는 자세로 보니 타격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기수는 순간 한 사람을 떠올렸다.
‘멸천제!’
갑옷 같은 강기로 몸을 보호해서 자신을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상대.
청탑산 사범의 기억에 그 투명갑옷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지금 이 붕대 사내도 멸천제처럼 파천강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방어해낸 것이다.
“누구냐… 넌.”
사내의 목소리는 몹시 거칠고 탁했다.
기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편 후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누구인지 알 텐데. 후후…”
그러나 에러였다.
얼굴에 복면을 쓴 상태라 미소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역용상태라 여자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혹시…. 귀비의 계획을 망쳐버린 계집이냐? 공주 옆에 있었다던?”
“젠장!”
역시 저쪽에 모든 정보가 알려진 상태.
그렇다면 자신의 목적달성뿐만 아니라 공주의 안전을 위해서도 이 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붕대 사내는 오른손을 올려 자기 가슴에 얹고 원을 그리며 말했다.
“주군의 적이란 바로 이런 느낌이었군. 흐흐흐….”
그때 파공음과 함께 공주가 붕대 사내의 뒤쪽으로 내려섰다.
“늦어서 미안.”
붕대 사내 역시 얼굴이 가려져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흠칫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기수와 공주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기수가 공주에게 말했다.
“조심해. 한귀비의 일당이야. 내 목표이기도 하고.”
공주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방심할 수 없지.”
그녀는 즉시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