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86
공주가 내공을 집중하자 그녀 주변의 수풀들이 바람에 휘감겨 올라갔고 옷자락 역시 부풀어 올랐다.
기수도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붕대 사내는 당황한 기색으로 좌우를 살폈다.
“도망갈 길을 찾는 것이냐?”
기수의 물음에 그는 냉소를 지었다.
“흥! 무슨 헛소리냐. 나 사득공은 오늘 이때까지 싸움에서 등을 보이고 도망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 부디 그 자세를 잊지 말기 바란다.”
기수가 보기에 그의 말은 헛소리였다. 이미 두 발의 형태가 100미터 달리기 준비, 차려, 땅! 중에서 차려까지 가 있는 상태였다.
하긴, 한귀비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2:1 싸움에 목숨 걸 이유는 없다고 봐야 했다.
기수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공주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날려 사득공을 공격했다.
두 자루 철창을 맞아, 사득공은 쌍장을 요란하게 휘둘렀다.
그 장법 역시 청탑산 사범의 기억엔 없는 것이었다.
그의 손은 몹시 크고 손가락도 길었다.
그리고 철창을 맨손으로 쳐내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기수는 철창에 닿는 느낌을 통해 멸천제와의 차이점을 발견했다.
‘이건 투명 갑옷을 칠 때의 느낌과는 다른데?’
강기 운용 없이 맨몸으로 견뎌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었다.
순식간에 십여 초식이 교환되면서 쌍방의 실력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다.
사득공은 두 사람의 협공을 당해낼 능력이 없었다.
열세를 확인한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겼다.
“우리가 굳이 싸워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흐흐흐….”
기수와 공주는 당황했다.
다음 차례는 당연히 은혈대법을 끌어 올릴 거라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종이로 싼 아이 주먹만한 뭉치가 공중에 떠오른 것이다.
“뭐 하자는 수작이냐?”
공주가 철창을 휘두르는 순간, 종이로 둘러싸인 내용물이 퍽! 소리를 내며 터졌다.
기수는 깜짝 놀라 공주 앞을 가로막았다.
녹색 가루들이 안개처럼 확! 퍼져 나왔는데, 그 냄새가 익숙했다.
바로 강시의 체액 냄새였고, 액체일 때보다 훨씬 짙었다.
기수는 그 가루가 몸에 닿아서 좋을 일 없다는 판단을 했고, 공주를 안은 채 선풍비를 시전하여 신속히 현장을 벗어났다.
공주도 그 냄새를 기억해내고 몹시 놀란 기색이었다.
기수의 민첩한 대응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쇠도 녹이는 물질에 온몸이 노출될 뻔한 것이다.
“이 나쁜 자식!”
공주는 철창을 고쳐 쥐고 사득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달아 퍽! 퍽!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주변은 온통 녹색 가루에 뒤덮였다.
“크흐흐…. 다음에 다시 만나자.”
사득공은 그 소리만 남긴 채 이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수와 공주는 바람 방향을 살핀 후 녹색 독 가루를 우회하여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런 뒤에는 이미 사득공을 따라가기 늦은 상황.
방향을 가늠하여 성벽 있는 곳까지 가보았지만 종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공주는 발을 굴렀다.
“말도 안 돼. 이런 식으로 도망치다니!”
기수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오징어냐? 문어냐? 치사한 새끼.’
먹물 뿌리고 도망치는 전술이 꼭 연체동물 수준이었다.
사도와 마주쳤는데 이런 식으로 상대가 달아나는 건 또 처음이었다.
기수는 일단 공주를 밝은 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 옷에 녹색 가루가 묻지 않았는지 찬찬히 살폈다.
공주도 기수의 옷을 살펴보았다.
“넌 아무래도 옷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
기수가 공주 앞을 가로막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몇 군데 묻은 자국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근처의 상점을 찾아 적당한 크기의 옷을 찾아 갈아입고 주인 없이 빈 계산대 아래 은자 하나를 놔두고 나왔다.
공주가 기수에게 말했다.
“고마워!”
“뭐가?”
“급박한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걸 보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어. 전에 말로 했을 때는 왠지 믿기지 않았거든.”
의외로 예리한 구석도 있다.
“하핫! 난 속에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냐. 언행일치 몰라?”
“사랑해. 넌 내 생애 유일한 남자야.”
“응. 나도…”
“너도 뭐? 얼버무리지 말고 정확하게 애기해 봐.”
기수는 여자들이 이런 것만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냐?”
“말로 듣고 싶어.”
“말보다 마음과 마음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게 중요한 거야.”
“아냐. 말도 중요해.”
집요하다.
“나도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네가 내 생애 유일한 여자가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잖아?”
“쳇!…”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이 귀여웠다.
기수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수선한 전쟁터 분위시지만 잘 하면 진하게 키스할 타이밍 정도는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공주의 안색은 경직되고 있었다.
“그 놈이 도망쳐서 한귀비를 만났다면 우리가 쫓아온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럼 또 도망칠 텐데 어쩌지?”
기수는 입맛을 다신 후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또 쫓아가는 수밖에…”
“아! 아까워. 거의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조급해 하지 마. 천하가 아무리 넓어도 그녀가 숨을 곳은 없어. 이번에 확실히 증명이 됐잖아?”
그러나 공주는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만약 한귀비가 단검을 버리면? 그러면 우린 방법이 없게 되는 거잖아?”
“그녀가 그걸 왜 버리겠어?”
“우리가 너무 빨리 쫓아왔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돌아볼 수도 있잖아.”
“강시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아! 화 나… 아아! 짜증 나!”
기수는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힘의 우열을 확인한 이후의 그녀는 더 이상 구타를 시도하지 않았다.
기수가 성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저 위에 올라가서 기다려보자. 혹시 놈이 한귀비를 데리고 싸우러 올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은 성벽 위로 올라가 밖을 바라보았다.
전기가 없는 시대의 야경은 참 적막한 느낌이었다.
대신 달과 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았다.
공주가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둘이 한꺼번에 덤비면 우리가 지는 거 아닐까?“
“그러지는 않을 거야.”
“너 혼자서 한귀비 상대로 이길 수 있어?”
“글쎄… 우리 그동안 열심히 연공했잖아?”
“하지만 사득공까지 가세하면…”
“그놈은 은혈대법을 쓸 줄 몰라.”
“어떻게 알아?”
“사용하는 장법부터 다른 사도들과 유파를 달리 하는 것 같았어. 아까 독 가루를 터뜨리고 도망칠 때도 움직임이 처음과 비슷하더라고. 만약 은혈대법을 익혔다면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데 안 썼을 리가 없지.”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철창을 꼭 쥔 채 전방을 노려보며 한귀비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아!… 아무래도 도망친 것 같아.”
“일단 아투사를 만나서 확인해보자.”
두 사람은 머리 잃은 강시 처리 중인 장군부 사람들에게로 갔고, 거기서 조백호와 아투사를 만날 수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놈들을 모조리 처치했어요. 언니.”
조백호보다 아투사가 먼저 나서서 자랑하듯 보고했다.
하수들과 싸우니까 강시들을 상대할 때보다 조백호와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녀로서는 몹시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공주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손짓으로 두 사람을 문짝이 뜯긴 빈집 마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조백호에게 먼저 지시했다.
“너. 즉시 가서 장원에 대한 정보 수집 결과를 전부 집계해서 가지고 와.”
“알겠습니다!”
조백호가 움직이자 공주는 아투사에게 지시했다.
“한귀비의 방향을 찾아 봐. 지금 즉시.”
“잠시만 기다려요. 언니.”
아투사는 고른 땅을 찾아 주문을 외우고 보석으로 방향을 잡았다.
공주와 기수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이면 서문인가?”
공주는 바로 달려가려 했지만 기수가 붙잡아 앉혔다.
세 사람은 잠시 물을 마시고 쉬면서 조백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조백호는 반 시진도 안 되어 커다란 지도 한 장을 가지고 왔다.
탁자에 펼친 소주성 지도에는 여기저기 점이 찍히고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이게 저희가 조사한 내용입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가 강시들이 나온 곳입니다.”
공주는 지도 위에 패철을 꺼내 놓고 남북을 맞추었다.
“지금 우리 위치가 어디지?”
“여깁니다.”
공주는 조백호가 짚은 자리에서 아까 아투사의 보석이 가리켰던 쪽을 향해 검지로 선을 그었다. 그러자 한 장원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다! 한귀비는 여기 숨어 있어!”
공주는 곧바로 철창을 잡더니 경공을 시전하여 달려 나갔다.
한귀비가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오로지 한 생각뿐이었다.
기수는 아투사에게 턱짓을 했다. 아투사는 즉시 알아차리고 공주를 따라갔다.
“언니! 같이 가요!”
기수는 조백호를 붙잡고 말했다.
“역도들이 숨어 있는 장원이 바로 여깁니다. 즉시 백시랑을 찾아가서 모든 병력을 이곳으로 집결하라고 부탁하십시오. 이건 강시보다도 중요한 일이고, 동창과 장군부의 알력보다도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아시겠지요?”
“아, 알겠….다.”
말꼬리가 애매하게 맺어졌다.
기수와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분으로 따지면 동창의 백호와 궁녀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크지만 워낙 고수이고, 공주의 최측근, 심지어는 목욕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기에 말을 함부로 하기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조백호가 비록 말은 얼버무렸지만 행동은 빨랐다.
일의 중요성을 감지한 것이다.
기수는 그를 보낸 후 선풍비를 시전하여 지도에서 익힌 곳을 향해 달렸다.
서문에서 북쪽으로 약간 올라간 대로변의 장원.
순식간에 아투사와의 간격을 좁힌 기수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경공을 펼쳤다.
“어머!”
아투사는 내려달라고 바동바동 거렸지만 기수는 공주를 따라잡은 다음에야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공주는 장원 정문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듣기 거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기수는 그 소리의 정체를 곧 알아차렸다.
수십 마리의 강시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소리로 짐작하기엔 사오십 마리쯤 될 것 같았고, 그들의 지독한 악취가 문 너머까지 풍겨왔다.
기수는 철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호위병을 전부 푼 모양이군. 좋아! 기꺼이 한 판 놀아주지.”
그리고는 달려들어 장원의 정문을 힘껏 걷어찼다.
철판을 댄 육중한 나무문이 넘어지면서 정원의 정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세기에 60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강시들이 동시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씨발!”
기수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왔다. 이 정도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도 은근히 겁나는 일이었다.
“끝까지 치사하게 나오는구나. 사득공. 오냐! 열렬한 환영에 감사한다!”
기수는 철창을 휘두르며 강시들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전에 싸울 때는 창대의 끝을 잡고 풀스윙을 했지만 지금은 마당에 조밀하게 모여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창의 양 끝으로 쳐내서 간격부터 확보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에워싸이고 보니 강시의 수가 너무 많았다.
“괜찮아? 다친 거 아니지?”
포위망 밖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기수는 특공대가 건물 내부에서 총격전을 할 때 소총보다는 기관단총이나 권총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앞뒤 안 가리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강시들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보니까 창은 정말 거추장스러운 무기였다.
기수는 좌우의 강시들을 밀어낸 후 파천강기로 철창의 중간을 잘랐다.
그렇게 두 개의 쇠몽둥이로 나누어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나자 상황은 바뀌었다.
“덤벼! 이 개새끼들아!”
시체를 개에 비유하고 나니까 개한테 좀 미안했다.
어쨌거나 압박감을 한 순간에 벗어낸 기수는 강시의 대가리를 연속해서 깨부수기 시작했다.
두 손 풀 스윙으로 수박 깨트리던 통쾌함은 없었다.
하지만 짧은 대신 손바닥에 전해지는 느낌은 더 좋았다.
‘역시 파천강기보다는 직접 깨부수는 편이 감정 이입이 잘 돼.’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에 부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해도 내공소모는 파천강기보다 덜하니까 여러모로 나은 선택이었다.
특히 체액이 덜 튀어서 주변에 피해 입힐 일이 없다는 게 좋았다.
그렇게 공주와 힘을 모아 강시들을 쓰러트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원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흔적을 지우고 도망칠 생각이구나!’
기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