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01
합비는 놀란 눈으로 기수를 봤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
“하핫!… 그, 그러게 말입니다.”
합비는 여덟 명의 미녀들을 차례로 둘러봤다.
저마다 독특한 매력. 비록 남자 옷을 입고 있다 해도 빼어난 미모를 감출 수 없었다.
합비는 기수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이 소저들 전부하고 사귀는 거냐?”
“이, 일단은 그렇습니다.”
“너 이놈…. 대단하구나!”
합비는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는 오행류를 대성하고 일생 동안 강호행을 함에 있어 안 해본 일이 없고 이루지 못한 일이 없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못했다.
여자 한 명 비위맞추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도대체 여덟 명과 어떻게 함께 다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탁지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르신. 젊은 시절 얘기 좀 해주세요.”
그러자 다른 사매들도 졸랐다. 기수에게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합비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아홉의 고비에 묶여 있는 기수에게 몹시 중요한 조언을 해 줄 고수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다.
합비는 탁지연이 따라 올리는 술 한 잔을 받아 마시며 허허! 웃었다.
아리따운 손녀 여덟 명이 한꺼번에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젊은 시절 강호에서 활약한 얘기라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손자와 증손자들에겐 할만한 게 못 되었다.
그러나 같은 무림인이라면 거리낄 게 없었다.
그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자기 자랑이 절반쯤 섞인 옛날 강호 얘기를 꺼내자 사매들 모두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기수는 그 모습을 보며 마치 할아버지에게 옛날 얘기를 조르는 손녀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 경우엔 할아버지 쪽이 더 원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의 무용담은 기수도 처음 듣는 게 많았다.
삼태공과 환우구종에 얽힌 얘기들로 접어들자 기수도 푹 빠져 듣게 되었다.
합비가 중간에 얘기를 끊고 기수 쪽을 돌아봤다.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모르고 술을 한 동이만 가져왔더니 벌써 떨어졌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넉넉히 좀 가져와.”
“알겠습니다. 그 동안 하시던 얘기 잠시 멈춰주셔야 합니다.”
“좋아. 기다리는 동안 네 얘기를 이 아이들 입장에서 듣고 있도록 하지.”
기수는 자리를 비우기 싫었다.
그러나 촌장이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합비와 자신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선풍비를 시전했다.
동네마다 24시간 편의점이 있는 도시를 그리워하며, 그는 눈 깜빡할 사이에 촌장 네 집에 도착했다.
‘자정이 가까운 깊은 밤인데 다들 자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을 두드리려는 참에 서쪽 하늘이 벌겋게 변한 것이 보였다.
구름에 비쳐 보일 정도면 꽤 큰 불이 난 게 분명했다.
‘저쪽에도 도시가 있었나?’
기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쪽은 무림맹 진영이 있는 방향이었다. 거리도 얼추 비슷한 것 같았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술은?”
합비는 그의 손부터 살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희들은 급히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 어디를?”
“무림맹 진영이 습격당한 것 같습니다.”
“무림맹? 그들은 난주로 갔을 텐데.”
“남아 있는 병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긴 보급이나 후발대를 관리하려면….”
탁지연이 말했다.
“뒤를 끊어 보급로를 막는다는 건 본진이 위험하다는 뜻 아닌가요?”
기수는 비령검문과 보타문을 떠올렸다.
자신은 혈매궁의 궁주이지만 비룡검문의 호법이란 자리에도 역시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무림맹의 후기지수 모임인 용봉련의 련주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저는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매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함께 가요. 궁주.”
합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가 벌어졌다면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술은 나중에 마셔도 되니까 다녀들 와. 난 저쪽 집에 가 있을게.”
사매들은 급히 죽립 눌러 쓰고 무기 챙겨 들고 기수를 따라 나섰다.
경공을 펼쳐 합가촌을 벗어나자 화염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마음이 급해진 기수의 발걸음은 계속 빨라졌고, 그에 따라 함성과 기합, 비명,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기수는 뒤섞인 무리의 차림새를 보고 삼황맹과 녹림72채가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는 천마교 무리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다.
양측이 섞였다는 것은 사마연합이 다시 공고해졌음을 의미했다.
무림맹 입장에선 득 될 게 없는 상황.
기수는 내공을 끌어올리고 양손을 활짝 펼친 후 사마연합 무리를 향해 잔백지를 쏘기 시작했다.
퓩! 퓩! 퓩! 퓩! 퓩!
짧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 때마다 적은 힘없이 쓰러졌다.
저마다 드러낸 각도에 따라 마혈 혹은 수혈을 찍힌 것이다.
십여 미터마다 한 번씩 발을 디디며, 마치 학처럼 도약하는 그의 모습은 뒤를 따르는 사매들이나 무림맹 사람들에게 흡사 천신처럼 보였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로 사마외도 무리가 한꺼번에 대여섯 명에서 많으면 십여 명씩 무너지는 모습도 믿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기수는 애당초 내공을 아끼기 위해 파천강기가 아닌 잔백지를 쓴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위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동안 오행류에 집중해서 연공했을 뿐, 잔백지를 사용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위를 밀어 올리다 보니까 아래쪽은 저절로 함께 올라온 느낌이었다.
사매들은 검을 써 볼 기회조차 없이 기수를 따라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무림맹 본진에 이르렀다.
커다란 장원. 문은 부서지고 건물들은 불타고 있었다.
대형 연무장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사마연합이 노리는 것, 그리고 무림맹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바로 수백 대의 마차에 실린 군량이었다.
도열한 모습을 보니 병력과 함께 난주로 갈 준비를 마친 상태인 것 같았다.
그 중 상당수에 불이 붙었고, 수적으로 훨씬 우위인 사마연합 병력이 무림맹을 압박 중이었다.
기수는 무림맹의 구성원부터 살펴보았다.
눈에 익은 문파의 무복과 도복들이 보였고, 아는 얼굴도 몇 명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룡검문이나 보타문은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고수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주력이 모두 난주로 갔기 때문인 듯 했다.
그와 반대로 사마연합 측엔 눈에 확 띄는 고수가 두 명 있었다.
바로 암천제와 그의 여동생 자영이었다.
사방에 널린 사상자들의 위치로 보건데, 처음엔 무림맹이 숫자에서 밀리지 않았는데 암천제와 자영 때문에 열세로 기울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수는 그들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웬 놈이냐!”
“막아라!”
그러나 상황은 이제까지와 똑같았다.
도약한 기수가 열 손가락을 뻗을 때마다 연속되는 짧은 파공음과 함께 사마연합 무리는 무너져 내리기 바빴다.
대치하고 있던 양측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놀랐다.
마교는 갑자기 나타난 고수의 무서운 신위에 겁을 먹었고, 무림맹은 자신들을 돕는 사람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기쁘지만, 그게 누구인지 몰라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때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기수다! 기대협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다른 사람들도 알아보고 소리쳤다.
“맞다! 홍안산의 함정에서 우리를 빼내준 기소협이다!”
기수가 제갈세가의 함정에서 무림맹을 구한 일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시 무림맹의 고위직 간부도 많았고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기수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무림맹 진영은 곧바로 환호했다.
마교 삼천제 중 한 명인 암천제의 출현은 함양 주둔 무림맹에겐 악몽이었다.
책임을 맡은 고수들이 연달아 목숨을 잃으면서 방어용 기문진들도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난주로 간 본진이 돌아와서 구해줄 가능성도 없는 상황.
결국 여기서 목숨을 잃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절망적일 때에 기수가 나타난 것이다.
암천제는 자기 부하들을 무너뜨리며 접근하는 기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령인 구혈이 기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멈춰라!”
기수는 상대가 상당수준의 고수임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잔백지를 잡중했다.
구혈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지풍을 칼로 모두 쳐낸 것이다.
기수는 상대가 낯익은 얼굴임을 알아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너 정도라면 직접 손을 사용해주마.”
바짝 간격을 좁힌 기수는 분광권으로 구혈과 맞섰다.
구혈의 칼은 소름끼치는 파공음을 흘리며 기수의 요혈로 파고들었지만 기수의 맞대응에 손목이 비틀리고 말았다.
구혈은 손목이 부러지는 대신 칼을 버리는 선택을 했지만, 그로부터 눈으로 따라가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이어지는 공격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가슴에 순간적으로 5연타를 맞으며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뒤로 날아갔고,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미 공중에 떠오르기 전에 점혈을 당한 것이다.
기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 봤다.
분광권의 분광이란 빛을 나눈다는 뜻.
그만큼 빠르고 화려하게 초식을 펼칠 수 있다는 뜻인데, 이제까지는 그게 비유적 의미라고만 생각했다.
현대에서 배운 지식으로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애당초 표창이나 화살, 총알이라면 몰라도 빛을 가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내공이 깊어진 지금 펼치는 분광권은, 적어도 기분상으로는 빛이라도 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남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했던 그 수많은 노력들이 헛수고가 아니었구나.’
기수는 전방에 강력한 살기가 집중되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암천제가 내공을 잔뜩 끌어올리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다!”
부하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직접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작전이 거의 다 성공단계에 도달했는데 훼방꾼 때문에 망치고 싶지는 않을 것이었다.
기수는 염천제보다 그의 뒤쪽에 있는 두 여인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자영과 한백랑.
그녀들은 불신의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들과 뜨거운 운우의 정을 속삭이던 그 남자인데 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수는 그녀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얼굴을 숨기고 속이는 건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암천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어디를 보느냐!”
여동생을 챙기려는 오빠의 마음일까. 기수는 그에게도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쏘리. 이미 먹었다.’
구조적으로는 남자가 여자한테 먹히는 거지만… 어쨌거나.
암천제는 손짓으로 자영을 물러나게 한 뒤 쌍장에 내공을 집중했다.
기수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닥쳐라!”
암천제는 기합을 내지르며 공격을 시작했다.
기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멸천제보다 못하다고 해도 천마교 삼천제 중의 일 인.
여유를 부릴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기수는 그의 공격을 분광권으로 낱낱이 막아냈다.
조금 전 구혈과 대결하면서 워밍업을 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분광권은 본 게임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상대가 강한 만큼 제대로 집중할 수 있었다.
사매들과 무림맹, 그리고 사마연합 사람들 모두 두 사람의 대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암천제의 실력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패도적인 장법을 쉴 틈 없이 연달아 펼쳐내며 기수를 몰아붙였다.
반면, 기수의 움직임은 극히 작고 절제되어 있었다.
보법의 간격은 짧으면서 민첩했고, 두 손도 꼭 필요한 최소한의 길이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어찌나 빠른지, 암천제의 공세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얽히면서 나오는 타격음은 거의 기관총 쏘는 소리처럼 간격이 짧게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그런 극도의 집중상태를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운 법.
결국 초수가 늘어나면서 두 사람의 우열은 갈리기 시작했다.
암천제는 자신이 밀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상대는 계속 수비만 하는 상태인데, 어찌된 일인지 자기가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낀 암천제는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품 안에 넣었다가 꺼낸 그의 손에는 둥그런 링 모양의 금속 무기가 들려 있었다.
바로 그의 독문병기인 혈마권(血魔圈)이었다.
기수는 그 링에 잔가지처럼 달린 뾰족한 돌기들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맨손은 위험할 수도 있겠는 걸.’
그러나 검을 뽑기도 전에 예기가 온몸을 난도질 해 왔다.
“젠장!”
기수는 상대의 파워와 살상력이 한꺼번에 업그레이드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급히 뒤로 물러서며 간격을 벌렸는데 암천제는 모처럼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들어왔다.
기수는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상대의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를 막아냈다.
그러나 한 순간 옷자락이 잘려나가고 말았다.
기수는 선풍비로 거리를 멀찍이 벌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고 여유를 찾은 뒤 다시 자세를 낮추었다.
“좋아. 제대로 해보자!”
그가 진기를 끌어올리자 주변에 한바탕 흙먼지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