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02
암천제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공을 집중했다.
혈마권의 공세를 벗어난 기수의 민첩한 신법을 보고 무공 깊이를 짐작한 것이다.
그의 진기가 두 자루 혈마권에 집중되자 링 전체가 피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동시에 근처의 땅바닥이 쩍, 쩍 갈라졌다.
혈마권에서 뻗어 나온 예기가 닿지도 않은 흙을 파헤칠 정도였던 것이다.
기수도 상대가 그 정도의 기세를 보이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의 호신강기는 좀 약한 느낌이었지?’
기수는 목류, 즉 파천강기를 변형시킨 호신강기로 바꾸었다.
단번에 전혀 다른 성질의 내공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북궁심범 덕분이었다.
순간적으로 기수의 몸에 은은한 청색 광채가 번지자 연무장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무림맹 측이건, 마교 측이건 이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은 붉은 빛, 한쪽은 푸른 빛을 발하는 고수들의 대치.
그것은 평생 두 번 보기 어려운 진귀한 일이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먼저 움직인 쪽은 암천제였다.
그의 혈마권은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붉은 광채를 연달아 뿜어냈다.
기수는 양손을 교차한 후 내공을 집중하여 그 강기를 막아냈다.
파지직! 파팟!
강기와 강기가 격돌하며 격렬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고, 기수는 힘에 못 이겨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
“내가 질 것 같으냐!”
기수는 내공을 더욱 끌어 올리며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상대와의 간격이 좁혀지자 분광권(分光拳)으로 암천제의 혈마권(血魔圈)에 맞섰다.
쨍! 쨍! 쨍! 쨍!
암천제는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혈마권은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맨손으로 그것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에서 팔꿈치까지 파란 빛에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금속 날을 막아낸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기수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해라.”
“미친 놈!”
암천제는 더욱 강력한 공격으로 기수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오버페이스.
기수의 도발을 참아내지 못하고 먼저 극한에 도달한 그의 상태는 마치 드랙 레이스에서 최대 토크 회전수에 도달하기 전에 성급히 기어 변속을 한 머신과 같이 되고 말았다.
자기보다 약하거나, 아니면 비슷한 상대와 싸울 때라면 그렇게 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상대는 기수였다.
암천제가 혈마권을 쓰면서부터 그의 기도를 마치 손으로 잡듯이 면밀하게 읽어내던 기수는 상대의 상태를 정확히 감지하고 응징을 시작했다.
암천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자신의 공격 뒤에 이어지는 비틀림.
그것은 처음엔 미약했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깊이 자신의 투로를 방해했다.
암천제는 어떻게든 그 꺼림칙한 비틀림을 떨쳐버리려 했다.
그러나 운룡비결의 청, 합, 반은 절대 만만한 수법이 아니었다.
암천제 정도의 고수라도 한 번 걸려든 이상 허점을 드러내지 않고 떨쳐내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무리한 동작이 이루어졌고, 차분하게 기다리던 기수는 그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크윽!….”
기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잡았다!’
맹독을 지닌 코브라를 막대기로 놀리다가 목을 콱! 움켜쥔 느낌.
암천제는 그 명성과는 달리 허망한 모습으로 무너져 내렸다.
두 자루 혈마권 사이로 교묘하게 파고든 기수의 손가락에 마혈을 찍힌 것이다.
그가 쓰러지자 무림맹 진영에선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마교 진영은 경악성과 탄식으로 얼룩졌다.
천마교 측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보라색 궁장을 입고 금장식, 은장식으로 한껏 꾸민 여인. 연무장 일대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바로 자영이었다.
혈매궁의 사매들은 남장에 죽립까지 눌러쓴 상태라 아름다움이 비교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자영은 먼저 자기 오빠의 상태를 살펴봤다.
기수의 발아래 쓰러진 암천제는 온몸을 꼼짝하지 못했지만 배는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영이 기수에게 말했다.
“양십삼. 오랜만이야.”
“그, 그래.”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것으로 보이자 이제껏 들떠 있던 무림맹 진영이 약간 의아해 하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혈매궁 사매들은 일제히 도끼눈을 부릅떴다.
공주가 이 가는 소리가 빠드득… 하고 들렸다.
“양십삼이라고? 그렇다면 저 계집도…”
기수의 편하지만 성의는 없는 작명센스 때문에 둘 사이에 뭔가 있음을 곧바로 들킨 것이다.
사매들은 자영을 살피기 바빴다.
얼굴의 요모조모, 키, 가슴과 골반 등이 순식간에 점수 매겨졋다.
탁지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교 고수라면 황제의 후궁보다 더 끔찍한 상대인 것이다.
자영이 기수에게 말했다.
“우선 오빠의 사혈을 찍지 않은 건 고마워.”
기수가 암천제를 호흡하기 편한 자세로 뉘어준 후 말했다.
“사실,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뭔데?”
“천마교와 무림맹은 싸울 이유가 없어. 이것은 모두 제갈세가와 그 배후에 있는 자들이 꾸민 일이야.”
“제갈세가가 꾸몄다고? 무슨 의도로?”
“난세를 만들어 좀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지.”
공주는 그 목적을 역모라고 생각하겠지만 기수는 그 뒤에 마신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얘기를 해봤자 이해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자영도 기수의 말을 자기 식으로 받아들였다.
“제갈세가가 어부지리를 취하려 한다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이용당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
“그만 둬. 넌 우리의 적이야.”
“꼭 그렇게 될 필요는 없어.”
기수 입장에선 자신이 굳이 천마교와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무림맹에 대한 공격을 멈춰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영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를 속인 너를 용서할 수 없어.”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자영은 기수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 주변으로 자주색 구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매들은 그것이 멸절강기임을 곧바로 알아봤다.
공주는 다시 이를 갈았다.
주변과의 소리를 차단하고 마음껏 잠자리를 가지게 된 근본 시작이 어디였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대결 당사자인 기수는 사매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영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암천제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살기를 일으키자 긴장되는 게 당연했다.
‘멸절강기는 금류. 그렇다면 화류로 상대해야 하나?’
그러나 기수는 그녀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똑같은 멸절강기를 일으켰다.
무림맹과 마교 양측 진영에서 연달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 개의 커다란 구 형태가 만들어져 서로 대치하는 모습 역시 평생 두 번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자영의 접근으로 두 개의 강기막은 마침내 접촉하기에 이르렀다.
까가각!…끼익! 끼긱!….
마치 쇳덩이끼리 마찰하는 듯한 굉음이 두 막의 접점에서 울려 퍼졌다.
더불어 강기와 강기의 충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쇠로 쇠를 내리칠 때처럼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섰던 기수가 두 발에 힘을 주고 버티자 이번엔 자영의 걸음이 멈추고 무게중심이 뒤로 밀렸다.
자세를 낮춘 그녀는 손바닥을 기수 쪽으로 내밀더니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시켰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그녀의 강기막 일부가 열리면서 그 사이로 반달 모양의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와 기수의 목을 향해 날았다.
“으음!….”
기수는 신음을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멸절강기 대 멸절강기의 대결이라 내공이 깊은 자기 쪽이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영에겐 그때 당시 자기에게 공개하지 않은 응용기술이 있었다.
기수가 스푼 컷이라고 명명한 강기 공격과 강기막을, 그녀는 자유롭게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강기막을 일그러뜨리며 얼굴 바로 앞까지 파고드는 그 공격은 마치 기본 성질은 같지만 형태는 다른 물과 얼음 같았다.
물의 막은 얼음 칼을 막는데 한계가 있었다.
‘과연…’
기수는 자영이 무림맹주 살해를 위해 천마교주가 특별히 공들여 키운 고수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계속해서 자유자재로 파고드는 멸절강기 공격은 마치 커다란 낫 수십 자루처럼 허공을 메우며 기수의 몸을 베어내려 했다.
사매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전장에 뛰어들려고 할 정도로 그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기수는 손짓으로 사매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화염이 원형으로 폭발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자영 역시 기수의 위치를 잠시 놓쳤는데 눈앞에 푸른 기운이 번뜩인다 싶더니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아!…”
자영은 신음을 토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강기막을 순간적으로 돌파한 기수의 몸통 박치기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멸절강기 대 멸절강기의 대결로는 단순히 내공이 깊은 것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수가 순간적으로 화류로 자영의 강기막을 교란하고 그 틈에 목류의 강기로 파고들어 결정타를 먹인 것이다.
3개 단전을 따로 운용할 수 있는, 기수만이 가능한 공격조합이었다.
충격을 받고 공중에 떠올랐던 자영은 낙법으로 착지하려 했지만 웬일인지 몸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미 기수에게 점혈을 당한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뻣뻣하게 몸이 굳은 채 기수의 품에 안긴 채 착지하게 되었다.
자영은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기수는 그녀를 암천제 옆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승부가 끝났음을 모두가 다 보았지만 이번엔 환호성도, 탄성도 나오지 않았다.
암천제와의 대결에선 기수의 분광권을 억지로 눈으로 따라가기라도 했지만, 이번 자영과의 대결은 뭐가 뭔지 모를 상황만 이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커다란 막 같은 것으로 대치하고 그 사이에 불꽃이 튀고 굉음이 들린 것까지는 목격했지만 그 이후에 두 사람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선 채로 허공에 뭔가 자주빛 기운이 어른거린다 싶다가 갑자기 화염이 폭발하고, 그 뒤에 보니 이미 대결이 끝나 있었던 것이다.
암천제 때보다 훨씬 위험하고 수준 높은 대결이었지만, 구경꾼들 입장에선 너무 빨리 끝났고, 영문을 모를 대결이었다.
무림맹의 환호성이 터진 것은 한참 뒤였다.
천마교와 삼황맹 등의 사마연합 병력은 움츠러들었고, 서둘러 퇴로를 찾았다.
무림맹은 일제 공격을 통해 그동안 당한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그때 기수가 나서서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무림맹은 기수에게 명령을 받을 입장은 아니지만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인간을 초월한 경지의 신위를 봤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기수가 내공 충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싸움은 여기서 그치기를 바랍니다.”
무림맹 입장에선 천마교 최고의 고수 두 명을 제압하여 이제 자신들이 유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라 아쉬웠다.
사마연합 역시 목적 달성이 한 걸음 남은 상황이었기에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은 이제까지 죽고 다친 수많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기수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숫자에서 사마연합을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교 입장에서도 기수가 버티는 무림맹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런 이유로 양측은 서로를 노려보기만 할 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기수는 한백랑을 향해 말했다.
“너희 교주에게 전해라. 내가 암천제와 그 동생을 데리고 있으니 구하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네, 네가 감히….”
한백랑은 무서운 눈으로 기수를 노려봤지만 자기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두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영 남매를 바라보다가 기수에게 물었다.
“교주님을 함정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냐?”
“아니. 단지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못 믿겠다면 만날 장소와 시간을 모두 그쪽에서 정하도록 해. 내가 두 사람을 데리고 그쪽으로 갈 테니까.”
한백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천제를 잡아 놓고 왜 이점을 전부 포기하는, 심지어 불리하기까지 한 조건을 제시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기수의 속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영을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좋다! 교주님께 너의 말을 전하겠다.”
그리고 한백랑은 수신호로 퇴각명령을 내렸다.
사마연합은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조심스럽게 장원을 빠져나갔다.
무림맹 측은 그들을 추격하고 싶었지만 기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자기들을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사로잡은 두 마두를 천마교주와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 쓰겠다는 애기를 듣고 나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마연합이 썰물 빠지듯 퇴각하자 무림맹 군웅들은 부상자를 돌보고, 불을 끄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 각 문파에서 항렬 높은 제자들이 모여 자기네들끼리 시선을 교환한 후 기수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