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03
소림사의 현공, 무당파의 육월성, 그리고 청성파의 오장천은 각자 자기 소개를 한 후 기수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기소협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수는 정중하게 포권으로 답례했다.
“강호 동도끼리 돕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아닙니다. 만약 기소협이 저들을 막아주지 않으셨다면 저희들 모두 몰살당하고 군기와 군량도 전부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난주에 가 있는 본진 역시 힘을 쓰지 못하고 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소협은 무림맹 전체, 더 나아가 정도 무림을 위기에서 구해주신 것입니다.”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하핫!”
현공의 표정과 말투, 몸가짐은 극히 조심스러웠다.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은 소림과 무당과 청성이라는 명문정파의 제자들이지만 기수와 암천제, 기수와 자영 같은 수준의 싸움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무학에 길에 들어선 사람 입장으로서 기수는 그 존재 자체로 경이와 존경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생명의 은인이기까지 하니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청성파의 오장천이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비룡검문과 보타문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난주로 갔습니다.”
“그, 그렇군요.”
그들 정도의 실력이라면 후방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객청으로 안내되어 들어가려 하자 공주가 다가와서 물었다.
“어쩌려고 그래?”
“뭐를?”
“우리 정체를 드러내면 한귀비가 도망칠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사실 우리 정체를 숨긴다고 해서 그녀를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더 이상 단검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그녀가 능력을 되찾기 전에 찾아낸다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어. 사마연합 뒤에 숨어 있는 제갈세가의 소재를 파악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공주는 언성을 높였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살던 곳에, 열 사람이 지켜도 도둑 하나 잡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어. 숨기로 작정한 사람을 찾아내기란 정말 어렵다는 뜻이지. 어차피 한귀비가 최종목적도 아니었잖아? 내 말을 믿어. 무림맹과 사마연합의 대결을 종식시키면 한귀비뿐만 아니라 그녀의 배후가 제 발로 걸어 나올 거야.”
공주는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계획을 바꾸는 기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혹시… 저 계집을 살리려고 계획을 급조한 거 아냐?”
“무슨 그런 소리를….”
“그럼 저 두 사람 죽여 버려도 돼?”
“당연히 안 돼지! 아무리 상대가 천마교라고 해도 사나이가 한 입에 두 말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공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그녀 옆의 탁지연에게 말했다.
“저 두 사람. 네가 안전하게 좀 지켜 줘.”
탁지연도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궁주.”
그녀에게 뒷일을 맡기고 객청으로 들어간 기수는 현공, 육월성, 오장천 등과 함께 마주앉아 차를 마셨다.
현공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기소협은 우리 무림맹에 입맹하신 경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런 적이 있지요.”
“제갈세가가 중원에 삼황맹 끌어들이는 일을 가장 먼저 밝혀내셨다고요?”
“하핫! 맞습니다.”
기수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때가 정말 옛날처럼 느껴졌다.
“홍안산에서는 전대 무림맹주님을 구해주셨고, 또 백리세가와 수로맹의 싸움에서도 백리세가 편을 들어주셨다고요…”
기수는 현공이 왜 자꾸 지난 얘기를 꺼내는지 그 이유를 짐작했다.
무림맹과의 인연을 강조해서 자기들과 한 편임을 확인받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무림맹 소속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무림맹주의 명령에 따라야 함을 의미했다.
현재 무림맹과 사마연합이 마신의 흉계에 휘말려 서로 싸우고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수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 혈매궁의 궁주입니다.”
무당의 육월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혈매궁이라면 일월신교와 싸워 그들이 자랑하는 구마왕 중 절반 이상을 죽였다고 하는 신비문파 아닙니까?”
청성의 오장천도 흥분한 기색을 드러냈다.
“천마교뿐만 아니라 일월신교까지 무찌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현공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혈매궁이 우리 무림맹에 입맹하신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입니다.”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혈매궁은 무림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강호엔 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동창과 원수지간입니다.”
“예? 어쩌다가 그런….”
“제가 동창의 천호를 죽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세 사람은 입을 쩍 벌리고 서로를 마주 봤다.
동창의 천호를 죽이다니… 천호라면 창주 다음의 자리. 동창의 2인자 아닌가.
그렇다면 혈매궁이 자청한다고 해도 무림맹 쪽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무림맹과 동창은 본래 관과 무림으로 나뉘어 서로 간여하지 않는 사이.
실상을 말하자면, 무림맹은 동창을 싫어하고, 동창은 무림맹을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정사대전을 치르는 중에 음종의 개입으로 위기에 처한 무림맹을 동창이 도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무림맹이 동창과 관의 도움을 아쉬워하는 처지인 것이다.
그런데 동창과 원수지간인 문파를 무림맹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현공이 기수를 보며 말했다.
“입맹은 하지 않더라도 저희를 돕고자 하는 마음은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림맹과 사마연합의 대결을 종식시키고 싶습니다. 이용만 당하는 것이니까요.”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만…”
“난세를 획책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제갈세가를 시켜서 삼황맹을 중원으로 끌어들였고, 녹림72채와 수로맹도 장악했습니다. 지금의 정사대전은 그의 의도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현공, 육월성, 오장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정사대전에 배후가 있다는 것은 흘려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가 누구입니까?”
“아직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난세를 만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거라면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 저들은 천하의 주인을 바꾸려 하는 것 같습니다.”
육월성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역모를 꾸민단 말씀입니까?”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기수 입장에선 그 정도까지만 말해주는 게 납득시키기 더 쉬울 것 같았다.
과연 세 사람의 표정은 여러 차례 변했다.
“아무래도 이 일을 최대한 빨리 맹주님에게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기수가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가서 직접 말씀드리게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내일 새벽에 떠나도록 할 테니 거기 맞춰 준비해주십시오.”
그리고 오장천은 기수에게 묵을 거처를 안내해주었다.
커다란 객청.
아홉 명의 일행 앞에 두 사람이 앉혀져 있었다.
기수는 일단 자영과 암천제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자영이 곧바로 표독스럽게 말했다.
“당장 나를 죽여! 교주님을 꾀어내는 데 미끼로 이용되고 싶지 않으니까.”
“워우! 워우! 진정해. 내가 한 얘기 못 들었어? 시간과 장소를 너희 교주한테 정하도록 했잖아. 그런데 뭐가 미끼야?”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돼? 어서 죽여! 죽이란 말야!”
악에 받친 모습이었다.
기수는 그녀를 달랬다.
“미안해. 하지만 천하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자가 정사대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어. 우리가 그 장단에 놀아나선 안 되는 거잖아?”
뒤에서 공주가 불만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얼굴에 수염까지 붙이면서 정체를 숨긴답시고 애썼는데, 이젠 아무한테나 다 떠벌이고 있네.”
기수가 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공주는 멈추지 않았다.
“죽여 달라는 소원 들어주면 서로 편하잖아? 뭐가 미안하다고 난리야?”
그러자 자영이 방안을 훑어본 후 기수에게 물었다.
“저년들은 다 뭐야?”
그러자 공주와 사매들이 동시에 발끈했다.
“뭐? 저년?”
“천마교 교도 주제에 죽고 싶어 환장했나?”
기수는 사매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공주가 기수를 윽박질렀다.
“궁주. 저년과 어떤 사이인지 이실직고해. 어서!”
다른 사매들도 도끼눈을 부릅뜨고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언제나 그렇듯이 솔직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자영은 나와 연인이었어. 너희들도 짐작하다시피 내게 멸절강기를 가르쳐줬고.”
사매들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아마 연인이란 소리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기수가 유일하리라.
전에 경험이 있어도 익숙해지기는 어려운 일이라 다들 표정이 안 좋았는데,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멸절강기를 가르쳐줬다고?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리고 연인이라니?”
암천제가 여동생을 꾸짖고 나선 것이다.
기수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말했다.
“어이… 동생만도 못한 오빠는 좀 조용하지? 자영이 내게 멸절강기의 기초를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그건 결함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결함이라니!”
“하하!… 왜 처음 듣는 척 하시나? 무림맹주 암살을 위해 딱 한 번 써먹을 무기. 그게 너희 교주와 네가 알고 있던 자영의 정체 아니었나?”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후후……. 뭐 이젠 괜찮아. 내가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으니까. 어쨌거나 마교 삼천제 중 제일 수준이 떨어지고, 심지어 자기 동생만도 못한 너는 지금부터 입 닥치고 있어. 숨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으면.”
암천제는 동생에게 해명하려 했지만 자영은 암천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국 암천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기수는 자영 쪽으로 돌아앉아 다시 말했다.
“미리 얘기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본래 혈매궁이란 방파의 궁주야. 그리고 여기 있는 여덟 명의 여인들은 모두 내 사매야.”
“사매? 흥!…”
자영은 냉소를 지었다.
여자의 직감으로 이미 기수와 8명이 보통 사이가 아님을 감지한 것이다.
기수가 차분한 어조로 다시 자영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 지낸 시간만큼은 진심이었어. 믿어 줘.”
혈매궁 사매들은 자기들 앞에서 뻔뻔하게 그런 얘기를 하는 기수의 행동에 치를 떨었다. 공주가 주먹을 불끈 쥐자 다들 턱짓을 했다.
한 방 먹이라는 의미였다.
공주는 망설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기수의 뒤통수에 꽂히는 순간, 기수는 잽싸게 허리를 틀고 손바닥으로 그것을 막았다.
“왜 이래? 진정해.”
“너 같으면 진정하게 생겼냐?”
“원래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더 소중한… 으윽!”
공주가 멈추기는커녕 공세를 더욱 강화하자 기수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주먹에 실린 힘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대충 상대하기도 어려웠다.
순식간에 십여 초식을 겨루다가 좁은 객청의 벽이 등을 가로막았다.
공주는 운룡비결로 주먹을 뻗었고, 기수는 청, 합, 반의 수법으로 그 공격을 튕겨냈다. 순간 기수의 등이 닿았던 벽이 쑤욱! 함몰되었다.
공주의 공세 여력이 기수의 팔과 어깨를 지나 벽까지 전해진 것이다.
청, 합, 반으로 튕겨난 공주가 투덜거리며 손을 거둠으로써 싸움을 끝났지만 벽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암천제와 자영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벽이 부서지고 허물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소리도 없이 짓눌리는 현상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비로소 드센 여인이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림맹 측에 이런 고수들이 있다는 것은 천마교 입장에선 불행이었다.
기수는 사매들에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약간 뻔뻔하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너희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자영은 비록 천마교에 속해 있지만 교주와 오빠를 돕겠다는 생각뿐, 피에 굶주린 마녀도,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귀도 아냐.”
“약간 뻔뻔하다고? 어이가 없네.”
“하핫!… 좀 심한 편인가?”
기수가 뒤통수를 긁자 공주가 언성을 높였다.
“넌 문제가 있어. 그것도 아주 심각해!”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어쩌란 말인가. 이미 이렇게 된 것을…’
그리고 은근히 화도 났다. 공주도 사매들 입장에서 봤을 땐 난데없이 끼어든 훼방꾼인데 올챙이 적 시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수가 약간 감정을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이왕 문제가 있다면… 아예 뻔뻔하게 나가볼까?”
그러자 탁지연이 잽싸게 미소 지으며 끼어들었다.
“아냐. 궁주. 궁주한테 뻔뻔한 건 안 어울려. 사과를 받아줄게. 우리가 저 두 사람을 어떻게 해주길 바라?”
공주는 기수의 태도에 당황하던 참이었는데 다행히 탁지연이 나서서 수습해주니까 다행이라 생각하며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