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04
기수는 탁지연의 낯을 봐서 참기로 했다.
공주가 전력을 다해 주먹을 뻗은 것까지는 그냥 좀 드센 여자의 애교 정도로 봐줄 수 있었다.
예전에 혈매궁 궁주 신분 이전에는 두들겨 맞고 밟히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인간성이나 도덕성을 물고 늘어진다면 얘기가 달랐다.
이곳은 중혼이 법으로 금지된 세상이 아니었다.
능력 있는 남자가 삼처사첩 거느리는 게 흉이 되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만약 중원무림에 와서 공주를 맨 처음 만났고, 그녀에게 유일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면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을 것이다.
사나이에게도 순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 공주는 순서로 따지자면 한참이나 뒤였다.
탁지연도 가만히 있는데 자기가 웬 난리란 말인가.
‘가만 있어봐… 3처4첩이면 벌써 초과네?’
아무래도 자기는 좀 특수한 경우, 즉 무림의 여인들에게 내공을 베풀어주는 재능기부자니까 조금 더 넉넉하게 3처 40첩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처라면…. 탁지연, 공주, 아투사가 되려나? 아, 참! 순서는 아투사를 두 번째 안에 넣어줘야지.’
그러나 곧바로 다른 여인들이 생각났다.
맨 처음 자신을 성에 눈 뜨게 만들어주면서 내상을 치료해 준 태무신궁의 조민, 조현 자매도 있고 천마교 혈천제도 있었다.
‘아! 머리 아프다.’
기수는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탁지연에게 말했다.
“사인교 2개를 구해올 테니까 이 두 사람을 태워서 난주로 함께 갔으면 좋겠어.”
공주가 못 참고 다시 끼어들었다.
“우리더러 천마교 마두 남매의 가마꾼이 되라고?”
“점혈을 풀어줄 수는 없잖아.”
“왜 번거롭게 우리가 들고 다녀? 이곳 뇌옥에 가둬두면 되지. 무림맹 사람들이 알아서 잘 다뤄줄 텐데.”
암천제와 자영의 낯빛이 변했다.
무림맹 사람들 손에 넘어간다면 어떤 고문을 당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기수 쪽을 봤다.
기수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 이들은 무림맹이 아닌 나의 포로니까 내가 책임져야 돼.”
암천제와 자영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가 뭐라 하기 전에 탁지연이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한 후 말했다.
“알았어요. 사인교만 준비해주세요.”
“고마워. 아! 나는 가마를 계속 들 거니까 한 사람씩 교대로 쉬어.”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기수였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고 밤이 되었다.
기수는 암천제와 자영을 앞에 놓고 반복해서 무림맹과 사마연합의 충돌은 제갈세가에게 이용당하는 것이고, 그들 뒤에는 또 다른 암중 인물이 있음을 얘기했다.
자영은 약간 태도가 바뀌어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을 보였지만 암천제는 다른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내 동생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지?”
기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우린 꿈속에서 서로 알게 되었지. 복숭아 꽃 핀 선경을 거닐면서 무공에 대해 논하다가 조금씩 친해진 거야.”
“무슨 헛소리냐!”
“그냥 대충 알아들어 임마.”
기수는 꿀밤을 한 대 먹여주었다.
암천제는 이를 갈았지만 힘에서 밀려 제압당한 상태란 걸 재확인했을 뿐,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풀이 죽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기수는 두 사람에게 차를 마시게 해주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오줌 마렵다고 하면 곤란해지니까.”
그리고 다음 날.
기수는 둘에게 약간의 음식을 먹이고 사인교에 태운 뒤 흔들릴 것에 대비하여 밧줄로 묶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암천제와 자영은 마당에 모인 무림맹 사람들의 살벌한 시선을 확인하고 겁먹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수많은 동료를 잃게 한 천마교의 두 수뇌가 잡혀 있으니 다들 손을 쓰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기수는 좀 더 무거운 암천제의 가마를 들었는데 무게가 별로 부담스럽지 않아서 앞은 자기 혼자 들겠다고 하여 사매들 중 2명이 쉬게 되었다.
길잡이는 무당파 제자 육월성이 맡았다.
소림의 현공과 청성의 오장천은 장원 밖까지 나와 기수를 전송했는데, 그들은 군량과 함께 나중에 따라오기로 했다.
경공을 펼쳐 난주를 향해 달린지 반나절.
객잔을 잡아 쉬는 동안 공주가 자영 앞으로 가서 물었다.
“야. 너. 이름이 자영이라고 했냐?”
자영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외면했다.
사실, 그녀가 기수에게 화가 난 데는 정체를 속였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자를 여덟 명이나 거느리고 나타났다는 이유도 있었다.
꽃같이 어여쁜 여인들. 특히 지금 말을 거는 이 드센 여자가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라? 이게 날 무시해?”
공주는 자영이 고개 돌린 쪽으로 가서 다시 말했다.
“야! 나 똑바로 보고 대답 못 해?”
자영은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주는 열불이 났다.
“이게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공주는 혈매궁 여섯 사매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 후, 자기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풍만함이었다.
기수는 날씬한 편이 훨씬 좋다고 하지만 여자의 욕심이 어디 그런가.
기수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요인이라면 다 갖추고 싶은 게 공주 마음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자영은 귀엽고 깜찍한 얼굴에 풍만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동매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보다는 나은 부분이 보였다.
공주가 좌우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갑자기 손을 뻗어 자영의 허리와 골반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자영은 깜짝 놀랐다.
“무, 무슨 짓이야!”
“흥! 뚱뚱한 주제에…”
공주는 옷에 가려진 자영의 탄력을 손바닥으로 확인하고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자영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당장 점혈을 풀어. 나하고 제대로 한 번 싸워보자!”
“웃기고 있어. 너 따위가 내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너야말로 양십삼 뒤에 숨어서 추잡한 짓만 하고 있잖아. 자신 있다면 풀어 봐.”
“추잡하다니! 누가?”
공주는 볼이 벌겋게 상기되었고, 자영의 뺨을 후려치기 위해 손을 번쩍 들었다.
자영은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공주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차마 점혈당한 사람을 때리지 못했다.
그건 너무나 치사한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혈을 풀어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손을 내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미안해. 함부로 만져서.”
자영은 상대가 충분히 때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공주가 다시 말했다.
“너.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면 그때 꼭 한 번 겨뤄보자.”
“얼마든지.”
공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영에게서 떨어졌다.
자기가 자기가 아닌 것처럼 행동한 게 부끄러웠고, 그 모든 원인이 기수에게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화도 났다.
‘그는 뭘 믿고 그렇게 뻔뻔한 거지?’
자기가 처음엔 아투사도 용납하지 않다가 둘은 괜찮다. 설매까지는 괜찮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덟까지는 괜찮다고 하니까 이제 아홉도 괜찮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한 게 분명했다.
‘아! 애당초 아투사부터 받아주지 말 걸 그랬어.’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보면,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일곱 명만 어울리고 자기는 떨어져 나갔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수가 아투사를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가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한 번은 사매들이 전부 젓가락을 물고 구역질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검으로 연습한 아투사를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숨을 오래 참는 것까지 합쳐져서, 아투사의 기술은 거의 독보적이었다.
공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자기도 탁지연처럼 포기하고 기수에 맞춰주는 게 마음 편하다는 쪽으로 자꾸만 결론이 나려고 했다.
사인교 두 대가 포함된 일행이지만 전진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무당 제자 육월성은 빈손인데도 따라가기 벅차 숨이 턱에까지 차게 되자 기수뿐만 아니라 혈매궁 제자들의 무공도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무림맹 소속은 아니라고 해도, 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일행의 평탄한 여로를 가로막는 상황이 펼쳐졌다.
무장한 일단의 무리가 관도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월성은 수신호로 일행을 정지시킨 후 숨을 고르며 기수가 앞으로 오길 기다렸다.
“무슨 일입니까?”
“전방에 길을 막은 자들이 있습니다. 사마연합인 것 같습니다.”
“잘 됐군요.”
육월성은 뭐가 잘 됐다는 건지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기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파공음과 바람만 남아 있었다.
기수는 순식간에 적 진영으로 파고들어 닥치는 대로 잔백지를 날렸다.
사마연합 병력은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고 쓰러지기 바빴다.
몇몇 실력을 갖춘 자들도 있었지만 기수 앞에선 도토리 키 재기였다.
한 수에 점혈 당하느냐 두 수에 당하느냐 정도의 차이였다.
기수에게 있어 잔백지는 예전부터 애용하던 수법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확실히 그 위력이 제대로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었다.
권투로 치면 잽을 던졌는데 거기 스트레이트의 위력이 실린 느낌이랄까.
그동안 음양대법과 오행류 상생순환으로 열심히 연공한 덕분이었다.
쓰러진 자가 삼사십 명에 이르자 적들은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수는 큰소리로 웃었다.
“뭐야. 벌써 도망치는 거냐? 이런 오합지졸들 같으니라고. 하하하!…”
사실, 삼황맹은 새외의 여러 부족들이 연합된 것이고, 녹림72채는 산마다 흩어져 있던 산적들의 모임이고, 수로맹도 수채가 제각각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 정도나마 하나로 뭉쳐 움직인다는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제갈세가의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사인교와 일행이 다가오는 동안 기수는 쓰러진 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를 골라 아혈을 풀어준 후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무슨 목적으로 여기를 지키고 있는 거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렵지만 입은 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기수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기수가 상대를 빤히 보고만 있자 육월성이 나섰다.
“심문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뭔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수는 손을 내저으며 사내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놈들이 길을 끊은 것은 함양과의 연결을 단절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그걸 어떻게…”
“함양을 공격할 때 무림맹 본진에 대한 공격도 병행되었다는 뜻입니다.”
“동시 공격? 그럼 본진은 지금 공격당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육월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본진은 함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력인데 어떻게…. 아무리 혈천제의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도 그 정도는….”
기수 역시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좀 더 속도를 내서 달려가 봅시다.”
원래는 객잔을 잡고 좀 쉬려고 했지만 계획이 변경되었다.
무림맹 본진과 천마교가 정면충돌한다면, 한쪽엔 비룡검문과 보타문이 있고, 다른 한쪽엔 혈천제가 있었다.
기수 입장에선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상황.
한 시가 급한 판에 쉬었다 갈 여유는 없었다.
기수는 잠시 가마를 대신 들었던 사매와 교대하고 즉시 스피드를 올렸다.
최종적으로는 육월성의 한계 속도에 맞춰줘야 했지만, 어쨌거나 밤새 달린 보람이 있어서 다음날 새벽엔 멀리 황토 고원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결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다!”
기수는 안력을 돋우어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흙먼지가 누렇게 일어서 그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이 어느 편이고, 수는 얼마나 되는지… 무엇 하나 파악할 수 없었다.
기수는 쉬던 사매들에게 가마를 넘기고 말했다.
“내가 먼저 가 볼 테니까 천천히 따라와.”
“우리도 가서 도울게.”
“일단 이들 두 사람을 지키는 것에 집중해 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나설 필요 없어.”
가마꾼 노릇이 진력 난 공주가 뭐라 한 마디 하며 사인교를 놓으려 했지만 기수는 이미 선풍비를 시전하여 날아간 뒤였다.
육월성은 지나간 뒤로 흙먼지를 회오리바람처럼 일으키는 기수의 뒷모습을 보며 탄성을 토하다가 장검을 뽑아들고 따라서 달려갔다.
흙먼지 속에 자기 사형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덟 명의 사매들도 한 손으로는 사인교의 손잡이를, 다른 손으로는 검을 뽑아 들고 두 사람을 따랐다.
앞장 선 기수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흙먼지 속의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분명 사마연합 병력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싸우는 사람들은 무림맹.
예상했던 대로 무림맹 본진이 포위공격을 당하는 중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사상자의 수를 확인해 본 기수는 깜짝 놀랐다.
무림맹 사람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때 한쪽에서 요란한 징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기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음종 현현각의 징잡이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징에서 나는 소리였다.
사마연합이 무림맹 본진 공격에 나선 것은 혈천제가 아니라 현현각을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현현각 각주가 회복하여 복귀한 게 분명했다.
기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