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06
기수는 현현각주가 이제까지 싸워본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멸천제나 한귀비도 강하긴 했지만, 그들은 은혈대법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잠재력을 끌어 올린 것이었다.
그에 반해 현현각주는 순수한 내공의 깊이가 무서울 정도였다.
비유하자면 멸천제나 한귀비가 터보차저나 슈퍼차저라면, 사공명은 자연흡기로 출력을 전부 뽑아내는 것이다.
아무리 터보가 대세라고 해도 자연흡기의 응답성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의 부하 루주들이 소년 시절의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속으로는 노인이듯이, 현현각주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년식이 많이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내공이기에 이 정도 되는 거겠지?’
기수는 우선 마음가짐부터 고쳐먹었다.
2002년 월드컵의 환상에서 벗어나, 나보다 FIFA 랭킹이 높으면 무조건 세다고 단정하고 최대한 신중하고 겸손하게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단지 마음만 그렇게 먹었을 뿐인데 뭔가 진기 흐름이 달라졌다.
차분하게 저 밑바닥에서부터 힘이 끌어 올려지는 느낌.
세 개의 단전을 채우고 넘치는 기력은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가득 들어찼다.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하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난 타고난 전사인 것 같아…’
하긴, 그러니까 신에게 선택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라는 제한된 환경에서 본능을 억제, 아니 그런 본능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선생님이나 사회가 시키는 대로 대학 가는 것만을 지상 목표로 삼고 살아온 시절이 약간은 억울하게 느껴졌다.
사공명도 함부로 선공을 펼치지 않고 기수만큼이나 신중하게 호흡을 고르며 준비했다.
대결 결과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무림맹 군웅들 입장에서는 두 사람의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에까지 온통 신경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영 한 쪽으로 혈매궁 여덟 사매들이 사인교 2개를 들고 들어왔다.
검과 옷에 피 묻은 것을 보니 접전을 치르며 길을 열고 들어온 듯 했다.
낯선 고수들이 검을 들고 나타나자 무림맹 군웅들은 다들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는데, 뒤늦게 무당의 육월성이 가세하여 자기 문파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 제가 왔습니다! 혈매궁 궁주와 제자들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무림맹 군웅들은 그제야 같은 편임을 알고 안도했다.
남장한 여인 여덟 명은 얼핏 보기에도 무서운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 지원군이 왔으니 무림맹 입장에선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한쪽 진영이 무너지면서 수십 명의 천마교 무리가 난입해 들어왔다.
무림맹 군웅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기수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천마교의 혈천제.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혈천제는 현현각주가 끝장을 내지 못하는 걸 이상하게 여겨 직접 들어왔다가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너… 너는….”
천하를 떨게 만드는 천마교의 마녀가 기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자 여기저기서 격분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은 주예림 공주였다.
“저놈이 또!…”
사매들, 무림맹 진영의 여인들은 물론 천마교 소속인 자영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현현각주와의 대결을 앞두고 모처럼 밑바닥의 힘까지 다 끌어 모아 집중하고 있었는데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혈천제 뒤로는 소혼랑과 고혼랑까지 보였다.
뭐라고 인사라도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혈천제가 갑자기 수인을 맺더니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옥혈린수를 가동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가슴이 쓰렸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어여쁜 혈천제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가득했는데, 혈천제는 자기를 제압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넌 원래 그런 애였지.”
혈천제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마옥혈린수를 풀어냈지?”
“아무래도 옛날을 그리워한 건 나 혼자뿐이었던 것 같군.”
그리워했다는 말에 사매들 중 누군가 괴성을 지르는 게 들렸지만, 기수는 아마 공주일 거라 짐작만 했을 뿐 돌아볼 수 없었다.
혈천제가 느닷없이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풀었다면 다시 걸어주지!”
그녀의 열손가락이 갈고리 모양으로 바뀌어 기수의 머리를 찍어 왔다.
기수는 분광권으로 그녀의 공격을 쳐냈다.
그런데 팔과 팔이 얽히면서 느껴지는 파워가 장난이 아니었다.
‘젠장!… 이 정도면 예림이 보다 강한 거 아냐?’
설마 했는데, 그녀의 무공은 자영을 능가했다.
더구나 자영이 멸절강기에 특화된 데 반해 혈천제는 다양한 종류의 무공들을 자유자재로 펼쳐내고 있었다.
그녀 손에 얼마나 많은 무림맹 사람들이 죽었을까를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혈천제를 해독시키고 내공의 결점을 제거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니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순식간에 30여 초식이 교환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맹 군웅들은 몹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지만, 다들 타고난 무골들이다 보니 높은 경지의 무공을 보고 감탄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현현각주와의 대결은 서로 간격을 둔 채 강기로만 겨뤘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비해 볼거리는 부족한 편이었다.
그에 반해 혈천제와의 대결은 팔과 팔, 다리와 다리가 얽히는 육박전이라 훨씬 더 박진감이 넘쳤다.
헐천제는 자신의 공격을 모두 막아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몰아붙이기까지 하는 기수의 무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엔 정체를 숨겼던 거냐?”
“여전히 아름답네… 여전히 독하기도 하고.”
“흥! 너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순간, 흥분한 혈천제는 가공할 기세로 공격을 강화했다.
기수는 연달아 뒤로 밀렸다.
그의 눈엔 혈천제가 무리하면서 드러내는 허점들이 보였다.
그러나 기수는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말로 도발해서 만들어낸 이득이 아닌 힘 대 힘으로 싸워서 그녀를 누르고 싶었다.
그래서 분명한 우열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때, 귀를 찢는 고음이 들려오면서 기수의 신형이 흔들렸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현현각주가 기습을 가해 온 것이다.
“젠장!”
기수 입장에선 아찔한 상황이었다.
일 대 일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두 명에게 협공을 당하다니.
그는 황급히 몸을 회전시켜 현현각주의 회선참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앞에 혈천제를 놔두고 그런 큰 동작을 하는 것은 금기였다.
한방 맞을 수도 있다는, 어쩌면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혈천제를 봤는데,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혈천제는 그 절호의 기회에 손을 쓰지 않았다.
그 순간이 너무 짧아서 미처 준비를 못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처럼 다른 도움 없이 실력만으로 이기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수는 자기에게 감정이 남아 있어서 머뭇거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혈천제가 표정을 바꾸고 살기를 다시 끌어올렸을 때는 이미 기수가 자세를 바로 잡은 상태였다.
기수는 안심할 수 없었다.
겨우 한 고비를 넘겼을 뿐 사공명과 혈천제로부터 협공 당한다는 점은 동일했다.
사공명이 큰소리로 말했다.
“넌 이제 끝났다!”
순간, 보이지도 않는 기운이 확! 밀려들며 기수의 상체를 밀었다. 그 자체는 회선참처럼 날카롭지 않았지만 몸의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게 문제였다.
기수는 당황하여 다시 혈천제 쪽을 봤다.
그녀에게 한 번 더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혈천제는 기수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일곱 자루 검과 쌍칼.
여덟 명의 혈매궁 여인들이 합격진을 펼쳐 그녀를 공격한 것이다.
혈천제는 그들의 단단하고 긴밀한 움직임에 크게 당황했다.
은혈대법 상태의 한귀비를 적으로 상정하고 훈련된 매화팔궁진은 그 위력이 무시무시해서, 시작부터 혈천제를 수세에 몰리게 만들었다.
혈천제는 진을 구성한 여덟 여인이 왠지 모르게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당장은 그 이유를 따지기보다 살아남는 게 더 급했다.
아홉 명이 얽혀 돌아가는 옆에서 기수와 사공명은 비로소 제대로 된 일 대 일 대결을 재개할 수 있었다.
상황은 기수에게 불리했다.
노회한 사공명은 모처럼 잡은 기선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기수를 압박했다.
기수 입장에선 그의 음공, 회선참, 그리고 마치 장풍처럼 공기로 확! 밀어붙이는 공격법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딱 한 번만 숨을 돌릴 수 있으면 되는데…’
기수는 자기가 조급해 하고 불안해할수록 기회가 점점 더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침착해야 돼.’
금방이라도 급소를 제압당할 것 같은 두려움.
그 두려움을 이기고 차분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예전의 기수 같았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
그러나 멸천제와 어려운 싸움을 한 이후로 그런 면에서는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단지 내공이 고강하고 초식 운용이 정묘하다고 해서 얻어지는 능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처해 봐야만 배울 수 있는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계속 밀리고 비틀거리면서도, 기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허둥대면 나만 손해야. 정신 차려! 난 세 개의 단전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어.’
그렇게 집중력을 유지하자 비로소 밀리는 와중에도 상대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한 순간, 기수의 왼손이 수류의 태포련을 발출했다.
“으음…”
사공명이 답답한 신음을 토했다.
온몸이 끈적끈적 달라붙는 늪에 빠지기라도 한 느낌.
순간, 기수의 양손에서 불기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세가 늦춰진 사공명은 이를 갈았고, 기수를 향해 입을 벌리고 괴성을 질렀다.
“으윽!…”
이번엔 기수가 뒤로 밀렸다.
뭔가 소리 같기도 하고 단순한 압력 같기도 한 것이 양쪽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사공명이 부채를 회전시키며 간격을 좁혀왔다.
그의 회선참도 기수의 파천강기나 마찬가지로 멀리서 발사하는 것보다는 가까이에서 직접 베는 편이 진기 효율 면에서 훨씬 효과적인 듯 했다.
기수는 현재의 균형 감각 흐트러진 귀 상태로는 정상적인 방어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상대의 의도를 역으로 찔러 들어갔다.
목류의 호신강기. 즉 파천강기를 전신에 철퇴처럼 만들어 두르고 덤벼드는 사공명을 향해 온몸으로 돌진해 들어간 것이다.
사공명은 그 돌발적인 행동에 확실히 당황했다.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공격을 하는 대신 기수의 강기막을 부채로 막았다.
쿵!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사공명이 세 걸음. 기수는 네 걸음.
그러나 기수 입장에선 밀리던 상황을 처음으로 되돌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침착해. 침착해야 돼.’
마음을 가라앉히자 처음보다 조금 더 빨리 저 밑바닥으로부터 내공을 끌어올린 것 같은 상태가 만들어졌다.
‘이것도 연습할수록 느는군.’
어쩌면 싸움에 있어 몸보다 마음을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수는 자신감을 느꼈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유지한 채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사공명 쪽을 노려봤다.
사공명은 기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목을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무림맹 군웅들은 11명의 싸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실제 움직임이 많은 것은 8명에게 포위당해 위태롭게 활로를 찾으려 애쓰는 혈천제 쪽이지만, 사람들 시선은 기수와 현현각주 쪽으로 더 쏠렸다.
현현각주는 부채 두 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었다.
그리고 한 순간 두 부채를 위로 확! 들어올렸다.
그러자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기수의 몸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어엇!….”
싸움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기수는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면 움직임에 큰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날개 달린 새가 아닌 바에야 다시 두 발이 땅에 닿게 될 때까지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 그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해도 사공명 정도의 고수에겐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공명은 연달아 십여 개의 회선참을 날렸다.
기수가 진기를 끌어 올려 그것들을 막고 있을 때, 사공명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괴성을 질렀다.
기수는 강기를 뚫고 들어오는 고음 때문에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공명은 다시 부채를 휘둘렀다.
곧 착지할 거라 생각하던 기수는 한 번 더 공중에 떠오르게 되자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천근추의 수법을 쓰면 내려갈 수 있을까?’
그러나 천근추도 발이 땅에 닿아 있을 때 쓰는 수법이었다.
어떤 물체의 질량이 저절로 증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떠있는 기수를 향한 사공명의 공격은 강도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가 한 걸음, 두 걸음씩 접근하면서 진기 운용 효율도 상승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미칠 지경이었다.
입을 쩍쩍 벌리며 초음파 같은 괴성을 지르고, 두 개의 부채를 쉬지 않고 휘둘러대는 사공명을 향해 자신도 멸절강기를 난사하며 맞서고는 있지만, 그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데 반해 자기는 저글링 당하는 공처럼 계속 공중으로 떠오른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특히 그가 자신을 빙글빙글 돌린다는 점이 몹시 괴로웠다.
늘 그를 향하도록 시선을 유지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젠장! 이런 수법을 쓸 줄이야.’
기수는 사공명의 눈을 봤다.
그는 유리한 상황이지만 잔뜩 집중한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을 띄워 놓고 가지고 노는 걸 재미있어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기수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그래! 너도 진기 소모가 걱정되겠지. 무한하지는 않을 테니까.’
기수는 결국 이것이 참을성 싸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피차 한 수로 제압하기엔 버거운 상대.
그렇다면 서로 극한의 힘으로 버티다가 먼저 무너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