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15
구유마존이란 별호로 불리며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천마교 교주 선우환.
그러나 마흔을 넘긴 이후로는 두문불출하며 후진양성에만 힘을 쏟았다.
갈라져 나간 일월신교가 강남에서 날로 교세를 확장하자 언젠가는 그들에게 밀릴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전대 교주들이 남긴 신공절학들은 물론, 출처가 불분명한 고대의 무공들까지.
그는 자신이 직접 연구하고 보완하여 천마교의 무공체계를 상당부분 개선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무공에 자질 있는 아이들을 지옥도에 모아 훈련시키고, 108마령과 3천제를 키워내기에 이른 것이다.
혼자 강해봤자 소용없다고 마음먹은 지 20년 만에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런 그에게 제갈세가의 제안은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비록 홍안산에서 못된 짓을 하려 했지만 어쨌거나 적의 적은 동지인 셈.
필요한 기간 동안 상대를 이용하면 된다는 판단으로 손을 잡았다.
환우구종 중 음종의 출현으로 일이 수월하게 마무리될 거라는 기대도 가능했다.
물론 음종도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제갈세가를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차도살인으로 무림맹을 제거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일단 만족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무림맹 공략을 준비하던 멸천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 살해당한데 이어 바로 맞은편에 앉은 청년고수가 현현각주를 죽여 버린 것이다.
선우환의 입이 열렸다.
“일단, 못난 제자를 살려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부터 해야겠군.”
기수의 변화 때문인지 그 역시 어투가 우호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뒤에 선 암천제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기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혈매궁은 애당초 천마교와 아무 원한도 없는데 왜 사람을 해치겠습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 다른 교도들도 죽이지 않고 점혈만 했다던데…”
“그렇습니다. 화양문의 뇌옥에 갇혀 있지만 다들 무사합니다.”
“혈매궁은 무림맹 소속이 아니란 뜻인가?”
“그 점에 대해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도 아닙니다.”
교주 선우환은 고개를 돌려 암천제 쪽을 봤다.
암천제가 말했다.
“화양문의 장원을 나올 때 무림맹주를 비롯한 장문인들이 저와 동생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궁주가 거절하고 지켜주었습니다.”
“그랬단 말이지…”
선우환은 손가락으로 수염을 만지며 기수를 보다가 물었다.
“혈매궁은 도대체 무얼 원하는 건가?”
기수는 자기가 알고 있는 상황을 모두 얘기해주었다.
선우환은 침착한 표정으로 경청한 후 물었다.
“역모를 꾸미는 자에게 우리와 무림맹이 모두 이용당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과히 기분이 좋지 않군.”
선우환의 인상이 구겨졌다.
삼황맹의 앞잡이로만 생각했던 제갈세가가 천하를 아우르는 거대한 흐름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들 배후에 천하를 노리는 세력이 있다면 앞뒤가 맞았다.
그런 암중세력의 수작에 천마교가 놀아났다는 것은 치욕이라 할 수 있었다.
선우환의 표정을 살피던 기수가 말했다.
“그들의 음모를 막는 게 바로 우리 혈매궁의 목표입니다.”
선우환은 잠시 시간을 두고 물었다.
“그 일이 혈매궁에는 무슨 이익이 되는 건가?”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 마련이지. 제갈세가와 그 배후에 있는 자는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그런 안배를 했다고 치고… 혈매궁은 무엇을 얻으려고 그들을 잡으려 하는가를 묻는 걸세.”
“그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기수는 즉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를 집으로 보내준다는 얘기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일행 중에 황족이 있다는 얘기도 누설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지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혈매궁은 대가를 약속받고 그들을 쫓고 있습니다.”
“대가라면?”
“역모 색출에 성공하면 관직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산우환의 입가에 약간 경멸하는 듯 한 미소가 걸렸다.
기수는 아차! 싶었다. 무림인들은 전통적으로 관리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기가 너무 속되게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기가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선우환이 물었다.
“장군부 소속인가?”
기수는 그들이 단번에 장군부 얘기부터 꺼내는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창과 원수지간이라는 사실, 일월신교와 싸웠고 강남에서 강시토벌에 참여했다는 사실 모두 정보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기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그렇게 믿도록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우리 혈매궁은 장군부과 손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협력관계일 뿐, 그들에게 소속된 것은 아닙니다.”
기수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비웃음 좀 당하면 어떤가.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가식적인 멘트보다는 낫지 않은가.
선우환은 기수의 그런 태도가 의외라는 듯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지금 싸움을 그만두기에는 우리 쪽이 입은 피해가 적지 않은데…”
기수는 무림맹이나 천마교나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마교는 한 사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만, 그래도 교도들의 뜻을 무시하고 수장이 마음대로 결정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니 무림맹은 오죽하겠는가.
“무림맹 측의 피해도 적지 않습니다. 장문인들이 죽은 수를 따져보면…”
“그거야 그들이 먼저 시작했으니까 당연한 응징을 받은 거고…”
“이것은 선후관계나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적은 따로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제갈세가야말로 천마교와 우리 혈매궁, 그리고 무림맹이 공동으로 상대해야 할 진정한 적입니다.”
교주는 혈천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혈천제는 기수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저 자의 말만 믿고 사마연합을 해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괜히 그랬다가 무림맹 좋은 일만 시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혈매궁주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기수는 답답했다.
‘개인감정을 이런 데 결부시키면 안 되지. 아! 놔….’
그리고 함께 있던 당시를 떠올려보면 억울하게 당한 건 자기 쪽이었다.
애당초 자기 몸 안의 독기를 배출한 후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으로 동침한 것이었다. 그걸 다 고쳐주고 내공까지 증진시켜주었는데 이렇게 배신하는 건 너무했다.
암천제는 교주가 자기에게도 물으면 대답하려는 듯 입술에 침을 적셨지만 교주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포로로 잡혔던 과오로 인해 근신하는 처지라 발언권도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하도록 하지…”
선우환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사마연합에서 빠지겠다. 그리고 무림맹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들을 자극하지 않겠다. 어떤가?”
기수는 기뻤다. 혈천제와 달리 교주는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교도들은 돌려줄 건가?”
“물론입니다. 즉시 석방하겠습니다.”
“다른 조건 없이?”
“이미 말씀드렸지만 우리 혈매궁은 천마교와 아무 원한도 없습니다. 그들을 풀어주는데 무슨 조건을 달겠습니까?”
“하하!…. 고리타분하고 가식적인 무림맹 놈들과는 확실히 다르군.”
기수는 사실 천마교가 제갈세가 토벌에 협조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첫 대면에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혈천제가 언급한 불안감도 없지는 않을 테니 일단은 휴전을 확실히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진실을 입증한 후에 유도하는 게 순조로운 방법일 것이었다.
‘역시 천마교 쪽이 일의 진행은 시원시원하군.’
교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내게 전할 말이 있으면 내 제자를 통하도록 하게.”
그리고는 턱짓으로 혈천제를 가리켰다.
“아, 알겠습니다.”
껄끄러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이라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잘 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교주가 임무를 맡겼으니까 혈천제가 다시 자기 머리를 찍어 마옥혈린수를 심을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았다.
선우환은 기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장군부는 좋은 수하를 거두었군.”
“수하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그는 기수에게 가볍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군막 밖으로 나가며 혈천제에게 말했다.
“우선 교도들을 데려오는 일부터 함께 하거라.”
“예. 교주님.”
혈천제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교주의 명령엔 무조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암천제는 한 차례 한숨을 내쉰 후 긴장한 표정으로 교주를 따라 나갔고, 군막 안에는 4명만 남게 되었다.
기수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교 교주.
그와 마주앉아 있는 내내 표정과 태도는 담담하게 유지했지만 온몸의 신경들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천마교 하면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교주는 무서운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로 일관했다는 게 약간은 의외였다.
‘역시 일파의 수장은 힘만 가지고 되는 게 아냐….’
자기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기수는 갑자기 전해져 오는 한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천마교 교주와의 만남이 순조롭게 끝난 것은 다행이지만 혈천제, 탁지연, 공주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진땀이 흘렀다.
혈천제가 먼저 기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넌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자 공주가 곧바로 쏘아붙였다.
“흥! 누구 마음대로?”
탁지연도 한 마디 했다.
“지난번엔 용케 빠져나갔다만, 다음에 다시 만나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기수는 세 사람이 내뿜는 살기 때문에 호흡이 불편할 지경이었다.
혈천제가 냉소를 지었다.
“흥!.. 여덟 명이 에워싸도 별 것 아니더군.”
“웃기지 마라! 너야말로 쩔쩔 매다가 도망친 게 고작 아니냐? 다음엔 내가 일 대 일로 싸워주마.”
공주가 나서자 혈천제도 물러서지 않았다.
“왜 나중으로 미루지? 지금 당장 싸워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공주가 내공을 끌어올리자 군막이 확! 소리를 내며 팽창했다.
혈천제도 지지 않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기수는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려야 했다.
천마교와 무림맹의 휴전을 이끌어낸 지 5분도 안 됐는데 천마교와 혈매궁이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감당하기 어려운 두 여고수의 대결을 어떻게 말린단 말인가.
그때 기수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우리는 나갈 테니까 둘이 알아서 해. 초장부터 일을 망치며 교주가 참 기뻐하겠네. 역도를 찾는 일도 잘 진행될 테고.”
그리고는 탁지연의 팔을 끌고 군막 밖으로 나갔다.
경험상 이럴 때 말리는 사람이 있으면 더 드세게 굴고 말도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그 역할을 자기가 하기는 싫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주와 혈천제 아닌가. 아마 틀림없이 서로를 때리다가 실수하는 척하면서 자기를 수없이 구타할 게 분명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되는 것이다.
탁지연은 공주 옆에 있으려고 했지만 기수는 힘으로 그녀를 끌어냈다.
군막 안에 둘만 남겨놓은 지 1분이나 지났을까.
두 사람이 몇 마디 주고받는가 싶더니 밖으로 나왔다.
기수는 자랑스런 얼굴로 탁지연을 봤다.
아마 싸움을 중재한 것으로는 최단시간 기록일 것이었다.
혈천제가 기수에게 말했다.
“두 마령을 딸려보내줄 테니 그 편에 포로들을 보내.”
“그렇게 하지.”
소혼랑과 광혼랑이 혈천제의 지시를 받고 기수 앞에 나타났다.
그녀들의 기수를 바라보는 표정은 뭔가 심상치 않았다.
공주가 곧바로 알아차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궁주! 너…”
그러나 격분한 그녀를 탁지연이 급히 진정시켰다. 공주는 사매들끼리 한 약속을 떠올리고 억지로 화를 눌렀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어떻게 무림맹과 천마교에 모두 정인을 만들어놨는지 그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지고한 신분. 누구에게 빠지지 않는 미모, 거기다 무공까지 겸비한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계속 매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을 생각하면 떠나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느낄 수 있는 쾌락과 만족감을 생각하면 도저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특히 음양대법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이후로는 그 결합 상태에서 길게 이어지는 황홀감이 너무나 좋았다.
‘그래. 우선은 역적들을 잡는 게 급하니까…’
공주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을 하고 결국 참아냈다.
광혼랑과 소혼랑은 기수 일행을 따라 화양문으로 갔다.
무림맹 군웅들은 심상치 않은 마기를 내뿜는 여인을 두 명이나 대동하고 돌아온 기수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맞았다.
주일비가 나서서 물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천마교 혈천제 휘하의 두 마령입니다.”
“으음….”
주일비뿐만 아니라 다른 장문인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수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천마교 측에서 휴전에 동의했습니다!”
주일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수는 천마교 교주와 합의한 내용을 모두 얘기해줬고, 무림맹 군웅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