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16
기수가 보기에 천마교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사람이 적어도 3분의 2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머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 중심에 주일비가 있었다.
“천마교 교주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기수는 ‘적어도 매복이니 기습이니 떠들어대던 너보다는 신사더라.’하는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참고 말했다.
“그를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믿으십시오.”
주일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궁주님이야 믿을 수 있지요. 하지만 천마교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기수는 살짝 내공을 끌어올린 후 다시 말했다.
“만약 천마교가 식언을 한다면 내 손에 모두 죽을 것입니다.”
주일비의 안색이 굳었다.
기수의 몸이 은은한 푸른색으로 빛나면서 위압적인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좌우에 서있던 장문인들도 다들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이라 기수의 그런 기도 변화를 즉시 읽고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일비는 기수가 말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천마교가 식언을 하면 다 죽이겠다.
일견 광오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얘기였다. 그리고 뒤집어 생각하면, 무림맹 역시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재미없다는 일종의 협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기수가 현현각주를 이긴 고수이다 보니 무슨 말을 하건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두 번, 세 번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수가 주일비와 장문인들을 향해 약간은 누그러든 기세로 말했다.
“무림맹과 천마교는 적의 농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동안 무림맹은 사마연합과 싸워 왔습니다. 그것은 천마교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갈세가가 그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마연합에서 천마교가 빠져나왔지만 제갈세가,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주일비와 장문인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런 식으로 구분한다고 보면 오히려 적의 수가 줄어들어서 고맙다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무림맹의 가장 큰 적을 따지자면 현현각을 꼽아야 했다.
기수가 각주와 루주, 징잡이들을 몰살시키는 바람에 그 다음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천마교 쪽으로 검극을 옮겼지만 그들이 기수 말대로 사마연합에서 분리되고, 더 이상 싸우지도 않겠다고 한다면 굳이 강적에 시비를 걸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미 싸워봐서 알지만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에는 고수의 수가 부족했다.
즉, 무림맹 입장에선 만만한 적인 셈이다.
주일비가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사실, 진짜 나쁜 놈은 제갈세가지요.”
그러자 소림방장이 맞장구를 쳤다.
“또한 가장 무서운 놈들이기도 합니다. 사마연합을 결성하고 음종을 끌어들이기까지 했으니까요. 아미타불…”
기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자기가 한 얘기의 맥락을 알아차리고 벌써 적에 대한 포장을 시작하는 걸 보니 역시 장문인 자리엔 아무나 앉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마교가 아닌 제갈세가가 적이라면 그 실체가 어떻건 일단 좀 띄워줘야 나중에 이기고 나서도 어깨를 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월드컵 조 추첨 때 ‘나쁘지 않은 조다.’라고 평해놓고 막상 대회가 다가오면 상대국의 강점만 부각시키는 것과 비슷했다.
주일비가 기수에게 물었다.
“혹시 녹림72채나 수로맹에 대해서도 바른 길을 제시해 줄 의향이 있으십니까?”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이젠 아주 거저먹으려고 그러시네? 후후…’
어쨌거나 무림맹이 제갈세가를 새로운 타겟으로 삼았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그들과도 기회가 되면 얘기를 해 볼 생각입니다. 사실, 삼황맹을 빼면 다들 나중에 추가로 영입되어 이용당한 면이 크니까요.”
“맞습니다.”
기수는 주일비와 장문인들의 시선, 특히 소혼랑과 광혼랑을 향하는 시선이 많이 누그러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약삭빠른 거고, 어떻게 보면 현명한 처신이었다.
덕분에 포로 인수, 인계 절차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무기는 돌려주지 않았지만 기수에게 점혈 당했던 자들 중에 천마교 출신은 모두 뇌옥에서 나와 소혼랑과 광혼랑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 소혼랑과 광혼랑이 기수에게 다가왔다.
소혼랑이 사매들에게 말했다.
“본교와 혈매궁 궁주만 아는 비밀 신호를 전달해줄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기수가 손짓을 했고 사매들은 간격을 멀찍이 비켜섰다.
소혼랑이 종이 한 장을 펴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적힌 그림을 네가 머무는 객잔 벽에 그리면 우리 쪽에서 사람이 갈 거야. 만나야 할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해.”
기수가 보니까 3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물결 무늬였다.
“그림이 너무 쉬운 거 아냐?”
소혼랑이 종이를 접어 감추며 말했다.
“상관없어. 한 번 만나면 다음엔 바뀌니까.”
옆에서 광혼랑이 말했다.
“그런데 너. 굉장하더라. 무림맹에서 방귀 깨나 낀다는 놈들이 꼼짝도 못하던 걸?”
“하핫! 내가 원래 좀…”
“그런데 저 여자들은 다 뭐야? 너 설마…”
“하핫! 내가 원래 좀…”
“나쁜 자식!”
“워우! 워우! 사람을 해독제로 사용하려던 분들이 입에 담을 소리는 아닌데.”
소혼랑이 살짝 눈을 깔며 물었다.
“너. 우리 보고 싶지 않았어?”
“당연히 보고 싶었지.”
소혼랑과 광혼랑은 배시시 웃었다.
기수도 옛 생각이 나서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민감하게 반응하던 혈천제와 달리 소혼랑과 광혼랑은 사매들을 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반응이야.’
솔직히 현대도 아니고 일부다처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인데 공주의 반응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신분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부마는 첩을 두지 못한다는 관습이 있을 정도니까 유별나게 구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자기가 그녀에게 맞출 수는 없는 일.
제발 사매들의 자중하는 모습이 앞으로도 쭉 이어지기만을 속으로 바랐다.
천마교 사람들이 돌아간 후 기수는 사매들과 한 자리에 앉았다.
공주가 물었다.
“궁주. 계획대로 잘 되어간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무림맹과 천마교가 제갈세가를 공동의 적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무림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거야. 한귀비 패거리가 기어 나올 수밖에 없어.”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정을 혼자 마음대로 결정한 것은 약간 불만이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괜찮은 작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한귀비를 죽자 살자 쫓은 것도 그녀의 배후를 캐내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그들이 제 발로 걸어 나와 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탁지연이 기수에게 물었다.
“녹림72채나 수로맹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을까?”
이미 사마연합이 깨진 지금, 그들마저 돌아선다면 제갈세가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오합지졸들이라 제갈세가가 밀린다는 판단이 들면 언제든 등을 돌릴 거야.”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서 실제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확실히 알고 있었다.
수로맹은 배를 다루는 전투라면 몰라도, 땅위로 올라가서 싸우라면 그저 머릿수 채우는 정도에 불과했다.
녹림72채도 산적들의 모임일 뿐이니 역시 수적 우위 말고는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없는 셈이었다.
추매가 기수에게 물었다.
“궁주. 큰일 했는데 피곤하겠다. 그치?”
기수는 슬쩍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아냐. 피곤하지 않아. 나는 잠시 함양에 다녀왔으면 하는데…”
“거긴 왜?”
“어르신을 만나서 물어볼 일이 한 가지 있거든. 그때 너무 급해서 얘기를 못 했어.”
“그 먼 데를 언제 다녀온다고 그래? 그리고 꼭 지금 당장 가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러자 다른 사매들의 눈빛도 변하기 시작했다.
기수도 물론 그녀들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직 증거를 없애지 못한 상태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일단 목욕물부터 좀 받아주면 안 될까? 내가 물속에서 뭔가 시험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었어. 그것만 해보고 너희들을 부를게. 괜찮지?”
“물을 데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찬물도 괜찮아.”
그렇게 기수는 증거를 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물이 좀 차다고 느끼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뭔가 시험해본다고 했으니까 그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기수는 오행류 중 화류를 양손으로, 물속에서 발출했다.
불길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화력은 좋았다.
금방 수면에서 김이 솟아오를 정도였다.
‘현대로 돌아가면 도시가스요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컵라면에 부을 물도 얼마든지 끓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있어 봐. 여기서 조금만 더 강해지면 합비 어르신처럼 손에 잡힌 물건을 내부에서부터 익혀버릴 수 있는 거 아닐까?’
물속에서 화류를 시전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 감각이 화염으로 겉을 그을리는 게 아니라 속에서부터 익히는 방식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주었다.
기수는 몇 차례 반복해서 그 차이를 시험해보았다.
물이 금방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면서 알몸의 사매들의 주르르 입장했다.
“궁주. 뭐 해?”
“어머! 진짜로 연공중이었네? 미안.”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나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앗! 뜨거워. 물을 펄펄 끓여놨네. 데겠다.”
그러자 공주가 다가와서 물에 손을 담그고 한음빙정공을 시전했다.
“이렇게 식히면 돼지.”
부글거리던 수면은 금세 가라앉았다.
찻잔에 든 물을 순식간에 얼음으로 만들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기수가 조심스럽게 부탁해보았다.
“저기… 나 연공하게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대답은 아투사가 했다.
“오늘은 내가 1번을 뽑았어요.”
그러더니 목욕통 안으로 들어와 안겼다.
“난 그걸 물은 게 아니라…”
아투사는 기수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로 입을 막아버렸다.
결국 기수는 연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각.
호운혜는 당운영을 찾아갔다.
“너. 혈매궁 거처에 찾아갔었지?”
“언니도?”
“당연하지. 그런데 어떻게 됐어? 기소협 만나 봤어?”
“만나기는 했는데… 홍안산에서 만났던 그 계집애가 나서서 설쳐대는 바람에 나올 수밖에 없었어. 언니는?”
“나도 비슷한 상황이었지. 너. 그냥 이렇게 물러설 생각이니?”
“아니! 절대로…”
“그러면 우리도 뭉쳐야 돼.”
그러자 당운영의 볼이 홍조를 띠었다.
“뭉친다는 게 무슨 말이야?…”
“그냥 글자 그대로지. 그 여우같은 년들 여덟 명이 우리 오빠를 둘러싸고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판에 너와 내가 따라 행동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
당운영은 그저 약을 먹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혈매궁의 마녀들이 자기에게 대한 걸 생각하면 기수 근처로도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둘이 여덟 명을 이길 수 있을까?”
“안 돼지. 우리도 사람을 모아야 돼.”
“사람을 모은다고? 우리 편 되어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일단 한 명 알아. 보타문에 시커먼 계집이 있어.”
당운영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화양문의 양소저도 기소협과 뭔가 있는 것 같던데…”
“그때 내기했던 사람들 모두 의심스러워. 십절금왕문의 백서린도 분명히 했을 거야.”
“그럼 언니하고 나까지 합쳐서 모두 다섯 명인가?”
“그래. 그 정도면 혈매궁의 그 어중이떠중이들보다 훨씬 나을 거야.”
당운영이 기대감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 모아서 얘기해보자!”
투약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녀 입장에선 잠시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섯 미녀는 양여옥의 객청에 모였다.
호운혜가 얘기를 꺼내자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우선 사하는 호운혜와 감정의 여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림없는 수작이라며 콧방귀만 뀌었다.
양여옥과 백서린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양여옥은 기수와 정자에서 열렬한 입맞춤을 나누었기 때문에 굳이 이들과 연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백서린은 더했다. 장원 밖에서 만나 뜨거운 하룻밤을 보냈기 때문이다.
기대와 달리 호응을 얻지 못하자 호운혜와 당운영은 당황스러웠다.
“야. 너희들. 정신 차려. 지금 뭔가 착각에 빠져 있는 모양인데… 기소협은 혈매궁 마녀들한테 눈과 귀와 입이 모두 막혀 있어서 너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백서린이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흥! 좋아. 그럼 시험해보자.”
“어떻게?”
“내일 각자 최대한 예쁜 옷을 입고, 가장 잘 받는 화장을 한 다음에 여기 다시 모이자. 우리 다섯 명이 혈매궁 거처로 가는 거야. 그래서 기소협의 반응을 보자고.”
“좋아!”
백서린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