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27
호운혜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능소화는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목이 바짝 바짝 말랐던 것이다.
그녀는 기수가 현현각주를 제압할 때 현장에 있었다.
음종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마공에 결국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던 순간, 그야말로 천신처럼 나타나 생명을 구해준 영웅. 게다가 젊고 잘 생기기까지 한 그 남자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호운혜도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얘기를 꺼냈다.
“정말 속상하더라. 여자 쪽에서 용기를 내서 고백하러 갔는데 나는 거들떠도 안 보고 다른 여자에 대해서만 물어보다니… 정말 너무해.”
“그가 뭐라고 했는데?”
“야! 너도 참 웃긴다. 이럴 때는 날 위로해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받은 상처보다 그의 반응이 더 궁금해?
“아! 미, 미안해. 많이 속상했지?”
“됐어. 그런 가식적인 위로.”
“아냐. 진심이야.”
호운혜는 곧바로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너처럼 마음씨 고운 애를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니? 게다가 아미파 수제자에 얼굴까지 예쁘니… 거기 비하면 나는…. 휴우~”
호운혜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능소화는 그녀를 위로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너야말로 무림맹 남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잖아.”
“그런가? 호호호!…. 하지만 기공자가 아니면 나머지는 다…”
능소화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혈매궁주는 그 여인들과 친한 사이 아닌가?”
“어머! 얘는… 설마하니 자기 제자들과 사귈 리가 있겠어?”
“제자가 아니라 사매라는 것 같던데…”
“호호호!… 너도 조사를 좀 했구나?”
“아냐. 그냥 들리는 말에…”
“제자건 사매건 같은 문파 사람끼리 그런 관계는 아니겠지. 아마도…”
말을 대충 흐린 호운혜는 본론을 꺼냈다.
“자꾸 너에 대해 물어보기에 내가 소개시켜줄까 하고 물었지. 그랬더니 기공자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제발 기회를 만들어 달라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너한테 완전히 푹 빠진 것 같더라. 안 그러면 나를 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냐?”
“저, 정말 그가 그랬어?”
“내가 없는 소리 만들어냈겠니?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는데…”
“그, 그랬구나…”
“그런데 넌 남자한테 관심이 없고 사부님이 정해주는 대로 시집가겠다고 하니까 그대로 가서 전해주면 되겠네. 내게도 다시 기회가 생기는 거야. 호호호!…”
능소화는 호운혜가 다행이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다.
“아, 아냐. 만약 그가 만나고 싶어 한다면 나갈 용의가 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싫다고 했잖아?”
“싫다고 한 적은 없어.”
“요 앙큼한 것!”
“그런 게 아니라… 혈매궁주 정도의 고수라면 우리 아미파 입장에서도 친하게 지내 둬서 나쁠 게 없으니까…”
“아하! 어디까지나 사문을 위해서다?”
“당연하지.”
“호호호!… 그 마음이 참 갸륵하네. 그렇다면 내가 또 모른 척 할 수 없지.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줄 테니까 예쁘게 꾸미고 준비해.”
호운혜가 일어서자 능소화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고마워. 신경 써 줘서.”
“대신 너. 나한테 빚진 거다. 그것도 아주 크게.”
“알았어. 잘만 되면 절대 잊지 않을게.”
호운혜는 미소 지으며 아미파 거처를 떠났다.
기수는 무림맹주 초청을 받고 회의장으로 갔다.
회의실엔 맹주 주일비와 소림방장, 무당파 장문인, 그리고 동창의 염백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혈매궁 측에서 기수와 공주, 탁지연의 세 명이 참석했다.
무림맹 자체 협의는 모두 끝난 상태고, 출정 전에 외부 세력과의 협력을 최종 조율하는 자리였다.
주일비는 지도를 펼쳐놓고 무림맹이 담당한 구역들을 일일이 검지로 짚으면서 설명해주었다.
이어서 염백호도 동창과 관군이 담당하기로 한 지역을 차례로 얘기했다.
기수는 보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가 넓다고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
무림맹과 동창이 이렇게 구역을 나누어 뒤진다면 놈들의 꼬리를 밟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구역의 겹치고 비는 문제를 상의하여 합의한 주일비가 기수를 향해 물었다.
“혈매궁은 장차 어떻게 할 계획이십니까?”
기수는 살짝 당황했다.
‘우리는 달랑 9명인데 뭘 어쩌라고….’
그런데 주일비, 소림방장, 무당장문, 염백호가 바라보는 눈빛은 그게 아니었다.
자기네들만 고생시켜놓고 혈매궁은 놀 거냐고 묻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수는 이게 양지로 드러나서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 감내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점만 있기는 어려운 것이다.
기수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우리는 별도로 움직일 것입니다.”
주일비가 곧바로 말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얘기를 해주셔야 우리 무림맹과 동창도 거기에 맞출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적을 추적할 것입니다.”
염백호가 물었다.
“어떤 적을 말하는 겁니까?”
“이곳 화양문을 되찾을 때 사로잡은 포로들이 있습니다. 천마교 소속은 돌려보냈고, 다른 3대 방파의 포로들은 아직 뇌옥에 있습니다. 처음엔 그들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차라리 풀어주고 뒤를 밟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염백호가 손을 내저었다.
“잠시만요. 천마교 포로를 잡았는데 풀어줬다고요?”
“그렇습니다.”
염백호는 어이가 없는지 무림맹주와 기수를 번갈아 봤다.
주일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이제 자기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하겠느냐는 의미였다.
염백호는 언성을 높였다.
“천마교는 조정에서 대대로 수배령을 내리는 반도입니다. 그들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같은 죄를 저지른 것과 같소!”
기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나를 체포하기라도 할 생각이오?”
“물론이오! 혈매궁의 죄에 그것까지 추가하여 당장 상소를 올릴 것이오. 그리고 당신을 구금하겠소!”
염백호는 서슬이 시퍼렇게 호통을 쳤다.
동창의 관리들을 죽인 죄도 위중하지만 거기에 천마교와 한 통속이라는 죄까지 추가된다면 그 죄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기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과연 나를 잡을 능력이 있을까?”
염백호는 기가 막혔다. 감히 동창의 백호인 자신을 앞에 두고 이런 광오한 말을 내뱉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무림과 관이 빙탄불상용의 관계라고는 하지만 적당한 죄목을 걸고 무림맹을 총동원한다면 아무리 혈매궁주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염백호는 한 곳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공주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염백호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천마교가 오랜 세월 황실의 큰 근심거리라는 사실을 몰랐단 말이오?”
기수를 향해 말했지만, 사실은 공주 들으라는 소리였다.
기수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그렇게 큰 근심거리라면 동창은 뭘 하고 있었기에 아직까지 그들을 다 잡지 못한 것이오? 남이 잡은 포로 거저 먹으려 하지 말고 직접 나가서 당신들 손으로 잡으시오.”
염백호는 불같이 화가 났다.
그러나 공주의 눈빛이 더 무섭게 변했기 때문에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황실의 당사자가 혈매궁 안에 함께 있는데 더 몰아붙이는 것도 나중에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그는 더 이상 천마교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한 마디 했다.
“천마교는 그렇다고 쳐도, 남은 무리들은 우리 동창에게 넘겨주시오. 우리 측에 노련한 심문 기술자들이 많이 있으니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요.”
기수는 손을 내저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필요한 포로가 있으면 직접 잡으시오.”
동창의 심문이라면 지금도 이가 갈렸다. 적에게 파천강기가 아닌 잔백지를 날린 것은 하수들에 대해 불필요한 살생을 피하려고 그리 한 것인데, 동창에 넘겨줄 거면 차라리 죽이는 게 더 자비로운 행동이었을 것이었다.
옆에서 주일비가 염백호를 거들었다.
“그들을 심문하여 뭔가 나온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제갈세가가 그렇게 만만하게 병력배치를 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무림맹도 필요하다면 직접 포로를 잡으십시오.”
주일비의 얼굴도 굳었다.
기수는 문득 자기가 잘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입장에선 무림맹과 동창 모두 목적 달성을 위해 협조해야 하는 사이인데 내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상황을 자초할 이유가 있나?’
그냥 대여섯 명 쯤 골라서 동창에 넘겨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쓸 만 한 정보가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뭔가 오기 같은 게 솟아올랐다.
‘내가 살려주겠다는데 너희들이 무슨 참견?’
기수는 살인을 꺼려하지 않았다.
무림에 온 뒤 가치관이 달라져서, 일단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상대를 죽였다. 설령 그게 여자나 노인일 지라도…
하지만 살려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외부의 압력 때문에 결정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혈매궁주의 결정사항을 무림맹주나 동창 백호가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의 힘겨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라면 자신 있는데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선언하듯 덧붙여 말했다.
“우리 혈매궁은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고 그들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얻게 된 정보는 무림맹, 동창과 공유할 것이니 두 분 역시 정보를 공개해 주십시오.”
주일비는 한숨을 내쉰 후 염백호 쪽을 봤다.
한 마디 더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주의 눈빛에 주눅이 든 염백호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주일비는 결국 포기하고 기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혈매궁에서 찾아낼 정보에 기대가 큽니다.”
“저희도 기대가 큽니다. 이번 수색으로 제갈세가를 꼭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모임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탁지연이 기수에게 말했다.
“궁주. 적을 풀어준 뒤 추적하자고?”
의논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한 게 섭섭한 눈치였다.
“우리도 뭔가 해야 되잖아.”
“그렇긴 하지만…”
“구역을 맡는 것보다는 자유롭고 좋지 뭐.”
기수는 좌우를 둘러본 후 덧붙였다.
“대충 추적하는 흉내만 내도 되고…”
그러자 공주가 발끈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대로 찾아야지.”
역모를 밝혀내야 한다는 절실함에 있어서 기수와 공주 사이엔 늘 차이가 있었다.
기수는 곧바로 자기의 발언을 정정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적의 은신처를 찾아낼 거야. 놈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지을 리도 없으니까 말야. 하핫!…”
공주는 기수를 한 번 흘겨본 후 거처로 돌아가는 내내 탁지연과 의논했다.
추적할 때 조는 어떻게 짜고 연락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엉뚱하게 났다.
“궁주. 오늘 특별히 음양대법 좀 부탁해.”
“그, 그게 적을 추적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내공의 깊이에 따라 적에게 들키지 않고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가 결정되잖아.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리고 발각될 경우 접전을 벌일 수도 있으니까…”
“흐음! 이유가 합당하네, 오케이! 콜!”
모르는 단어가 나왔지만 뜻은 통했기 때문에 공주와 탁지연 모두 미소를 지었다.
쉬지 않고 돌아가며 대법을 반복한 기수는 다음날 아침 잠든 사매들을 놔두고 혼자 밖으로 나갔다.
포로들의 상태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하인들이 경쟁하듯 달려와서 손에 쪽지를 건네주었고, 기수는 내용을 확인했다.
양여옥과 전에 만났던 그 정자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기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쯤 다들 몸이 달았겠네. 후후…’
기수는 정자 쪽으로 가지 않았다.
지난밤 사매들에게 워낙 성실하게 대법을 펼쳐주고 나니까 하루쯤은 쉬고 싶었다.
그러나 감옥들을 둘러본 지 10분도 안 되서 양여옥이 나타났다.
하인들에게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궁주님. 나오셨군요.”
주변에 화양문 문도들이 많이 있어서 겉으로는 조신한 태도를 취했지만 얼굴엔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양소저. 오랜만입니다.”
“얘기는 들었어요. 포로들을 전부 풀어주신다고요?”
“예. 오늘 저녁에 시행하려고 합니다.”
“왜 저녁이죠?”
“그래야 사람들 눈을 피해 잘 숨어서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하핫!…”
양여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추적하는 사람들이 몸을 숨기기 쉬우라고 시간을 그렇게 택한 것 같았다.
“궁주님도 가시나요?”
“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가야겠지요.”
고작 9명인데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양여옥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번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잠깐 시간 내서 함 해주면 안 되겠냐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주변에 눈과 귀가 많아서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슬쩍 다른 얘기를 했다.
“아미파의 능소저가 궁주님을 뵙고 싶어서 몸이 달았던데…”
“아미파의 능소저가 누군가요?”
기수는 금시초문인 척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