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28
능소화.
그녀의 미모는 무림맹의 여인들 중 단연 최고로 꼽을 수 있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옷도 검소한 아미파 도복만 입어서 백서린이나 양여옥에 비해 약간 처지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기수는 미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진가를 잘 알았다.
비룡검문 호법 시절, 용봉련의 련주까지 맡으면서 그녀와 가까이 할 기회가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외모 상태가 메롱이고, 아미파의 규율이 엄격하기 때문에 아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그녀 쪽에서 먼저 만나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양여옥이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미파의 능소화 모르세요? 미모로 유명한데…”
“글쎄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어쨌거나 아미파 제자라면 이번 수색작전의 협조 문제도 있고 하니 만나봐서 나쁠 건 없겠지요.”
양여옥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기수가 정말로 능소화를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능청을 떠는 게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입장에선 능소화가 됐건 누가 됐건, 기수를 끌어올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합가촌에 다녀온 이후 당운영과 친해졌다.
흥분제를 먹은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건 당운영이 일부러 먹인 게 아니라 자기가 기수의 잔을 대신 마신 것이었다. 그리고 다리를 걸어서 복수도 이미 했다.
이전엔 잘 몰랐지만, 자신과 당운영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원이 아닌 변방에 위치한 문파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난주나 사천이나 무림맹까지 한 번 가려면 보통 사람 걸음으로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먼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약간은 소외되는 듯 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런 얘기를 당운영과 나누면서 공감하게 되고 급격히 친해졌다.
그래서 기수에 대한 얘기도 많이 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받아내는 호운혜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당운영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기수의 그 무시무시한 흉기를 받다 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쾌락 대신 고통이 느껴지는데, 호운혜는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사하에겐 못 물어봤지만 백서린도 한계가 있음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한두 명 더 추가된다고 해도 자신이나 당운영, 백서린 입장에선 불만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제가 능소저한테 얘기를 전할게요. 두 분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예. 기회가 되면 만나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기수는 거처로 돌아갔다.
사매들 모두 깨어나서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응. 오늘 저녁에 풀어줄 포로들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봤지.”
공주가 탁자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서 풀어줘야 무림맹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흩어질 거야.”
“좋아. 맹주에게 부탁해놓을게. 우리는 거기 먼저 가서 숨어있자고.”
“점심 먹고 출발하면 되겠네.”
기수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나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저들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르는 거잖아? 삼황맹과 녹림72채와 수로맹이 각각 따로 갈 가능성이 크고, 그 안에서도 또 소속에 따라 길이 갈릴 수도 있어. 그럼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하지?”
“그거야… 우리도 흩어져서 추적해야지.”
“그렇게 되면 내가 여기 있으면서 여러 갈래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수합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탁지연이 동의했다.
“맞아. 우리가 정보를 수집만 해서는 소용이 없는 거잖아. 무림맹, 동창과 서로 교환해야 가치가 있는 거라고. 그러려면 궁주는 여기 있어야 돼. 그래야 무림맹주와 염백호를 상대할 수 있지.”
기수가 말했다.
“너희들한테만 어려운 일을 맡겨서 미안한데…”
공주가 기수의 말을 잘랐다.
“아냐. 듣고 보니 궁주는 여기 있는 게 맞네. 한귀비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단지 추적일 뿐이니까 우리 여덟 명으로 충분할 거야.”
탁지연이 슬그머니 기수에게 물었다.
“궁주. 혹시 도움 필요해? 나도 남을까?”
기수는 씩 웃었다. 탁지연의 속셈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공주와 동창 출신 다섯 사매는 역모를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공주에겐 자기 집안과 관련된 일이고, 다섯 사매는 오랜 시간 동창의 요원 교육을 받다 보니 제국에 해가 되는 무리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자신과 탁지연, 그리고 아투사는 그녀들만큼 절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탁지연이 하는 얘기는 ‘오랜만에 둘이만 즐겨볼까?’라는 말과 같았다.
기수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공주가 나섰다.
“탁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함께 가야지. 8명이 되어야 저들이 두 갈래, 세 갈래를 넘어 4방, 8방으로 흩어져도 전부 따라갈 수 있는 거잖아.”
탁지연은 곧바로 욕심을 접었다.
그녀가 혈매궁에 속한 이후 한 가지 배운 사실은 여자들 사이에도 의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따로 놀아서는 절대로 견딜 수 없었다.
“그래. 나도 당연히 가야지. 무림맹주와 염백호 다루는 것쯤은 궁주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응. 열심히 해볼게.”
공주가 말했다.
“그럼. 떠나기 전에 우리…”
그러면서 눈이 가늘어지고 입엔 미소가 걸렸다.
기수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누가 대법을 하쟀나?”
그러자 다른 사매들도 곧바로 동조했다.
“그래. 떠나기 전에 사기 진작이 필요해.”
“난 목이 말라.”
기수는 뒷걸음질을 쳤다.
“목이 마르면 차를 마셔.”
“차는 싱거워. 다른 걸 마시고 싶어.”
결국 기수는 여덟 명에게 붙잡혀 침상으로 끌려갔다.
점심을 먹고 몹시 섭섭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사매들을 전송한 기수는 그녀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해맑게 웃는 낯으로 돌아서서 무림맹주를 찾아갔다.
주일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받아들였지만 막상 포로들이 집결해 있는 모습을 보니 속이 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힘이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아무리 무림맹주라고 해도 혈매궁주의 비위를 거스르기는 어려운 상황.
그는 100명의 개방 제자들이 포로를 인솔하여 기수가 정해준 지점까지 데리고 가서 전원 석방해주도록 명령하고는 바로 들어갔다.
기수는 포로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난 혈매궁 궁주 기수다.”
포로들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소문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들을 지풍으로 제압한 당사자가 앞에 있다 보니 다들 불안하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지금 남의 전쟁에 헛되이 피를 흘리고 있다. 제갈세가는 역모를 획책하면서 너희들을 화살받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포로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너희들에게 조정을 뒤엎겠다는 의도까지는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풀어주기로 마음먹었으니 모두들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도록 해라.”
물론 그들이 순순히 귀향할 리는 없었다.
기수는 포로들로부터 압수했던 무기를 연병장 한가운데 쌓아놓도록 지시했었는데,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다시 말했다.
“만약 계속 제갈세가와 붙어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면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내 손에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죽게 될지 잘 보거라.”
기수는 쌓인 무기를 향해 양손에서 불기둥을 만들어 쏘기 시작했다.
화염과 무시무시한 열기가 사람 손에서 뿜어져 나오자 포로들은 여기저기서 경악성을 터뜨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포로들뿐만 아니라 개방 제자들과 무림맹 사람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압수한 무기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자루가 나무인 것은 곧바로 화염을 내뿜었고, 구리와 쇠는 연속적인 열기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수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기분으로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자 닳아 오른 금속 끝이 구부러지는가 싶더니 외곽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엔 당사자인 기수 본인도 놀랐다.
‘가, 가만있어 봐. 철의 녹는점이 몇 도지? 난 도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능력을 가지게 된 거야?’
하지만 겉으로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더욱 내공을 집중하여 마침내 무기 무더기의 위쪽부터 형체를 뭉그러뜨리게 되었다.
그 정도까지 되자 기수도 피곤함을 느꼈다. 내력 소모가 엄청났던 것이다.
적당히 불 쇼를 중지한 기수는 포로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제갈세가 옆에 있으면 모두 이렇게 될 것이다!”
포로들은 다들 겁에 질렸다.
화염을 뿜어 무기를 쇳물로 녹이는 괴물.
이런 자와 적이 되어 싸우는 일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반대로 개방과 무림맹 사람들은 든든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무림맹주는 혈매궁과 어딘가 모르게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일반 무사들 입장에선 이보다 더 믿음직한 아군이 없는 것이다.
개방 방도들이 무리를 이끌자 포로들은 고분고분 말을 잘 따랐다.
그렇게 모두를 보낸 후 기수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무림맹 사람들이 우르르 쇳덩이로 몰려들었다.
화양문 하인이 물 한 동이를 들고 와 뿌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김이 나며 금세 증발해버렸다. 물을 십여 동이나 뿌린 뒤에야 겨우 전부 식힐 수 있었는데, 치우려고 해도 전체가 녹아 붙어서 서너 명의 힘으로는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거처로 돌아가는 기수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양여옥, 호운혜, 백서린, 사하, 당운영이었다.
“오빠. 방금 그거 봤어요. 정말 굉장했어요!”
“그랬나? 하핫! 내가 좀…”
“그런데… 왜 우리 초청에 응하지 않아요? 사매들이 그렇게 무서워요?”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굴 무서워한다고 그래? 단지 수색대 일로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했을 뿐이야.”
“지금은 시간 낼 수 있죠? 보니까 마침 마녀… 아니 사매들도 옆에 없는데.”
“아! 그녀들은….”
기수는 무심코 말하려다가 중간에 생각을 바꾸었다.
사매들이 전부 포로석방 장소로 갔고, 지금 자기는 혼자라는 사실을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자신의 휴식장소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무림맹 내에 혈매궁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굳이 그 비밀을 공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들도 출정 준비로 바쁘거든.”
“그럼 지금 우리와 함께 가요 네?”
다섯 명이 예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좀 피곤하거든. 운기조식을 하고 나서 시간을 내볼게.”
아무래도 조금 전 용광로 쇼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여인들도 기수의 그런 상황을 이해했다.
“저녁엔 꼭 와야 돼요. 그 정자로…”
“최대한 노력해볼게.”
호운혜가 확실히 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였다.
“아미파 능소화가 우리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미파 누구?”
“호호호!… 와보면 알 거예요.”
기수는 절박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 마디 했다.
“너무 기다리지는 마. 못 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그녀들과 헤어져 거처로 돌아온 기수는 일단 몸 상태부터 점검했다.
오랜만에 내공을 집중적으로 운기해서 그런지 약간 지친 느낌이 있으면서도 기분은 의외로 상쾌했다.
운기조식을 한 뒤 오행류 상생순환을 한 바퀴 돌리자 날아갈 것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밖을 보니 어두워지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다.
‘너무 빨리 회복했는걸.’
사매들이 없고 무림맹 여인들은 초청을 하니까 왠지 모르게 바람 피는 기분이 들어서 묘하게 가슴이 설레었다.
더구나 능소화가 기다린다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기수는 목욕통에 들어갔다.
느긋하게 몸도 씻고 연공도 하면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물속에서 만든 불기둥은 어딘가 모르게 예전보다 세밀한 조절이 잘 되는 느낌이었다. 용광로 쇼 하면서 강하게 한 번 운용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이 금방 끓어오르자 기수는 한음빙정공을 운기했다.
공주만큼 빠르지는 않더라도 물은 곧 식었다.
아쉬운 점은 화류 태포련의 느낌이 전부 사라져서 집중력을 다시 끌어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강이나 바다에 들어가서 해봐야겠어.’
강이 아니라 시냇물만 되어도 식히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생태계엔 약간 위협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혼자 데우고 식히면서 물장난을 하다 보니까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기수는 몸을 깨끗이 씻고 새옷으로 갈아입은 뒤 정자로 향했다.
기수가 나타나자 여인들은 거의 함성이라도 지를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표정도 곧바로 지웠다.
그 자리에 능소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 여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기수가 자기들에게 오기만 한다면 능소화는 굳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불러내기 힘들던 기수가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보니, 호운혜의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여인은 사전에 의논한 대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우리들은 방해만 될 테니까 두 분이 좋은 대화 나누세요.”
그리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모두 정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들은 기수를 오늘 한 번만이 아닌, 좀 더 확고하게 잡아두기 위해 잠시 욕망을 억누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기수는 그녀들의 그런 행동에 놀랐다.
‘지금 다들 엄청나게 하고 싶을 텐데… 어떻게 참는 거지?’
여자가 흥분하면 남자보다 더 안달 낸다는 사실을 잘 아는 기수이기에 다섯 미녀의 인내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