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35
기수가 감정을 추스르느라 애쓰는 사이, 무림맹 사람들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기수를 따라왔다. 사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쓰러진 비룡검문 제자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번에도 큰 승전을 거둔 한 편에서 일부 인원이 몰살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비룡검문 문주 진백과 순우광의 사제인 조치성은 제자와 사형제의 시신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무림맹주 주일비가 기수에게 물었다.
“궁주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제갈세가가 새로 영입한 고수들이 저지른 짓입니다.”
군웅들은 웅성거렸다.
그리고 기수와 혈매궁 여인들을 보는 시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 모용세가가 당했을 때는 그냥 개별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비룡검문이 당하는 사건까지 겹치고 보니 확실해졌다.
혈매궁과 가까운 문파는 응징을 당하는 것이다.
기수가 비룡검문 문주, 모용세가 소가주와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은 무림맹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기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 노린 건가?’
우선 혈매궁과 무림맹의 사이부터 갈라놓고 보자는 게 제갈세가의 계획인 듯 했다.
기수는 냉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잘못 짚었다.’
외부에서 보기엔 혈매궁과 무림맹의 연합이 위협적으로 느껴졌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혈매궁은 혈매궁대로, 무림맹은 무림맹대로, 동창을 동창대로 저마다의 길을 고집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굳이 이런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갈라놓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자극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알도록 해주마.’
복수심을 차갑게 갈무리한 기수는 무림맹주에게 말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화양문에 위험이 닥칠지 모르니 속히 병력을 회군해 주십시오.”
“궁주님은 가지 않으십니까?”
“저희는 주변을 좀 더 수색해보고 싶습니다. 아! 저희가 넉넉하게 준비해오지 못해서 그런데, 건량을 좀 나누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식량까지 준비해서 아주 끝장을 보겠다는 얘기로 들렸다.
주일비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제까지는 혈매궁으로 인해 무림맹 내에서의 맹주 위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혈매궁주가 더 이상 무림맹에 폐를 끼치기 싫다는 투로 따로 행동할 것임을 암시하자 그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절세고수의 존재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궁주님. 저희들도 돕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곳은 적지인 만큼 소수로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편합니다.”
“하지만…”
기수는 주일비의 표정과 말투를 보고 그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참 변덕 심한 계집애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지금 공연히 무림맹주와 긴 얘기 섞고 싶지 않아서 짧게 한 마디로 끊어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주일비는 기수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그럼 화양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저희를 불러주십시오.”
“그리 하겠습니다.”
주일비가 건량과 술을 모으는 동안 기수는 비룡검문의 문주 진백을 위로했다.
진백은 담담하려 애썼지만 깊은 슬픔을 전부 가리지는 못했다.
“나도 함께 가고 싶네.”
“제게 맡겨주십시오. 비룡검문의 호법으로서 확실하게 복수하겠습니다.”
진백은 긴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장례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비룡검문 제자들은 사형제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무림맹 군웅들과 함께 철수했고, 고원엔 기수와 여덟 사매만 남게 되었다.
기수는 황량한 고원을 둘러본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가라고 하긴 했지만 막상 혈매궁만 남고 보니 뭔가 좀 쓸쓸하기도 했다.
탁지연이 다가와 물었다.
“궁주. 죽은 비룡검문 사람들과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
기수는 그동안 비룡검문과 있었던 일들을 대략적으로 얘기해주었다.
여자 얘기는 다 빼고, 그들 사조의 검법을 자기가 전달해준 얘기는 모두 넣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궁주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네.”
“그런 셈이지.”
춘매가 말했다.
“궁주의 원수면 우리의 원수이기도 해. 전부 다 죽여 버리자!”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작정이야.”
기수는 중원무림에 온 이후 살인에 대해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강도가 되어서 민간인을 약탈한다면 그건 정말 나쁜 일이지만, 강호무림에서 상대를 죽이는 것은 그냥 자신이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죽이지 않으면 나나 내 동료가 죽게 되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현대에서도 정당방위는 죄가 되지 않는데 하물며 중원무림에서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수는 그동안 상대의 수혈을 눌러 제압하는 수법을 주로 사용했다. 무공 수준 차이가 큰 상대를 죽이는 것은 뭔가 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목표는 세 명의 사도. 그리고 그들 아래서 온갖 흉계를 꾸미는 제갈세가.
그 목표를 향해 가는데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제갈세가에서 먼저 혈매궁 주변의 모용세가와 비룡검문을 건드렸으니, 이젠 혈매궁에서 제갈세가의 주변에 있는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 그리고 청탑산 출신 고수들을 건드릴 차례였다.
주변의 잡초들을 전부 다 베어버리면 결국 목표가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연히 시간 끌 필요 없이 그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좀 쉬고, 내일 해가 뜨자마자 시작하기로 하지.”
기수는 큰 바위 아래로 가 모닥불을 피우고 쉴 자리를 잡았다.
원래 적진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위치가 드러나기 때문에 금기사항이지만, 기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불을 발견하고 적이 다가와준다면 환영이었다.
사매들은 기수와 보내는 밤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기수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냉정하게 굳은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연공에 몰두하는 모습이 무서워 보였기 때문이다.
웃고 장난치며 치마 들출 기회만 엿보던 평소의 기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샌 기수는 멀리 동쪽 하늘이 밝아오자 바로 일어섰다.
“너희들은 내공 낭비할 필요 없어. 그냥 내 뒤를 따라와.”
“알았어. 궁주.”
사매들은 기수를 따라 움직였다.
기수는 기감을 끌어 올려 사람이 많이 모인 방향을 찾았다.
청탑산 고수들을 찾을 때처럼 예민하게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 목표는 제갈세가와 협조하고 있는 삼황맹, 녹림72채중 아무라도 상관없기 때문에 딱히 고수가 아니라도 사람의 기척만 찾으면 되었다.
목표를 정한 기수는 경공을 펼쳐 날아갔다.
고원 아래, 바위산 틈바구니 건조한 협곡에 백여 명의 무리가 임시 군영을 세우고 아침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집결지 주변의 보초병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기수는 그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사람이 많이 모인 쪽부터 파고들었다.
“크아악!…”
“으윽!….”
비명이 협곡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피가 바닥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기수의 손가락이 향할 때마다 적은 영문도 모르고 몸에 구멍이 뻥! 뚫리며 즉사했다.
실제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는 자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사매들은 뒤따르며 끔찍한 광경에 다들 놀랐다.
기수는 빠른 걸음 속도로 나아갔고, 거기에 맞춰 좌우에선 한꺼번에 대여섯 명씩 파천강기에 맞아 즉사하는 모습이 거짓말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적은 맞아 싸우기는커녕 도망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너무나도 허망하고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뒤늦게 도주를 결심한 자들도 기수 시야가 미치는 곳에 있다면 파천강기를 피할 수 없었다.
협곡 위쪽의 파수꾼조차 강기에 꿰뚫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매들도 놀랄 정도의 끔찍한 살육이 이어지자 적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손을 내저으며 나서서 기수에게 말했다.
“이, 이보시오! 손을 멈추시오! 항복하겠소!”
그러나 퍽! 소리와 함께 그의 이마엔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기수의 무심한 한 마디가 들렸다.
“이미 늦었다.”
기수는 잠시 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순우광과 제자들의 넋이 있다면, 지금 죽어가는 삼황맹과 녹림도의 피가 그들 영전에 올리는 제물이라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다.
강호무림이 원래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친한 지인의 죽음에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협곡의 적을 몰살시킨 뒤에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더 많은 피를 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살펴본 후 가장 많은 적이 모인 곳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선풍비로 날아가는 도중에 기수는 내공을 한 차례 순환시켜 보았다.
적을 전부 파천강기로 살해한 것은 그들의 더러운 피를 옷이나 몸에 묻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신 일정부분 진기 소모는 각오했는데, 막상 순환을 시켜 보니 단전은 새벽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동이에 든 물을 한 바가지 퍼낸 것은 티가 나지만 연못물은 두세 바가지 퍼내도 차이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공이 정말 많이 증진된 것이다.
두 번째 적진에 뛰어든 이후에도 기수의 행동은 똑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며 앞과 좌우의 적들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때마다 서너 명씩 한꺼번에 고꾸라졌고,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적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했지만, 아까보다는 좀 더 규모가 크고 체계가 잡힌 군영이라 지휘관들이 기수에게 암기를 쏘고 배후를 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기수를 향해 날아가던 암기들 중 크고 무거운 것들은 파천강기에 막혔고, 작고 가벼운 것들은 허공에 펼쳐진 반투명한 푸른 막을 뚫지 못했다.
적 지휘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검진을 펼쳐라! 합격진으로 막아라!”
그 명령을 듣고 적은 대향을 갖추지 시작했다.
물론, 그것 역시 기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가까이는 4~5미터, 멀면 10여 미터 밖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구멍이 뻥! 뻥! 뚫려 자빠지는데 검진이니, 합격진이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방패 뒤로 숨어봤자 방패와 몸이 한꺼번에 뚫렸고, 도망치면 등에서부터 가슴 쪽으로 구멍이 뚫렸다.
그것은 마치 창칼을 든 병사와 자동소총을 든 병사의 싸움과도 같았다.
퓨퓨퓨퓩!….
“으악!….”
“크악!….”
기수를 막을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게 되자 적 지휘관이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네, 네놈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기수는 검지로 그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의 주검.”
퓩! 소리와 함께 그 지휘관도 즉사하고 말았다. 그들 사이에선 무공의 고하가 있겠지만, 기수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다 일초지적이었다.
기수가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정말 죽음밖에 없었다. 덤불에 숨은 쥐새끼 제갈세가를 찾아내기 위해 잡초를 제거하는 의미였다.
결국 두 번째 군영의 적마저 몰살하고 나자 탁지연이 호리병을 가지고 다가와 마개를 열고 권하며 물었다.
“궁주. 이거 마셔. 몸은 괜찮은 거야?”
첫 번째 적들보다 숫자가 많았기에 진기 소모를 걱정한 것이다.
기수는 병의 물을 서너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단전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확실히 이번엔 차이가 느껴졌다. 그러나 전체 진기량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고, 오행류 상생 순환을 한 바퀴 돌리자 금세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기수는 호리병의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탁지연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제 됐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탁지연이 물었다.
“계속 이렇게 할 생각이야?”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자극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줄 거야.”
탁지연은 기수의 이런 모습을 본 적 없기에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동창 출신 사매들은 달랐다.
“잘 생각했어. 궁주. 진작 이렇게 했어야 돼!”
“맞아! 어차피 이놈들은 오랑캐 아니면 산적, 수적들이잖아.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천하에 더 도움이 되는 존재들이라고.”
기수는 미소 지었다.
추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전술을 계속 유지해나갈 생각이었다.
기수는 곧바로 세 번째 목적지를 찾아냈다.
그가 움직이려 하자 동매가 말했다.
“궁주. 우리한테도 기회를 좀 줘.”
“아니. 너희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무슨 만약의 사태?”
“한귀비가 나올지, 아니면 청탑산과 연관된 고수들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때 너희들이 매화육궁진으로 시간을 좀 벌어줘야 돼.”
그러자 공주가 기수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매화팔괘진이겠지. 걱정 마. 누가 나타나건 궁주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내가 막아줄 테니까.”
기수는 사매들을 보고 씩 웃었다. 마음이 든든했기 때문이다.
“좋아. 너희들만 믿는다.”
사매들도 미소로 화답했다.
기수는 심호흡을 한 뒤 적진을 향해 다시 경공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