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36
해가 완전히 떠오른 감숙성의 황토 벌판.
기수는 삼황맹 본진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어가며 적을 쓰러트렸다.
10명도 안 되는 소규모 정찰대 수준의 적에 대해 약간은 안이하게 대처하던 삼황맹은 일진이 형편없이 무너지자 비로소 크게 당황하여 전군에 전투대형을 갖추도록 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수의 앞길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
기수는 서두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았다.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중간 중간 오행류 상생순환으로 떨어지는 게이지를 곧바로 채워넣었다.
몇 번 하다 보니 전투 중 충전하는 요령이 생긴 것이다.
물론 고수와 싸울 때는 그럴 여유가 없겠지만 삼황맹 안에서의 고수 정도로는 기수를 방해하지 못했다.
기수가 지나간 자리엔 시체 무더기가 만들어졌다.
삼황맹 무리는 그 광경을 보고 점점 압도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는 본진 전체가 주춤거리며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지휘관들이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여럿이 힘을 합쳐 싸우다 보면 힘을 빼고, 상처를 입히고, 결국엔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다가오는 적은 차원이 달랐다.
힘을 모아 싸우려고 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무슨 수법을 쓰는지 모르지만, 이삼장 이내에 있는 사람은 전부 구멍이 뚫리며 쓰러졌다.
게다가 화살을 쏘고 암기를 던져도 소용없었다.
그런 상대와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기수는 삼황맹의 뭉그러지는 진형을 보며 면밀히 좌우를 살폈다.
이 정도까지 손실을 입으면 저쪽에서도 더 이상 전력을 숨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한귀비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오행류 상생 순환을 익히기 전에는 혼자 힘으로 그녀의 은혈대법 상태를 감당하기 버거웠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자신이 있었다.
그녀와 싸울 생각을 하니 온몸이 짜릿해지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무림인이 다 되었다니까…’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목숨 건 대결을 앞두고 느껴지는 쾌감 비슷한 자극은 참으로 각별했다.
현대에 살았으면 자신의 안에 이런 기질이 있는 줄도 모르고 늙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자기를 여기로 데려와 준 신에게 잠시나마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멈추어라!”
호통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기수의 앞을 막아섰다.
기수는 경공을 통해 그들이 대단한 고수임을 알아차렸다.
나타난 자들은 모두 스무 명 정도.
가운데 선 자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으로, 학창의를 입고 손에는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저마다 옷차림과 생김새, 들고 있는 무기가 제각각인 남녀들이 반원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학창의 입은 사내는 기수가 지나온 자리를 살펴본 후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기수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혈매궁주다.”
“으으…. 네가 기수였구나.”
기수가 그에게 물었다.
“넌 제갈민이겠구나. 맞지?”
중년 사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알았느냐?”
기수는 제갈세가와 악연이 있었다.
맨 처음 강호에 출도했을 때 삼형제 중 막내 제갈륜의 죽음에 간여했던 것이다.
그 후 가주 제갈청은 홍안산에서 본 적이 있고, 둘째 아들 제갈빈과는 수로맹 시절에 만난 적이 있었다. 삼황맹을 지휘하는 제갈세가 사람인데 초면이라면 당연히 장남인 제갈민일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그 뒤에 서있는 자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18명.
내뿜는 기도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너희들이 모용세가 무사들과 비룡검문 제자들, 그리고 순우광을 죽였지?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그렇게 다짐한 기수는 겉으로 태연하게 물었다.
“한귀비는 어디 있느냐?”
그러자 제갈민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후후…. 너희들 주군이란 자가 그녀를 여기로 보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아직 은혈대법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냐?”
제갈민은 더욱 당황했다. 한귀비에 이어 주군, 은혈대법 같은 말들이 기수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가 침음성과 함께 말했다.
“으으….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거냐?”
“너희들 생각보다는 많이.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지. 어떠냐? 지금이라도 조정에 귀순하는 것은.”
“귀순하라고?”
제갈민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기수는 순간적으로 냉소를 지었다.
역적 패거리에 붙어서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 놨으면서 그런 제안에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의 영락과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기수가 조정에 귀순하라고 얘기한 것은 공주가 있기 때문에 그냥 배려 차원에서 한 번 언급한 것일 뿐 실제로 제갈세가를 용서할 마음은 아니었다.
만약 모용세가와 비룡검문을 건드리기 전이었다면 제갈세가가 배신하고 주군이란 자의 정체를 고발한다고 했을 때 쉽게 사도 처단의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복수가 필요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갈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썪어 빠진 세상을 뒤엎을 것이다!”
그 말에 공주가 발끈했다.
기수는 손짓으로 그녀를 진정시킨 후 제갈민에게 말했다.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제갈민은 기수가 왜 웃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시신들을 가리키며 기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잔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느냐?”
기수는 코웃음을 친 후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느냐?”
제갈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서에 나오는 얘기니까 당연히 처음 듣는 얘기일 것이다.
기수가 이어서 말했다.
“혈매궁과 무림맹을 갈라놓으려는 너희들의 수작을 보고 나도 똑같이 해준 것뿐이다. 제갈세가와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을 갈라놓으려고.”
제갈민은 기가 막혔다.
혈매궁의 고립을 유도한 것은 자기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었다.
병력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력한 결과 작전은 뜻대로 이루어졌다.
무림맹과 결별한 혈매궁주가 이성을 잃고 단독행동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이런 결과로 이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무림맹과 떼어놓으면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갈라선 혈매궁이 더 무서웠다.
그것도 궁주 한 사람이 보여준 위력은 실로 가공할 수준이었다.
나서서 제지하지 않았다면 삼황맹이 몰살당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제갈민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주군이 보내주신 고수들.
현현각주의 부재를 잊게 해줄 거라는 장담답게 그들의 무공은 절대적이었다.
제갈민은 심호흡을 했다. 그들이라면 상대가 기수라고 해도 자신이 있었다.
기수가 제갈민에게 말했다.
“지금 마지막으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한귀비의 소재를 말하거나 아니면 주군이라는 자의 정체에 대해 얘기한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무슨 헛소리냐!”
“딱 한 번만 유효한, 처음이자 마지막 제안이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웃기지 마라! 무릎 꿇고 빌 놈은 너다.”
그러더니 제갈민은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18명의 고수들에게 싸움을 맡기는 것이었다.
기수는 그런 제갈민을 비웃었다.
“혼자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싸울 때는 뒤로 숨는 거냐? 정말 사내답구나. 후후…”
그러자 18명 중 장창을 든 대머리 노인이 말했다.
“네 상대는 우리다.”
기수는 나머지 17명의 태도를 보고 그 대머리 노인이 리더임을 알아차렸다.
“넌 누구냐? 싸우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자.”
“난 강불귀라고 한다.”
“청탑산 출신인가?”
그러자 강불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살려두기엔 아는 게 너무 많구나.”
“아까도 얘기했지만, 충분치 않아.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미쳤구나.”
“후후….네 의지와 상관없이 협조하게 될 거야.”
기수는 대화하면서 오행류 상생순환을 실시했다.
전투 중에 순환시키는 연습을 했기 때문인지 대화중 순환은 훨씬 쉬웠다.
강불귀는 창 쥔 손의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그러자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나머지 17명이 순식간에 대형을 벌려 섰다.
기수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적은 6명으로 이루어진 합격진 3개를 만들었는데, 뿜어내는 기도가 무시무시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기수는 잠시지만 공포심을 느꼈다. 모용세가와 비룡검문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자칫하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사매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 서고 있었다.
탁지연과 동창 출신 사매들은 원래부터 몸에 익숙한 매화육궁진을 펼쳤고, 공주와 아투사는 둘이 따로 섰다.
적이 세 무리이기 때문에 사매들 역시 거기에 맞춘 것이다.
기수는 공주가 한때 자기와 비견되었을 정도로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뇌전격의 한 방을 가진 아투사가 가세하면 충분한 전력 상승을 이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탑산 고수들의 실력을 모르는 상태.
더구나 합격진까지 짜고 있으니 현재로선 자기가 최대한 빨리 적을 제압하고 나서 그녀들을 도와줘야 할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기수는 기선제압을 위해 선공을 펼쳤다.
화류의 호신강기로 불꽃을 일으키면서 시야가 가린 틈을 이용해 파천강기를 날렸다.
파파파파팟!….
청탑산 고수들의 대응은 예상 외로 빨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파천강기를 자신들의 병장기와 호신강기로 막아내고 있었다.
“젠장!”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선공이 별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은 의외였다.
“진을 가동하라!”
강불귀가 창을 휘두르며 외쳤다.
기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래. 내가 신분을 공개한 만큼 저들도 철저히 준비를 하고 왔을 거야. 시작부터 합격진을 펼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기수는 탐색전 없이 곧바로 총력전을 벌여야 함을 깨달았다.
어쩌면 저들은 합격진 안에서 각 개인이 은혈대법을 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위험성은 더 커진다고 볼 수 있었다.
기수는 상대가 하수 6명이 아닌 한귀비 6명이 은혈대법 상태로 합격진을 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가정했다.
‘바늘 끝만큼만 방심해도 진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공을 순식간에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달려드는 적을 향해 일단 멸절강기 스푼컷을 연달아 날렸다.
파천강기는 이미 적이 알고 있는 기술이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기수에겐 그것 말고도 좋은 공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멸절강기를 얼굴에 맞은 적의 움직임은 주춤했다.
피가 튀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런 타격에 시야가 순간적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기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양손에서 불기둥을 만들었다.
“크아악!….”
“으윽!….”
불길에 휩싸인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고, 6명 중 2명이 빠진 적 진형은 금세 흐트러졌다.
기수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현현각주 상대하듯 최강의 공격조합을 끌어낸 것은 앞의 6명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12명까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수의 저돌적인 돌진에 적은 당황했다.
첫 합이 이루어기도 전에 두 명이 밀려난 데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들며 손을 뻗으니 대항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악!…”
허공으로 검이 날아오르고 세 번째 적이 뒤로 날아갔다.
네 번째 적은 기수에게 주먹을 뻗었다가 청, 합, 반의 되치기에 당해서 손목이 부러져버렸다.
자기 손목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그는 기수의 앞차기에 맞아 턱이 부서지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몸이 떨어지기 전에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파천 호신강기를 두른 기수가 다섯 번째 적을 향해 돌진했다.
쿵!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다섯 번째 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하고 말았다.
강불귀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여섯 명의 합격진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에 떨었지만, 기수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다섯 명을 해치운 후 곧바로 돌아서서 다른 두 개의 합격진을 공격하고 있었다.
강불귀는 순간, 기수가 자신을 생포해서 심문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으으….”
강불귀는 이를 악물며 기수의 등을 노려봤다.
순간, 그의 창에서 빠직거리는 파란 뇌전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뇌전격이었다.
강불귀는 비어 있는 기수의 등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