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44
육대기가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 수로맹이 사마연합에 등을 돌리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혈매궁 때문이었다.
하루아침에 삼황맹의 부대 하나를 통째로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뇌부가 겁을 먹은 것이다.
육대기는 난주에 차출되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그런 소문들을 모두 전해 들었다.
입을 거쳐 들은 얘기라 공포감은 오히려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공포의 혈매궁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육대기는 처음 미녀들이 얼굴을 드러냈을 때, 남자를 좋아하던 강달의 취향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달을 상대로 칼을 뽑아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갈등에 사로잡혔다.
그의 급격한 표정변화를 읽은 탁지연이 말했다.
“경계할 필요 없어. 이들은 수로맹을 돕기 위해서 온 거니까.”
“우리를 돕는다고요?”
“그래. 수로맹에 닥친 위기를 해결해주기 위해 온 거야.”
육대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인들과 강달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혹시… 채주님과 혈매궁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그날 이곳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혈매궁에 입궁했어.”
“예? 그럼 채주님이 지금 혈매궁 제자란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으으….”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 봐.”
육대기는 칼 걸어둔 쪽을 힐끔 봤다.
그러나 강달과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더구나 혈매궁 여인들까지 함께 있는데 괜히 경거망동해봤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말씀해 보십시오.”
탁지연은 자신들이 쫓는 미지의 존재가 수로맹의 배후를 치기 위해 고수들을 동원했고, 그들이 지금 수채를 향해 가는 위급한 상황임을 얘기해주었다.
육대기는 크게 놀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우리가 무창에서 이미 네 명을 잡았어.”
“네 명이라고요?”
“응. 그들은 한 수채 당 네 명씩 모두 15개 수채를 습격할 계획이냐.”
육대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글쎄요… 고작 네 명으로 수채 하나를 어찌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각각의 무공이 엄청나. 우리도 아홉 명이 힘을 합쳐서야 겨우 그들을 제압했다고.”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육대기사 믿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기수가 나섰다.
“육채주. 난 혈매궁의 궁주 기수라 하오.”
육대기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포권을 하여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강달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역시 취향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구나.’
육대기는 미녀들 때문에 남자 쪽으로는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었다.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궁주라는 말에 자세히 보니 과연 강달이 반할 만 했다.
생각이 거기 미치자 불현듯 혈매궁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남자를 좋아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수는 그가 왜 한숨을 내쉬는지 의아했지만 그냥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고수 한 명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간단한 시범을 보여드리겠소. 저기 두 기둥을 봐주시오.”
육대기의 시선이 객청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향했다.
순간, 서걱! 서걱! 하는 예리한 파열음과 함께 기둥에 움푹 파인 자국들이 생겨나며 주먹만 한 나무 덩어리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육대기는 입을 쩍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수채의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사매들도 파천강기는 많이 봤지만 멸절강기를 이런 식으로 수십 발 연달아 발출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 속으로는 다들 놀랐다.
기수가 육대기에게 말했다.
“만약 이런 능력을 가진 고수가 수채를 습격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소?”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육대기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요.”
기수는 그가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럼, 이런 능력을 가진 고수 네 명이 한꺼번에 수채를 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소?”
“그 청탑산 고수라는 자들이 이 정도 능력을 지녔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약간은 과장이 섞인 대답이었지만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었다.
육대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기둥 앞으로 다가가서 파인 자국을 살펴보았다.
먼 거리에서 손도 대지 않고 단단한 나무기둥을 파내는 무공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사술이라도 부린 건 아닌가 궁금해서 살펴보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놀라움이 더 커졌다.
마치 목수가 끌로 파낸 후 예리한 칼로 면을 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단면이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단단한 나무가 아닌, 숟가락으로 두부를 퍼낸 것 같은 흔적이었다.
이런 걸 한꺼번에 수십 발씩 발출하는 고수가 나타난다면 27채는 전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육대기는 기수 쪽을 힐끔 살펴본 후 물었다.
“그대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슨 목적 말이오?”
“혈매궁이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 수로맹을 도울 리가 없지 않소? 얼마 전까지, 아니. 지금도 서로 적인데…”
기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육대기가 책임 있는 자리에 앉더니 무공만 열심히 연마한 게 아니라 경륜도 많이 쌓인 것 같아서 왠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육대기의 의문에 대한 답은 탁지연이 해주었다.
모반을 꾸미는 자들이 천하를 난세로 몰아가기 위해 제갈세가를 시켜 새외의 오랑캐 무리인 삼황맹을 끌어들였고,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천마교, 녹림72채, 수로맹까지 가세하도록 했다는 얘기들이 이어지자 육대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역모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그럼 혈매궁은….”
“우리는 정도 사도 아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난주를 탈환하면서 잡은 포로를 한 명도 죽이지 않았어. 그들을 돌려줌으로써 천마교를 물러나게 했지.”
“천마교가 빠진 게 혈매궁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래. 다른 포로들도 석방했지만 제갈세가가 아까 얘기한 청탑산 무리를 이용해서 우리를 자극했기 때문에 실력을 한 번 보여준 거야. 우리는 제갈세가만 잡으면 돼. 다른 세력, 특히 수로맹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고.”
“우리는 괜히 제갈세가 편에 붙었다가 역적 소리만 듣게 생겼군요.”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그런 면에서 탈퇴를 결심한 수로맹주의 결단은 현명했다고 봐야지.”
“아!… 그런데 수채가 습격당하고 출정 간 채주의 가족이나 형제들이 인질로 잡힌다면 큰일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너를 찾아온 거야.”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육대기의 태도가 변했다.
우선 강달이 있기 때문에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고, 혈매궁주가 무시무시한 무공을 가지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압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말로 설득해서 돕겠다고 하니까 그들의 진심을 알게 된 것이다.
“우선, 채주가 난주로 간 수채가 어디인지 알았으면 좋겠는데…”
“동정10채 중 맹주님을 비롯한 7채가 갔고, 파양호의 4채 중에서 3채, 그리고 제 4채인 민강채, 6채인 오강채, 18채인 자수채, 19채인 원강채, 22채인 한수채까지 총 15채가 출정했습니다.”
“적이 15개 무리로 나뉜 게 바로 그걸 노린 걸 거야.”
“무창에서 한 무리를 잡으셨다고요?”
“그래. 거기라면 아마 한수채를 치려는 거였겠지?”
“맞습니다. 무창은 장강과 한수가 만나는 지점이니까요.”
탁지연이 물었다.
“어때? 우리를 도와주겠나?”
“물론입니다. 채주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 수로맹에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인데 그냥 두고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려야 할 일 아닙니까.”
탁지연은 기수와 시선을 마주쳤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눈빛이었다.
육대기는 수채의 졸개들 절반을 쾌속선 30여 척에 태워 출정시켰다.
기수는 수적들의 움직임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자기가 있을 때보다 오히려 훈련이 더 잘 되고 군기도 잘 잡힌 것으로 보였다. 탁지연이 남아 있는 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육대기가 잘 이어받았다고 짐작되었다.
수로맹의 수채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또 거기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무공이 강하지 않다고 해도 장강을 기반으로 오랜 세월 사업을 벌여온 조직을 만만히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나 물 위에서 배를 타고 움직일 때는 무공의 고하가 의미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로맹 제 27채 신강채의 채주 육대기가 길안내를 해주는 것은 엄청난 이점으로 작용했다.
일행은 배를 탄지 반나절 만에 파양호로 진입했고 가장 가까운 26채로 갔다.
기수와 탁지연은 26채의 채주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함께 싸우기도 했던 막붕비였다.
육대기가 27채의 깃발을 보이며 선착장에 들어가자 수적 졸개들이 수채에 신호를 보냈고, 오래지 않아 출정 간 막붕비 대신 수채의 지휘를 맞고 있는 부채주가 나왔다.
“육채주! 여긴 어쩐 일이시오?”
그는 막승룡으로, 바로 박붕비의 장남이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에 불과하지만 자기 아버지만큼 큰 풍채에 사람을 위압하는 기세가 드러나 보였다.
“큰일입니다! 지금 제갈세가의 수하가 이곳을 습격할 것입니다.”
막승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갈세가가 왜 여기를 공격한단 말이오?”
“맹주님께서 연합에서 탈퇴하려 하시니까 그걸 막기 위해 형제들을 볼모로 잡을 생각인 겁니다.”
“하하하!… 육채주의 걱정이 너무 깊은 것 아니오? 아무려면 이제까지 동맹을 맺었던 우리 수로맹을 상대로 그런 짓까지 할 리가 있겠소?”
육대기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강달을 쳐다봤다.
그의 말을 믿고 달려오긴 했지만, 막상 막승룡의 얘기를 듣고 보니 자기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막승룡이 죽립 쓴 여인들을 보고 육대기에게 물었다.
“육채주, 그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혈매궁 사람들입니다.”
“뭐, 뭣이라고!”
막승룡은 깜짝 놀라서 허리에 차고 있던 큰 칼을 뽑아 들었다.
“혈매궁은 우리의 적인데 어찌 그들을 여기로 데려왔단 말이오?”
막승룡이 칼을 뽑자 포구의 수적들 모두 무기를 겨누었다.
육대기 입장에선 당황스런 일이었다.
“부채주. 진정하고 여기를 보시오! 그대도 내가 예전에 모시던 강채주님을 알고 있지 않소? 여기 그분이 와 있소이다.”
막승룡은 강달을 알아보았다.
“아! 강채주. 오랜만이오. 그런데 왜 그들과 함께 있소?”
“난 혈매궁에 입궁했습니다.”
탁지연이 밝히자 막승룡은 더욱 놀랐다.
“그렇다면 그대가 적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오?”
“적이 아닙니다. 우리 혈매궁은 수로맹을 도우러 왔습니다.”
“삼황맹의 부대 하나를 몰살시켰다고 들었는데, 그게 당신들 소행이 아니란 말이오?”
“우리가 한 일은 맞지만 수로맹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육대기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막 부채주. 일단 칼은 내려놓고 얘기부터 들어보시오. 혈매궁의 적은 제갈세가일 뿐, 우리 수로맹은 돕고 싶다고 합니다.”
막승룡의 겨누던 칼이 반쯤 내려갔다.
강달과 육대기의 얘기를 듣고 보니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는 않아서 칼을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그때, 수채 쪽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부하들이 크게 동요했다.
“부채주님! 습격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막승룡은 강달과 육대기를 한 번씩 쳐다본 후 급히 돌아서서 수채로 올라갔다.
육대기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부 하선하라! 26채를 돕는다!”
습격한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정말로 혈매궁에서 말하는 고수들이 쳐들어온 것이라면 26채 인원만으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채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곳곳에 관문을 만들어져서 방어에 유리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수나 사매들의 경공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수채에 들어서 보니 끔찍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수십 구의 시체가 널브러지고, 한 쪽에서 접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는데, 그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네 명의 고수가 어른과 애의 싸움처럼 격차가 느껴지는 몸놀림으로 수적들을 연속해서 죽이는 중이었다.
기수는 사매들에게 손가락으로 여덟 지점을 가리켰다.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일단 포위망부터 만들게 한 것이다.
사매들은 즉시 그 지점으로 이동했다. 기수도 한 방위를 맡았다.
그러는 사이 막승룡은 괴성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이놈들! 멈추어라!… 네놈들은 누구기에 함부로 내 부하들을 해치느냐!”
그의 칼을 가볍게 피한 괴인이 물었다.
“넌 누구냐?”
“난 이 수채를 책임지고 있는 부채주 막승룡이다!”
“막붕비와는 어떤 사이냐?”
“난 그분의 아들이다!”
“흐흐흐!…. 드디어 찾았구나.”
괴인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깜짝 놀란 막승룡은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리고 있는 힘껏 칼을 휘둘러 상대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괴인은 막승룡의 공격을 모두 피하며 간격을 좁혀왔다.
막승룡은 비록 짧은 접전이지만 상대의 무공이 자신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절망감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