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51
기수의 진기주입으로 인해 천마교 교주 선우환의 얼굴엔 혈색이 돌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혈천제와 암천제 역시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기수가 손을 떼자 암천제가 물었다.
“어떻소? 교주님의 상태는…”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두 번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 같군.”
암천제는 기수가 자기를 하대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에게 포로로 잡혔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기수 말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럼 돌아가시지 않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것뿐이야.”
암천제는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말을 겨우 내뱉었다.
“고맙소.”
교주를 살리기 위해 혈천제와 함께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기에 현재 몸 상태가 어떤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기적 말고는 기댈 게 없는 상황이었다.
외인에게 자신의 진원지기를 소모하면서까지 교주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기수가 그렇게 해준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혈천제도 나지막이 한 마디 했다.
“고마워.”
자신의 내공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그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절대 내공의 소유자는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일 텐데, 기수가 부탁도 하기 전에 자청해서 해주니 정말 고마웠다.
기수는 선우환을 쉬게 해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혈천제, 암천제와 함께 다른 모옥으로 들어가 마주앉았다.
이번엔 자영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
기수는 세 사람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모두 얘기해주었다.
다 들은 뒤 혈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중간에 갑자기 무공이 고강해지더라니…”
“그들과 싸워봤어?”
“놈들과 싸우느라 교주님을 보필하지 못했지.”
암천제와 자영도 분한 표정을 지었다.
기수가 다시 물었다.
“그럼 교주님과 싸운 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못 본 거야?”
혈천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심각한 얘기를 하는 중이지만 혈천제의 미모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적대적이던 그녀가 교주 앞에서 서로 돕기로 한 이후 적개심을 거둔 게 그 이유였다. 자기를 향해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한 것이다.
혈천제가 이상한 느낌에 정색하고 자신을 노려보자 기수는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노리고 각개격파를 시도했다는 얘기가 되네.”
“하지만 우리 사정을 어떻게 알고?”
“천마교 내에 저들의 세작이 있다는 뜻이지.”
“말도 안 돼!”
“안 되기는… 멸….”
기수는 말을 황급히 끊었다.
멸천제가 사도였다는 얘기를 할 뻔 했는데, 이제 막 연합이 이루어지려는 참에 삼천제 중 한 명을 자기가 죽였다고 밝혀서 득 될 게 없었다.
“안 되기는… 놈들의 세작은 벌써 오래전부터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은 물론이고 일월신교와 무림맹에도 존재하고 있었어.”
“그게 정말이야?”
“수로맹 같은 경우엔 두 명이나 배치되어서 군사로 활약하고 있었지. 그만큼 중요한 조직이라서 그랬을 거야.”
말해놓고 보니까 수로맹과 손잡게 된 것이 꽤 커다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쾌속선을 타 봐서 알지만, 고수를 원하는 곳에 신속하게 파견할 수 있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해병대 병력을 헬리콥터로 실어 나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정말 열 받았겠네. 자기네가 써먹으려고 연합을 만들었는데 내가 전부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편으로 흡수하고 있으니…’
기수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혈천제와 암천제는 배신자를 어떻게 색출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기수가 넌지시 끼어 들어 물었다.
“멸천제 휘하의 마령과 병력들은 지금 어떻게들 하고 있지?”
혈천제가 대답했다.
“모두 내 휘하로 흡수했어.”
암천제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니 아마 교주가 그렇게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
같은 삼천제 중 한 명이고 남자지만, 무공이 딸리고, 또 포로로 잡힌 경력까지 있다 보니 발언권이 대폭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기수는 혈천제를 향해 말했다.
“멸천제의 마령들을 주의 깊게 살펴 봐. 아무래도 주인이 바뀌면 권리를 누리던 자일수록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혈천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휘하 마령들 중엔 여자가 많았다.
특히 소혼랑과 광혼랑이 중요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어서 새로 편입된 마령들이 불만을 가질 환경이기는 했다.
“한 번 조직을 재정비 할 생각이기는 했어.”
기수는 천마교의 현재 전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다.
“이젠 너희들 얘기를 해 봐. 지금 제자가 몇 명이나 있는 거지?”
혈천제와 암천제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혈천제 입에서 천마교의 현재 병력에 대한 자세하고도 솔직한 얘기가 나왔다.
기수의 기대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정말 그 정도 밖에 안 돼? 적어도 몇 만 명쯤은 될 줄 알았는데…”
수로맹보다 약한 전력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자영이 설명해주었다.
“교도를 전부 합치면 백만이 넘는다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미륵하생! 명왕출세!를 외치는 사람이 전부 다 무공을 익히고 우리 명령에 따르는 건 아냐.”
기수는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교회로 치면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정도만 핵심 교도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신도는 그냥 신도인 것이다.
만약 민중봉기라도 일어난다면 그들 모두가 곡괭이, 쇠스랑 챙겨 들고 반란군의 일원이 될 수 있겠지만, 무림 문파를 상대할 레벨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쳇! 종교집단의 숫자 부풀리기였군…’
천마교의 실체에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수로맹과 비교하면 훨씬 강한 무공의 소유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쪽 연합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는 여전히 유효했다.
자영은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기수를 바라봤다.
애틋한 듯 하면서도 약간은 화가 난 듯도 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보는 눈이 있었으니, 바로 혈천제였다.
기수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적에겐 절세고수가 3명 있어. 교주님이 그들 중 하나에게 내상을 입혔다고 하지만 아직도 둘이 남았으니까 이곳도 습격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돼.”
과연 그 얘기가 나오자 혈천제는 더 이상 자영 쪽을 보지 않았다.
“여긴 아무도 모르는 곳이야.”
“얘기했잖아. 너희 교도들 중에 저쪽 편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 교주님의 상태로 옮기는 것은…”
“옮겨도 소용없어. 세작도 따라 이동할 거니까.”
“그럼 어쩌지?”
“방어태세를 갖추고 만반의 대비를 해야지. 너희들끼리 위험에 처했을 때 펼치는 진법 같은 거 있잖아?”
혈천제와 암천제는 어느새 기수의 명령에 따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교주의 부상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그나마 기수의 조언 덕분에 상황을 파악한 혈천제는 암천제와 협의 후 죽림에 들어와 있는 고수들을 전부 재배치했다.
특급 경계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동안 기수는 교주의 거처로 다시 들어갔다.
진기 주입이 목적은 아니었다.
교주의 현재 몸 상태로는 해준다고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수는 교주 옆에 앉아 그의 맥을 잡고 몸 상태를 확인하는 척 하면서 슬그머니 염정구심술 동조를 시도했다.
평소 같았으면 꽤 저항을 받았겠지만, 현재의 교주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뚫렸다.
기수는 그의 기억 속을 뒤져 싸운 상대를 찾아보았다.
최근에 경험한 몹시 강렬한 기억이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문사건을 쓴 초로의 사내.
기수는 주군이란 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귀비도 알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도의 얼굴도 생생하게 기억에 저장시켰다.
‘너희 세 명만 잡으면 되는 거지…. 가만! 이놈이 단지 고수일 뿐, 사도는 아닐 가능성도 있는 거 아닌가?’
자기가 직접 맞닥뜨린 게 아니다 보니까 사도라는 확증이 없었다.
그래서 기수는 교주와 그의 대결을 하나씩 복기해보았다.
처음엔 단지 그가 사도인지 아닌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객이 전도되었다.
선우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내의 무공은 확실히 사도급이었다.
한귀비보다 더 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의 관심을 끈 것은 그에게 대응하는 선우환의 무공이었다.
상대의 내공이 갑자기 증폭되자 선우환은 초식의 정묘함, 그리고 순간적인 내력 집중으로 그 난관을 헤쳐 나갔다.
기수는 얘기를 전해 듣는 게 아니라 기억을 통째로 동조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당시 선우환의 마음가짐은 물론 두려움과 긴장감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무림에서 절대자 중 한 명으로 군림했던 고수의 실전 심리를 경험하는 것은 신선하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기수도 나름대로 강적과 힘겹게 싸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우환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공이 고강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성과 본능으로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해냈던 것이다.
그의 초식 운용방식엔 그 경험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대결과정 전체를 한 번 훑어봤을 뿐인데도, 기수는 뭔가 엄청난 걸 배운 느낌이었다.
특히 상대의 작은 허점을 민첩하게 포착해서 내공을 한 데 모아 파고드는 집요함은 꼭 자신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처음엔 작았던 구멍을 점점 크게 만들어 무너뜨리는 전술이었다.
자기도 이제까지 그런 수법을 써왔다고 생각했는데, 선우환의 절실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선우환은 은혈대법을 통해 자기보다 강해진 상대에게 결국 내상까지 입혔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수는 대결의 상황을 반복해서 되짚어 보았다.
1시간쯤 되었을까.
기수는 선우환의 손을 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기억을 동조했을 뿐인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만큼 굉장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사부님에게 북궁심법을 배웠고. 합비에게 오행류를 배웠고, 이제 천마교 교주로부터 실전심리를 배움으로써 뭔가 완성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싸우고 싶다! 강적과…’
새 공부를 실전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은 천마교 진영으로 적이 와주길 바랄 상황은 아니었다.
기수는 잠들어 있는 선우환을 내려다 봤다.
중간에 잠시 깼지만 맥 잡은 사람이 기수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잠들어버린 배짱 좋은 사람.
‘고맙습니다. 여러모로…’
진기 나누어주는 것쯤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기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주변 정황이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죽림을 둘러싼 강렬한 기운이 감지되는 것으로 미루어 방어진형을 갖춘 듯 했다.
“교주님은 어때?”
모옥 밖에선 광혼랑이 기다리고 있다가 기수에게 말을 걸었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라 당분간 휴식이 필요할 거야.”
“천제님이 찾으셔.”
“나를?”
“따라 와.”
앞장 선 그녀를 따라 모옥으로 들어가자 혈천제와 소혼랑이 보였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들과 밀폐된 공간에 있게 되니까 옛 기억이 생각난 것이다.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지?’
기수는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야! 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8명하고 어울리다가 왔잖아. 달랑 3명인데 뭘 긴장하고 그래? 릴랙스… 릴랙스…’
그러나 잘 진정이 되지 않았다.
분명 혈천제와 소혼랑, 광혼랑은 한 때 쉬지 않고 한 침상에서 즐기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적조했기 때문인지 미팅에서 처음 만난 미녀처럼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 여자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미모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테크닉이 중요한 것도 아냐. 새롭다는 게 중요한 거였어.’
아무리 맛있는 식당이라도 계속 가면 질리기 마련.
일식당도 가고, 중식당도 가고, 레스토랑도 가줘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식당이 뷔페라고 해도 역시 다른 인테리어에서 다른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기수가 그렇게 혈류 급증과 싸우고 있을 때 혈천제가 착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왜 날 속였지?”
“응? 속이다니? 내가 뭘? 언제?”
“나하고 있는 동안 왜 하수인 척 했냐고?”
“하수인 척 한 게 아니라 그때는 진짜 하수였어.”
혈천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무공을 전혀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너의 마옥혈린수에 꼼짝없이 걸릴 수준 밖에는 안 되었지.”
“흥! 그건 어떻게 푼 거지?”
“도룡문을 떠난 후 사부님을 만났지. 그분 덕에 고수가 되었고, 마옥혈린수도 스스로풀 수 있게 된 거야.”
혈천제는 잠시 말없이 기수를 노려봤다.
마옥혈린수를 스스로 푼다는 말을 어쩜 그렇게 쉽게 하는지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부란 사람이 혈매궁의 이전 궁주였던 건가?”
“그랬다고 봐야지.”
“그럼 함께 있던 여인들은…”
“모두 내 사매들이고.”
혈천제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녀들과는 어떤 관계지?”
기수는 대답을 아주 잘 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