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65
기수의 손가락 끝이 가늘게 경련했다.
‘젠장! 단 하나도 통하지 않다니….’
눌러 놓았던 두려움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장무검이 검을 느리게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기수에게 말했다.
“뭔가 또 새로운 재주가 있다면 내놓아봐라.”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그을린 이후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보다 고수. 게다가 신중하기까지…’
기수는 내력 소모만 심하고 통하지는 않는 두 기술은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근접한 거리에서 단정홍이나 자신이 고안한 파동권, 혹은 운룡비결의 압살 타법을 쓴다면 진기 효율로는 최상일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검 움직임으로 봤을 때, 간격이 2미터 이내로 좁혀질 경우 자기가 먼저 당할 확률도 컸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간격은 2미터에서 3미터 사이.
상대의 검은 닿지 않고, 자신의 화류 태포련은 피하기 어려울 만큼의 폭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였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장무검의 엄지발가락 위치를 확인했다.
‘1미터만 더 들어와라. 바베큐로 만들어주마.’
기수는 왼손에 화류태포련을 10성까지 끌어올렸다.
처음의 공격은 유성추와 조합하느라 4미터가 넘는 거리였고, 머리카락을 그을리는 데 그쳤지만, 조금 더 가까운 거리라면 아무리 보법이 민첩해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장무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계속 검을 돌리고, 간격을 좁혔다 늘였다 하면서 도발했지만 기수가 원하는 만큼 다가오지는 않았다.
기수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장무검이 말했다.
“밑천이 다 드러난 모양이군. 좋아. 그렇다면 내가 좀 놀아줄까?”
순간, 그의 검이 허공에서 연속 세 번을 찔러 들어왔다.
기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는 유지된 채로 날카로운 검기가 발출된 것이다.
기수는 오른손에 파천강기를 방패처럼 끌어 올려 그것들을 튕겨냈다.
다행히 세 개 모두를 막아냈지만 손등과 팔뚝이 얼얼했다.
장무검은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었다.
“좋아! 좋아!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하하하!…. 귀령공의 전인을 죽이면 사부님과 사조님도 아주 기뻐하실 거야!”
“난 그분의 제자가 아니라고 이미 말했을 텐데!”
기수는 왼손에 여전히 화류 태포련을 장전한 채 오른손으로 잔백지를 연달아 날렸다.
상대에게도 위력적인 중장거리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공격을 지속해서 그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면서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장무검은 키득거리며 기수의 잔백지들을 모두 튕겨냈다.
“이런, 이런… 이번 공격은 너무 시시하구나. 벌써 내력이 다한 것이냐? 그렇다면 실망이군. 적어도 한 시진은 버틸 줄 알았는데…”
기수는 다시 침음성을 흘렸다.
“으으….”
상대는 이쪽 무공의 단점, 즉 내력 소모가 심하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장기전까지 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젠장! 이런 정도의 실력을 가진 새끼가 왜 역도 편에 붙은 거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새 황제를 추대하는데 힘을 보탠다면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일 아닌가.
단지 금전만이 아닌 권력을 동반한 부(副).
그걸 탐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음종 현현각도 그렇고, 검종의 장무검도 그렇고.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주가 열심히 나선 것도 자기 일족의 권력을 지키지 위함이었다.
기수야 곧 떠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돈이고, 권력이고, 명예고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갈 사람들 입장에선 욕심 낼 만 한 가치였다.
접근전은 자신 없고, 원거리에선 밀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간격은 상대가 이미 인지하고 있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장무검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당장 승부가 나지는 않고 있지만 이 싸움은 이미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길고 고통스러운 확인과정만 남은 것이다.
‘젠장! 누군가 날 죽인다면 그 사람은 사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장무검은 잔백지를 받아 넘기면서 검기를 하나씩 발출했다.
기수 입장에선 막기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자기를 몰아붙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리며 가지고 노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그의 의도가 다른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강력한 적의 기도가 느껴진 것이다.
잠시 후 기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한귀비였다.
“호호호!…. 장대협이 잡아놓으셨군요. 아주 잘 하셨어요.”
따라오다가 멈추어선 이후 신경을 끄고 있었는데, 그녀가 태선사로 돌아가지 않고 이쪽의 상황을 읽고 있다가 다가온 것이다.
“젠장!”
기수는 암담함을 느꼈다.
장무검에게 이길 방법이 없어서 고민 중인데 한귀비까지 오다니…
그녀가 가세하자 세 사람은 정삼각형 모양으로 나뉘어 서서 각각 꼭지점 하나씩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수는 본능적으로 퇴로를 확인했다.
그러나 장무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그 생각을 곧 접었다.
한귀비는 따돌릴 수 있다고 해도, 그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한귀비가 기수를 찬찬히 훑어본 후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녀는 기수의 본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최근, 요종의 사득공을 처치할 때 기수는 궁녀로 변장한 상태였던 것이다.
“네놈은 누구고, 어디 소속인지.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정탐했는지 어서 대라!”
한귀비가 다시 다그쳤지만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무검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그녀에게 얘기해줄 것이고, 혈매궁과 공주의 관계도 밝혀질 것이다.
굳이 자기가 기식 조절에 방해 받으면서까지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기수가 계속 말을 하지 않자 한귀비는 장무검 쪽을 슬쩍 봤다.
그러나 장무검은 어깨을 한 번 으쓱거리며 자신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이상한 행동이었다.
한귀비가 기수에게 말했다.
“오냐. 네놈을 제압해서 입을 열게 해주마.”
그리고 장무검에게 턱짓을 했다.
“놈을 잡아주세요.”
“싫소.”
“예?”
한귀비는 당황했다. 기수도 뜻밖의 대답에 놀랐다.
장무검은 검을 땅바닥에 찍어 세우고, 양손을 그 위에 얹은 후 한귀비에게 말했다.
“당신의 골칫거리이니 당신이 처리하시오.”
“자, 장대협. 왜 이러십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시오?”
“우리와 한 약속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분명히 기억하고 있소. 그래서 손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오.”
“장대협!”
“여기까지 쫓아와서 잡아주었으면 충분하지 않소? 마무리까지 나한테 하라는 건 너무 심하지 않소?”
한귀비의 낯빛이 변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바꾸어서 다시 말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말이 그런 식으로 나왔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절대 아니에요. 다시 부탁드릴게요. 제가 저 자를 잡을 테니 좀 도와주세요.”
장무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좀 얘기가 통하는군.”
한귀비는 장무검에게 목례를 하여 고마움을 표했다.
기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장무검의 무공으로 보자면, 한귀비가 비록 남아 있는 세 사도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걸 넘어서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한귀비는 장무검과 시선을 맞추었고, 장무검은 땅에 세우고 있던 검을 들었다.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한 후 동시에 몸을 날렸다.
기수는 이를 악물고 그들과의 대결에 임했다.
이런 정도의 고수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기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단 뒤로 물러서면서 호신강기와 분광권으로 상대했는데, 진기 소모를 아끼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되었다.
한귀비는 연거푸 살초를 펼쳐내는데 반해 장무검은 뒤쪽에서 설렁설렁 검 휘두르는 흉내만 낼 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지?’
당황하기는 한귀비가 더했다.
“장대협! 어째서?…”
“흐흐흐…. 생각해보니까 내가 싸울 이유가 없잖아?”
그러더니 아예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잘 해보라고. 내가 여기서 열심히 응원해줄 테니까.”
한귀비는 크게 놀라 몸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기수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협공당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우선 한귀비를 죽이고, 장무검은 그 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기수의 공세가 강화되자 한귀비는 은혈대법을 끌어 올렸다.
등을 보였다가는 즉사할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은혈대법 상태의 그녀는 강했다.
그러나 기수도 예전과는 달랐다.
오행 상생순환이라는 수련법을 개발하여 열심히 내공을 키운 보람이 있었다.
“너,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한귀비는 강호에 이 정도로 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기수는 대답하지 않고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데 집중했다.
그의 입장에서 한 가지 문제는, 한귀비를 이긴다고 해도 여전히 강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이 대결에서 최소한의 내력만 소모해야 하는 것이다.
한귀비는 붉어진 눈동자에 이어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피부의 탄력이 사라지고 주름살이 두드러지는 모습.
주안술에 쓸 진기가 부족한 것이었다.
한귀비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장무검 쪽을 힐끔거렸는데, 그는 이빨을 드러낸 기괴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장대협! 정말 이럴 건가요?”
그녀는 다급한 외침에 장무검은 느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하기로 한 일은 따로 있어. 너를 도와주는 건 거기에 포함되지 않아.”
냉정한 선언을 들은 한귀비는 보법의 방위를 바꾸어 장무검을 싸움의 범위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장무검은 훌쩍 뛰어 피한 후 웃었다.
“하하하!…. 남의 도움 바라지 말고 네 실력 껏 해 봐.”
한귀비는 미칠 것 같았다.
애당초 자기보다 고수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추적을 멈췄던 그녀였다.
그러다가 무시무시한 두 개의 기도가 격돌하는 것을 감지하고, 그 중 하나가 장무검의 것이기에 믿음을 가지고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이런 식으로 함정에 몰아넣을 줄이야…
“주군께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상관없어. 난 계약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흐흐흐…. 네 상대에게 집중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정도 간격이면 넌 한 순간에 통구이가 될 수도 있거든.”
기수는 속으로 장무검을 욕했다.
‘저 스포일러 새끼!’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그가 한귀비를 돕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내력 소모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기수는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후 양손으로 동시에 화류 태포련을 발출하며 한귀비를 압박했다.
“악! 이, 이게 무슨…”
한귀비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크게 당황했다.
황급히 물러서며 양손을 휘저어 불길을 막아냈지만 불에 덴 얼굴은 화끈거렸고, 양 소매엔 불이 붙었다.
기수는 전신에 파천강기 갑옷을 두르면서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쿵! 소리와 함께 온몸 충돌로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떴다.
기수는 가장 효율적인 타법들을 생각해냈다.
운룡비결이라면 그녀를 확실히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장무검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양손 끝에 파천강기의 날을 60센티 정도로 뾰족하게 만들어 그녀의 요혈에 번갈아 찔러 넣었다.
“꺄아악!…..”
한귀비는 그 와중에도 손을 휘저어 막으려했지만 헛된 저항에 불과했다.
결국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쿵! 소리와 함께 떨어진 한귀비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기수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겼다! 내가 이겼어…’
황궁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넘기 어려운 벽으로 여겼는데 이렇게 제압하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동시에 전신을 휘감는 환희의 전율이 느껴졌다.
‘윽! 지금은 안 돼!’
기수는 몸의 반응을 자제하려 했다.
가까운 곳에 장무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제멋대로 희열을 폭발시켰다.
“으아아아…..!”
결국 기수는 고개를 젖히고 커다란 장소성을 길게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런 식으로 허점을 노출하게 되다니…’
자기 몸인데도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도 장무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몹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기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기수가 몸을 추스르고 그를 향해 돌아서자 장무검이 입을 열었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
“왜 한귀비를 돕지 않았지?”
“기분이 나빠서…”
처음에 그녀가 명령 내렸던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 듯 했다.
기수는 신과의 대화도 뒤로 미루고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겨 디디며 조심스럽게 간격을 좁혀갔다.
이제 진짜로 힘겨운 싸움이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