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66
기수는 조심스럽게 기식을 조절하며 상생순환을 한 바퀴 돌렸다.
중간에 장무검이 공격할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무사히 순환을 이루고 나자 자신이 긴장한 게 우습게 느껴졌다.
사도를 죽인 희열의 순간.
온통 허점투성이라 장무검이 아니라 청탑산 고수 중 한 명이었다고 해도 자기를 죽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장무검은 손을 쓰지 않았다.
‘호랑이는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뭐, 그런 건가?’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자기 무공에 자신 있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가 마주 서자 장무검이 히죽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실력이 제법이구나.”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후후…”
기수는 자기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2대1이라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난 덕분에 약간이나마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장무검이 검 끝을 발로 툭! 차올려 빙글빙글 회전시키면서 말했다.
“우리…. 지금 꼭 싸워야 하나?”
뜬금없는 질문에 기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의도를 몰라 대답하지 않자 장무검이 다시 말했다.
“굳이 네가 지금 여기서 죽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흥! 승패는 어느 쪽으로 기울지 모르는 거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나라면 네가 지는 쪽에 돈을 걸 거야.”
그것은 기수도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직 선보이지 않은 기술들도 있고, 무엇보다 한귀비를 처치하면서 내력 소모가 예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에 건곤일척의 승부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도 생겨났다.
“원래 베팅이란 배당 높은 쪽을 먹을 때가 짜릿한 법이지. 후후…”
그런데 장무검이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검을 검 집에 집어넣은 것이다.
“난 네가 필요하다.”
“무슨… 뜻이지?”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그래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해.”
기수도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잠시 장무검의 얼굴을 살피다가 물었다.
“누구와 무슨 약속을 한 거지?”
장무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늘을 한 번 본 후 말했다.
“젠장! 마음에 안 들어… 그건 내가 한 약속도 아냐. 사조님이 멋대로 한 내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사조? 검신 진천후?”
“그렇다. 그 노친네가 제멋대로 삼태공에게 도전했다가 빚을 졌지.”
기수는 동방예의지국 출신이지만 행실이 고리타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이 드신 분에 대한 존경심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앞에 있는 장무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사조인데도 존준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성 꽝이네.’
사형제를 죽이고 일인전승 한다는 검종의 규율이 문제인 것 같았다.
이 험한 세상 서로 돕고 보듬어가며 살아도 쉽지 않을 판에 사형제를 모두 죽이고 한 명만 살아남도록 하는 내규를 가지고 있다니…
그렇게 해서 고수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성이 꽝인데 어디다 쓰겠는가.
심지어는 약간 미친 기운까지 보이고 있지 않은가.
장무검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뭐, 어쨌거나 그런 얘긴 자세히 할 필요 없고… 우리 대결을 뒤로 미루는 게 어때?”
기수는 그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지?”
“그냥 지금처럼만 해 줘. 그러면 된다.”
그러면서 그는 턱짓으로 한귀비의 시신을 가리켰다.
“넌 역모에 가담한 게 아니란 뜻이냐?”
“오늘은 얘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군. 동의하는 걸로 알겠다.”
장무검은 그 말만 남기고 훌쩍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거기 서라!”
기수는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보법은 분명히 그가 빨랐다.
하지만 중장거리에 해당하는 경공으로는 간격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잡을 수 있다!’
기수는 자기가 태선사에서 빠져나올 때 장무검에게 따라잡힌 것은 한귀비를 유인하려고 페이스를 조절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큰 차이가 아닐지도 몰라.’
물론, 경공과 보법 중 실전에서 더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당연히 보법일 것이다.
그러나 경공으로 딸리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장무검이 경공을 멈추고 돌아섰다.
“왜 따라오느냐? 끝장을 보고 싶은 거냐?”
짜증이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기수는 슬쩍 겁이 났다. 하지만 마주 서서 당당히 말했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네 사조가 삼태공과의 내기에 져서 그 빚을 대신 갚아야 한다는 얘기 같은데…”
“그렇다.”
“삼태공, 그러니까 춘신공, 진영군 부부의 전인이 역모의 주동자냐?”
장무검의 눈 꼬리 근육이 실룩거렸다.
말을 하자니 약속에 위배될 것 같고, 감추자니 자기가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나 싶어서 갈들이 생기는 듯 한 표정이었다.
기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도 답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었다.
“그들이 네게 시킨 일은 무엇이지?”
장무검의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야 할 것 같군.”
기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진정해. 진정해. 넌 적어도 저 미친놈보다는 나은 사람이잖아. 현명하게 판단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돼.’
장무검이 자신의 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한귀비와 연합했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는데, 그는 한귀비가 죽을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구경만 했다.
그 후에도 무방비상태인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걸로 미루어봤을 때, 그는 자신을 칼로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병법 36계식으로 표현하자면 차도살인.
다른 사람 손을 빌어 뜻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이이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사조를 불경하게 부를 만큼 현재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사문의 약속을 깨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추측컨데, ‘약속은 지켜주마.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다. 너희들 패거리가 죽거나 말거나 난 상관 안 한다.’ 그런 심정인 듯 했다.
한귀비가 가까이 오기까지 시간을 끌다가 넘겨준 것을 보면, ‘죽거나 말거나 상관 안 한다.’ 정도가 아니라 ‘너희들 모두 죽어줬으면 좋겠다.’일 것 같았다.
기수는 양손을 내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흥분하지 마. 친구.”
굳이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 미친놈을 잘 구슬러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장무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네놈 친구란 말이냐?”
“후후… 너는 너대로 약속을 지키고, 나는 나대로 놈들을 전부 죽이고… 둘 다 성공하기 위해 약간의 정보교환은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정보교환이라…”
장무검의 얼굴에 미소가 되돌아왔다.
눈동자가 안정되지 않고 희번뜩거려서 마주보기 싫은 미소였지만 그래도 짜증내는 얼굴보다는 나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기수를 보며 고개를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꼬았다.
“넌 귀령공의 전인이잖아? 안 돼지. 안 돼! 삼태공은 다 같은 패거리야.”
“워우! 난 그분 제자가 아냐. 분명히 얘기했잖아.”
“흐흐흐…. 귀령공의 수법을 쓰면서 제자는 아니라고? 어이가 없구나.”
기수는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설득력이 없었다.
장무검이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너는 너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적어도 내가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모두 끝난 뒤엔 네놈 목을 내 손으로 따주겠다.”
“잠깐! 검종은 합비 어르신과 무슨 원한이 있지?”
“합비? 그게 귀령공의 이름인가?”
“그렇다.”
장무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조님이 귀령공과 싸웠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왜…”
“춘신공을 이겼으면 귀령공에게 도전했을 거니까 어차피 삼태공은 전부 우리 검종의 원수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친 데다 논리까지 무너져서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
장무검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제 너와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지 마라. 자꾸 귀찮게 하면 계획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흐흐흐….”
그는 곧바로 경공을 시전했고, 기수는 더 이상 쫓지 않았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장무검의 뒷모습을 보며 기수는 생각했다.
‘그래. 일이 모두 끝난 뒤에 제대로 붙어주마.’
기수는 이곳에 와서 실제 무공을 익히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전사 본능이 있다는 사실,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빠르고 적응력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빠른 내공증진이었다.
내공이란 게 일단 절정고수 단계에 들어선 이후엔 성장속도가 느려지기 마련이지만, 기수는 상호간에 진기를 교환하는 음양대법, 단전 3개를 나누어 쓰는 북궁심법, 그리고 오행류를 상생 순환하는 비법을 통해 남들보다 그 속도를 빨리 할 수 있었다.
혼자 힘으로 한귀비를 이긴 게 그 증거였다.
이번 만남에서 장무검의 한계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오늘보다는 강해진 모습으로 도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어떤 면에선 그를 만난 게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심호흡과 함께 내공을 갈무리 한 기수는 마음속으로 신을 불렀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대단하구나! 이제 둘 남았다. 하하하!]
[웃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군요.]
[그랬나?]
기수는 못마땅한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뭐가 말이냐?]
[이기고 나서 왜 그렇게 무방비상태가 되어야 하는 거냐고요!]
[아! 그, 그건…. 그런 쾌감이 있으면 좀 더 의욕적으로 싸울 것 같아서.]
[바꿔주십시오!]
[미안하다.]
[안 된다는 겁니까?]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있다.]
[무슨 신이 그렇습니까? 자기가 만든 설정 하나 못 바꾸고.]
[다음번에 제대로 하도록 하마.]
기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음번이라니요! 나더러 미션 완수 전에 죽으란 소립니까?]
[아! 미, 미안하다. 이전에 여러 번 실패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나와 버렸다. 진정해라. 난 너를 믿는다. 너라면 나머지 둘도 얼마든지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과 달리 신은 약간 쩔쩔매는 기색을 드러냈다.
기수는 자신의 성장이 현재 대단한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신의 반응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장무검의 존재 때문에 자부심이 약간 퇴색되기는 했다.
[방금 떠난 자에 대해 알아봐 주십시오.]
[아직도 그 소린가? 나는 인간계의 일에 간여할 수 없다.]
[그는 사도도 아닌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지 말고 조사 좀 해주십시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정말 이러깁니까?]
[그와는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까 충돌할 일도 없을 것이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의 목표는 따로 있으니까.]
[뭐, 좋습니다. 그렇다면 대신 다른 문제를 하나 해결해주십시오.]
[다른 문제?]
[저는 이곳에서 만난 미녀들 중 누구도 제 시대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셔오는 것도 안 되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군.]
[둘 중 하나를 해결해주십시오.]
[둘 다 안 된다고 했을 텐데…]
[후후후…. 왜 이러십니까? 아무런 동의도 없이 저를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어머니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모셔올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시간과 공간을 주관하는 신이니까요.]
신이 잠시 시간을 두고 물었다.
[여기서 살 생각인가?]
기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머니만 오신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사매들, 무림맹의 여인들, 천마교의 여인들. 그들 중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난 이미 버린 몸이야. 이대로 살래.’
솔직히 현대로 돌아가서 1부1처제 시스템에 어떻게 적응한단 말인가.
길들여진 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어머니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닙니다. TV 드라마 좀 안 보면 어떻습니까. 여기서 고생하지 않고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 드시면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그건 너의 생각일 뿐이지. 어머니 입장은 전혀 다를 수도 있어.]
기수는 신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았다.
자기도 TV와 인터넷 없는 삶에 적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미녀들 아니라면 특별히 이곳에 미련 가질 일이 없기는 했다.
‘어머니는 오셔도 낙이 없을지도 몰라.’
어머니 관점에서 생각해보니까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았다.
‘아! 어쩌지…’
고민하던 기수는 신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어쨌거나 해결해 주십시오. 나라면 그 정도 요구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해달라고 하면…]
[당신은 신입니다! 그러니 해결책을 찾아내십시오.]
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