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76
소혼랑에게 들은 얘기는 기가 막혔다.
혈매궁의 궁주와 여제자들로 이루어진 9명의 무리가 북경, 서주, 낙양, 장안을 휩쓸고 다니면서 군소방파를 습격하는데,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불타버린 건물과 시체들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부녀자들은 전부 다 겁탈을 당하고 알몸으로 살해되어 마치 전시라도 하듯이 나란히 뉘어진 채 발견되었다고 했다.
“도대체 말이 안 되잖아! 도대체 누가 내 행세를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미심쩍어서 조사를 위해 교도들을 파견했어.”
“그래? 어떻게 됐는데?”
“놈들이 워낙 신출귀몰이라 아직은….”
“으으….”
기수가 벌떡 일어서자 소혼랑이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어쩌려고?”
“가서 잡아야지. 가짜가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는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놈들이 파놓은 함정일 수도 있어.”
“알아! 그따위 치사한 함정 판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방화, 약탈, 강도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강간 후 살해? 기수는 자신의 깨끗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 야금야금 당하는데 열이 받았다 이거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파렴치범으로 몰면 안 돼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성과 없이 지루하기만 하던 잠복근무가 안 그래도 지겹던 참인데 어찌 보면 잘 되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수가 서슬 퍼렇게 나서자 소혼랑이 그를 말렸다.
“일단 진정하고 교주님 출관하실 때까지만 기다려 봐. 우리 교도들을 동원하면 놈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도와준다니 고마워. 하지만 기다릴 수는 없어. 나도 나름대로 찾아볼 거야.”
“하지만 교주님은….”
“그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게 부탁했던 신공 두 개가 모두 완성되었으니까 당분간 나 없이도 잘 해낼 거야.”
소혼랑은 자기가 교주직을 대행하고 있는 동안 기수가 떠난다는 사실에 크게 부담을 느끼는 듯 했다.
기수는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교주에게 전할 편지를 써주었다.
그리고 소혼랑에게 부탁했다.
“미파랑 있지? 그녀를 좀 불러 줘. 떠나기 전에 만나야 돼.”
그러자 소혼랑이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떠나기 전엔 나하고 시간 보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면서 다가와서 손으로 아래쪽을 더듬었다.
“워우! 워우! 이러지 마. 난 지금 그거 할 기분 아니라고.”
“흥! 그럼 미파랑은 왜 찾아? 그녀가 나보다 잘 빨아?”
“야! 아무리 격의 없는 사이라고 해도 뭐 그런 소리를 하냐? 그녀를 만나려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내가 부탁한 일이 있거든.”
손혼랑은 미파랑을 불러온 뒤에도 둘만 놔두지 않고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하지 않고 떠날 거라는 기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수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미파랑에게 물었다.
“목판화 완성됐어?”
“예. 궁주님. 이게 목판으로 찍은 거예요.”
기수는 그녀가 내민 십여 장의 그림을 펼쳐보았다.
판화이다 보니 세세한 붓의 터치는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역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잘 그린 그림이었다.
“좋아. 이 그림들은 내가 가져가지. 소혼랑. 부탁이 있어.”
“뭔데? 애기해 봐.”
“이 판화로 그림을 최대한 많이 찍어서 온 천하에 교도들 있는 곳마다 보내. 그리고 담벼락마다 붙이도록 해. 역모의 두 수괴라고 적어서…”
“이게 그들의 얼굴이야?”
“응.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만큼은 확실해.”
“알았어. 그런 일이라면 우리만큼 잘할 수 있는 곳도 없을 거야. 교도가 사해팔황에 널리 퍼져 있으니까.”
“고마워.”
기수는 이것이 그들에게 강펀치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너희들도 당해봐라. 후후….’
자기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 그림을 본 사람들 중엔 알아보는 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기수는 미파랑을 와락 끌어안고 뜨겁고 격렬한 키스를 퍼부은 뒤 말했다.
“고마워. 네 덕분에 놈들을 잡는데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어.”
미파랑은 양 볼이 발그레 달아올라 좋아했다.
소혼랑이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나한테는 안 고마워?”
“고맙지. 아까 얘기했잖아.”
“말로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
“아~ 참. 그걸 꼭 행동으로 해야 아나?”
소혼랑은 자기가 와락 달려들어서 입맞춤을 해버렸다.
기수는 두 미녀와 작별 키스를 한 번씩 더 한 후 천마교의 근거지를 빠져나왔다.
소혼랑은 천마교와 접선하기 위한 암호 적힌 종이를 하나 새로 주었는데, 기수는 천마교와 별도로 알아볼 곳이 있었다.
경공으로 산악지역을 빠져나온 기수는 우선 강을 찾아갔다.
그리고 강변에 정박한 배의 깃발과 표식들을 자세히 살핀 후 그들 중 한 척에 다가가 사공에게 말했다.
“배 좀 얻어 탑시다.”
그러자 선원 서너 명이 뱃전 너머로 기수를 노려봤다.
인상 참 더러운 사내들이었다.
선장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사내가 말했다.
“이건 나룻배가 아니오. 선객 태울 일 없으니 저리 가시오!”
그 옆의 좀 젊은 남자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선장님. 그냥 태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용돈 좀 벌게. 흐흐흐…”
기수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품 안에서 수로맹주의 신패를 꺼내어 보였다.
“내가 바빠서 놀아줄 시간이 없네. 배 이리 가까이 대.”
신표를 알아 본 선원들은 즉시 순한 양이 되어 기수를 태웠다.
선장이 손을 비비며 다가와 말했다.
“헤헤… 누구신지 몰라 뵙고 실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건 괜찮아. 그보다, 진무와 연락할 수 있나?”
“예. 물길 이어지는 곳이라면 어디건 다 연통이 되지요. 길게 잡아도 삼일, 가까운 곳에 계시다면 하루 만에 오실 겁니다.”
기수는 그에게 연락을 하도록 하고 선실에서 잠시 쉬었다.
선원들은 그가 수로맹의 은인인 혈매궁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한다, 술을 꺼낸다 부산을 떨었다.
선장이 쟁반을 들고 들어와 권하며 말했다.
“궁주님. 일단 배는 강심으로 멀리 저어가는 게 좋겠죠?”
“여기서 기다리는 게 만나기에 더 편하지 않나?”
“하지만 관군이 잡으러 올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기수는 이들마저 자기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내가 아냐! 수로맹을 습격했던 청탑산 놈들이 가짜를 내세워서 엉뚱한 짓거리를 하는 거라고! 내가 뭐가 아쉬워서 살인, 방화, 강도, 강간을 하겠어?”
“그, 그렇지요? 저희도 아닌 줄 알았습니다. 헤헤헤…. 궁주님이 역모에 관련되어 있을 리가 없지요. 헤헤헤….”
“역모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요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혈매궁이 관아를 습격하고 있다고…”
“관청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가짜가 강도 행각을 벌여도 기수가 안 나오니까 부녀자를 겁탈하고, 그래도 안 나오니까 관을 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끼들이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기수는 선원들에게 다그쳐 물었다.
“가장 최근에 놈들이 출현한 곳이 어디지?”
“정주일 겁니다.”
그러자 다른 선원이 말했다.
“양주가 더 최근이지.”
물길 따라 소문이 빠르게 돌고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선후관계는 분명하지가 않았다.
기수는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이것들을 어떻게 잡지?’
막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냐. 생각을 해보자. 머리를 쓰라고!’
기수는 일단 큰 종이에 대략적인 중원 지도를 그린 뒤, 이제까지 가짜 패거리가 습격했던 관청들을 적어나갔다.
같은 관청을 두 번 습격할 리는 없다는 전제하에 비슷한 도시들도 표시했다.
선장이 물길에 빠삭해서 지도를 구체와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그림을 그려놓으니까 뭔가 좀 보이는 것 같았다.
천하가 아무리 넓어도, 강호에 소문이 퍼질 정도의 습격 대상 도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 리스트를 적고 보니까 다섯 군데 정도로 압축되었다.
그중에서도 이제까지 습격한 경로를 근거로 짐작하건데 석가장이나 제남 중 하나가 다음 목표로 예상되었다.
‘그래. 둘 중 하나를 찍자.’
기수는 동전을 하나 꺼내서 앞뒤를 정한 뒤 선장에게 말했다.
“일단 제남으로 가지.”
“알겠습니다. 진채주에겐 그리로 오도록 다시 전갈을 넣겠습니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맹의 배는 화물을 막 부리고 다음 선적을 기다리던 참이라 배가 가벼웠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 타던 진무의 쾌속선만큼 빠른 것은 아니라서 제남에 도착한 것은 꼬박 사흘을 채운 뒤였다.
기수는 우선 선원들로 하여금 포구에 내려 소문부터 듣고 오도록 했다.
되돌아온 그들은 나름 열심히 좋은 말을 골라서 얘기해주었다.
그러나 기수는 그들이 들은 얘기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 이놈의 악플러들….’
기수는 저자의 소문이란 게 원래 살이 붙기 쉽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현재 거리와 항구에 퍼진 소문들은 좀 심했다.
가능한 모든 추악한 추측들이 상상력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남의 얘기라고 무책임하게 부풀리고 자극적, 악의적으로 퍼뜨리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게시판이라면 반박글을 올리거나 악플러를 고소하기라도 하겠지만, 이곳의 여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해결책은 가짜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선원들에게 포구에서 진무를 기다리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얼굴을 바꾸고 제남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 건물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세 건물 모두로부터 비슷한 거리에 있는 객잔에 방을 잡았다.
저녁을 먹고 오행류 상생순환을 십여 차례 연공한 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이미 밤이 깊어 거리엔 사람들 발길이 끊겨 있었다.
“휴우~”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서 제남까지 오기는 했지만, 적이 이곳의 관청을 습격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시일은 더 더욱 예측이 불가능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이런 확률 낮은 가능성에 매달린다는 게 우스웠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함은 더욱 가중될 것이었다.
기수는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진무가 오면 수로맹 식구들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사고 발생 지점으로 즉시 접근할 수 있는 빠른 발이 생길 것이다.
현장을 덮치지는 못하더라도 적극적인 추적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기수는 진무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 일단 잠을 좀 자기로 했다.
얼마나 잤을까.
기수는 미약한 살기를 느끼고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키고 기감을 집중하자 살기는 더욱 뚜렷하게 감지되었다.
고수 20여 명의 기척.
‘이거 뭐야? 혹시…’
기수는 즉시 일어나 유성추와 죽립을 챙겨 들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지붕과 지붕을 건너뛰며 살기 가까이 접근한 기수는 어둠 속에서 포정사 건물을 둘러싸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와우! 재수가 이렇게 좋을 수도 있나?’
그들은 바로 자신을 사칭하는 무리가 분명했다.
여자가 8명 섞여 있는 인원 구성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많은 관청 건물들 중에서 하필 제남을, 그것도 오늘 밤 습격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가 이곳을 선택한 게 신의 보살핌이 아니었나 의심될 정도였다.
기수는 놈들 중 화려한 비단장포 걸친 자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잘도 골랐네.’
자기와 나이, 키, 체형이 비슷했다. 훨씬 못생겼다는 점만 빼고…
그리고 옷차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화려하고 천박했다.
기수는 조심스럽게 그들과의 간격을 좁혔다.
포정사 담 밖에 둘러선 가짜 무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무기를 뽑아들고 일제히 담을 넘었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혈매궁의 영웅들이 오셨다! 다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우리 혈매궁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갑작스런 변괴에 포정사를 지키던 관군들은 크게 놀라서 몰려들었다.
그러나 애당초 무공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짜무리를 따라 담을 넘어선 기수는 그들의 무공을 보고 청탑산 패거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비명이 난무하자 기수는 불필요한 희생자를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뒤로부터 몰래 접근하여 파천강기로 한 놈씩 뒤통수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고작 관군을 상대하는 거라 은혈대법을 끌어올리지는 않은 상태.
그런 그들에겐 기수의 기습을 방비할 능력이 없었다.
기수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여자들인 사매를 사칭한 게 되니까 남겨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동료의 수가 순식간에 줄어들자 가짜 무리도 기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웬 놈이냐?”
기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지나가는 사람 1이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가짜 무리는 즉시 기수를 에워싸고 협공을 시작했다.
기수는 문득 새로 익힌 기술을 써먹어보고 싶어졌다.
천기오뢰강이 실전에서도 충분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장무검이나 사도들이라면 부담스럽지만 청탑산 무리라면 스파링 파트너로 제격이었다.
그는 유성추를 꺼내어 양쪽으로 회전시키면서 적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