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79
십여 명의 무리와 함께 언덕 위에 서있는 사내.
기수는 멀찍이서 걸음을 멈추고 안력을 돋우어 상대를 살펴봤다.
일단 거대한 체격이 눈에 들어왔다.
씨름선수 혹은 프로레슬러 같은 체형에 검은 야행복을 입고 얼굴에 복면까지 쓰고 있어서 생김새나 나이는 짐작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기도를 내뿜는다는 점이었다.
‘사도 중 한 명이군.’
강호엔 고수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지만, 현재 기수의 레벨에서 이 정도의 긴장감을 느낄 상대는 한정되어 있었다.
귀령공 합비, 검종의 장무검, 그리고 자신이 넘어서야 할 두 개의 산인 사도 2명.
상대는 그 두 명의 사도 중 한 명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주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가 도발하는 기운을 뿜어내자 상대도 기수 쪽을 노려봤다.
상당히 먼 거리.
보통사람이라면 망원경이 필요할 정도지만 기수는 그의 눈빛을 직시할 수 있었다.
사도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기는 지금 며칠째 산에서 보낸 상태.
진기 소모가 많지 않다고 해도 밤을 꼬박 새며 뛰어다녔기 때문에 최고의 상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상대도 멀리서 바삐 달려왔겠지만, 그의 옆엔 아직도 수백 명의 부하들이 있지 않은가. 이 싸움은 피해야 했다.
기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야행복의 거인은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부하 2명이 들고 있던 커다란 청룡도를 내밀었다.
야행복처럼 전체가 다 검정색이고, 자루 길이만 2미터쯤 되어 보이는 큰 칼이었다.
청룡도를 받아든 거인은 곧바로 몸을 날려 기수를 향해 달려왔다.
기수는 황급히 돌아서서 선풍비를 시전했다.
상대의 경공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급격하게 좁혀지던 간격은 기수가 페이스를 끌어올리자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조금씩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됐어! 스피드는 내가 빨라.’
경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기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함산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따라오는 청탑산 패거리와의 거리는 현격하게 벌어졌다.
기수는 슬쩍 페이스를 늦추어 상대가 조금씩 가까워지도록 해주었다.
부하들의 도움 없이 일 대 일로 맞붙게 된다면 그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기수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남은 두 사도와 장무검 세 사람이 자신을 협공하는 것이었다.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판단하자면, 일 대 일 대결은 겁먹고 피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부하들만 떼어놓으면 돼.’
기수는 청룡도 든 거인과의 간격보다 청탑산 패거리들과의 간격에 더 신경 썼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 성(省)의 경계까지 넘어선 기수는 마침내 속도를 천천히 늦추었다.
이 정도 거리면 청탑산 패거리들이 최고속도로 따라오더라도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거라는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1시간이면 승부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인적 없는 숲 사이 공터.
기수가 돌아서서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인이 도착했다.
그의 발놀림은 민첩했고, 굉장히 먼 길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숨 차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6미터 정도의 거리에 마주 서자 심장이 두근거리는 사도 특유의 반응이 시작되었다.
기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한 후 물었다.
“네가 주군이란 자냐?”
“네가 혈매궁주냐?”
“몹쓸 버르장머리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다니…”
“후후후….! 꽤 인상적인 경공이었다.”
목소리가 덩치만큼이나 무겁고 낮은 중저음이라 마치 서브우퍼를 켜놓은 것처럼 우렁우렁 울렸다.
그리고 덩치도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크게 느껴졌다.
팔뚝 굵기가 자기 허벅지보다 굵어 보였고, 청룡도 자루는 야구 배트의 가장 굵은 부분 정도 두께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라면 절대로 싸울 마음이 생기지 않을 거구였다.
‘이놈은 주군이 아니다.’
기수는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뇌파 영상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주군의 얼굴과 이 정도 덩치의 위압감은 매칭 되지 않았다.
그는 슬쩍 상대를 떠보았다.
“이제 너희들의 계획을 온 천하가 다 아는데… 포기 하지 그래?”
“후후후…. 안다고 해서 뭘 어쩌겠느냐?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이면 그만이다. 십만 명을 죽여서 안 되면 백만 명을 죽일 것이다. 그리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복종하게 되어 있다. 흐흐흐…”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놈! 무고한 백성을 그렇게 많이 죽여 가면서까지 마신에게 잘 보이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불로불사의 약속이라도 해주더냐?”
“마신? 약속?”
거인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오로지 주군께 충성을 다 바칠 뿐이다! 다른 건 관심 없다.”
기수는 저쪽 편 사도들 중에서 오로지 주군만 마신을 아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긴, 똘똘한 놈 하나만 제대로 잡아놓고 나머지는 그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편이 쉽기는 하겠지.’
시스템이 어찌 돌아가건, 이제 눈앞의 사도를 처단하기만 하면 목표까지 한 놈만 남게 되는 것이다.
기수는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상대 역시 복면 너머로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눈이 가늘어지면서 내공을 끌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기수는 세 개의 단전으로 가장 효율적인 조합을 구성했다.
우선 천기오뢰강은 기본으로 깔고, 근접전에서 효과적인 화류 태포련은 오른손에, 중거리 무기인 파천강기는 왼손에 끌어올렸다.
그리고 싸움을 시작하는 첫 도발로 유성추를 상대에게 던졌다.
와인드업 없이 팔꿈치와 손목의 스냅만으로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유성추는 메이저리그 강속구 투수의 공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순간, 거인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가 싶더니 그의 청룡도가 우웅~! 하고 격렬하게 진동하며 소리를 냈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유성추는 날아갈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되돌아왔다.
유성추를 따라 몸을 날리던 기수는 깜짝 놀랐다.
피하기엔 늦어서 반대쪽 추를 던져 날아오는 추의 진로를 바꾸었다.
당구공처럼 빗겨난 두 개의 추가 좌우로 갈라지는 순간.
날카로운 기운이 확! 밀어닥쳐 왔다.
기수는 발사하려던 파천강기를 손등과 팔뚝 쪽으로 돌려 방패를 든 것처럼 변형시킨 후 날아오는 기운을 쳐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강기와 강기가 얽혔다.
“으음…!”
기수는 팔에 전해지는 압력에 깜짝 놀랐다.
두 발이 떨어지면서 몸이 뒤로 사오 미터는 밀리고 나서야 겨우 그 힘을 흡수할 수 있었다.
상대는 청룡도를 회전시켜 이번엔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칼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태산으로 누르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기수는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성추를 되친 데서부터 기선을 제압당하고, 뒤로 밀리기까지 했기 때문에 피할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양손을 엑스자로 교차하여 강기를 정면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기수는 신음을 토했다.
“으으…!”
팔은 저리고 기혈은 격탕했다.
상대의 강기 공격은 청룡도를 근원으로 하는 것인데, 무기의 중량만큼 육중한 가운데 칼날의 날카로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천기오뢰강의 도움 없이 파천강기만으로 막았다면 아마 팔목이 잘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존나게 쎄잖아!’
기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둑 둘 때 하수와 두면 수가 준다고 하는데, 무공도 그런 면이 있었다.
그동안 내내 청탑산 패거리 상대하는데 익숙해져 있던 기수는 한귀비를 능가하는 고수와 대결하면서 레벨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이다.
처음에 유성추를 던진 것부터 실수였다.
거기서부터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해 연거푸 수세에 몰린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청룡도 강기를 모두 막아내자 상대의 공격이 잠시 주춤했다.
그 정도의 방어가 가능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기수는 그 사이에 자세를 바로 잡고 간격도 유지했다.
두 팔이 모두 얼얼하고 기혈 흐름은 순조롭지 않았지만 기분은 오히려 화끈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부터 제대로 한 번 해보자.”
강적과 맞섰다는 사실 때문에 온몸이 짜릿짜릿 흥분되었다.
“후후후….”
사도는 방위를 옮겨 디디며 기수와의 간격을 조정했다.
기수도 그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반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게 되었다.
한 순간, 사도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왔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이었다.
기수는 찔러 들어오는 청룡도를 향해 오히려 파고들어가면서 양팔에 파천강기를 칼날처럼 뿜어져 나오게 만들었다.
아마 현대인이 봤으면 질럿이라고 했음직한 모습이었다.
쩡! 소리와 함께 양팔에 통증이 전해져 오고 상체도 크게 흔들렸다.
청룡도의 무게와 파워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처음처럼 당하지만은 않았다.
청룡도의 투로를 옆으로 밀어내고 안쪽으로 파고드는데 성공했고, 기수의 오른손이 민첩하게 파천강기 대신 화류 태포련을 뿜어냈다.
화악! 퍼지는 화염은 사도의 얼굴과 상체를 온통 휘감았다.
그러는 그는 그 와중에도 청룡도를 회전시켜 기수의 허리를 베어왔다.
기수는 청룡도의 칼날과 1cm도 차이 나지 않는 간격으로 몸을 빙글 돌려 피해냈다. 무의식중에 응용동작을 한 것인데, 브라질 무술 카포에라와 비슷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뉘어 선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간격을 벌렸다.
방금의 격돌이 상대를 경시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사도의 얼굴은 태포련의 화염에도 불구하고 멀쩡했다.
그 역시 청룡도의 도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던 고수답게 몸에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기를 모두 차단하지는 못해서 야행복과 복면에서 연기가 났다.
불이 붙기 직전까지 갔다는 증거였다.
“복면 벗지 그래? 뜨거울 텐데. 후후후….”
“바로 이 수법 때문이었군. 화상 입은 사상자가 많았던 것은…”
“너도 곧 추가될 거다.”
“과연 그럴까?”
사도는 청룡도를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다시 기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기수 역시 그와 반대로 돌았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짜릿한 흥분이 그의 전신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테스토스테론과 아드레날린 수치가 폭주하는데 비례해서 적의 피를 갈구하는 야성의 본능도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이번엔 기수가 선공을 가했다.
청룡도의 파워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일단 칼 든 손을 향해 집중적으로 멸절강기를 쏘아 보낸 후 사도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사도는 거대한 청룡도를 수험생 볼펜 돌리듯 정말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멸절강기를 쳐내면서 무지막지하게 휘둘러대는 그의 창룡도는 기수 입장에서 골칫거리였다.
물론 스피드만 놓고 보자면 기수의 분광권이 더 빨랐다.
그러나 스쳐도 중상을 입을 것 같은 청룡도의 파워가 워낙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무리한 도전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순식간에 50여 초를 넘어갔고, 묘한 균형을 이루었다.
마치 태권도 유단자와 유도 유단자가, ‘내 발차기에 한 번 걸리기만 하면 넌 끝이야.’, ‘내 손에 잡히기만 하면 넌 끝이야.’ 하면서 서로 한 방을 노리는 것 같았다.
털 끝 만큼만 방심해도 한 쪽으로 기울어버릴 것 같은 균형은 집중력과 긴장감을 극한까지 요구했다.
기수는 그 긴장감을 즐겼다.
‘내 의지와 집중력이 너보다 강할 것이다!’
현대에 살 때는 무엇 하는 열정이나 의지를 보인 적 없는 기수였지만, 중원에 와서 익힌 무공의 세계는 달랐다.
자기 안에 그런 열정과 집중력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의 이 대결도 그를 영혼에서부터 기쁘게 해주었다.
더욱 기쁜 점은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자기 쪽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당장 승부를 가리지는 못한다 해도, 그 차이를 계속 누적시켜 나간다면 승리를 쟁취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기수의 낙관적 기대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훼방꾼들이 감지된 것이다.
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고수들의 기도. 청탑산 패거리들이 분명했다.
“젠장!”
그들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이 팽팽한 균형 상태에 적 전력이 가세하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따라올 수 있었지?’
그러나 적의 접근방향은 함산 쪽이 아니었다.
그쪽 패거리가 아닌 다른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오는 게 분명했다.
숫자는 30여명.
함산에 모였던 대규모 부대와 비교하면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그 대신 그들은 은혈대법의 피로도 없는 상태일 것이었다.
기수는 청룡도 거인을 노려봤다.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헨젤과 그레텔이냐? 빵가루라도 뿌렸어?”
상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행적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사실은 지원군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이 분산된 기수는 대결에서도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