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82
기수와 탁지연은 수로맹 간부 진무와 밥이라도 함께 먹으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진채주. 아무래도 우리는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무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터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포구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진무와 헤어진 기수는 약속한 객잔으로 갔다.
풍매가 기다리고 있다가 세 사람을 맞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궁주의 내상을 치료하느라…”
풍매는 눈을 흘겼지만 곧 세 사람을 어느 저택으로 안내했다.
여염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창에서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건물이었다.
기수는 들어가는 동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본래 혈매궁과 동창은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건물 안에서 마치 한 팀처럼 움직였다.
전에 함께 지냈던 염백호가 풍매와 일행을 반가이 맞는 모습에서 그 전후 사정을 살펴 짐작할 수 있었다.
기수 일행이 들어가자 심각한 표정으로 숙의 중이던 공주와 제독동창 만욱이 일어나서 그들을 맞았다.
공주도 눈을 흘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상치료 때문에… 그보다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해 봐.”
공주는 만욱 쪽을 봤다.
만욱은 기수에게 먼저 인사부터 건넸다.
“혈매궁 궁주 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기수는 자기 본래 모습으로는 처음 만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중하게 포권했다.
“창주님을 뵙습니다.”
“역도들을 찾아내고 토벌하는데 궁주님의 활약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황실과 백성들을 위해 정말 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핫!… 부끄럽습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제가 황상께 표를 올리겠습니다.”
사실, 기수는 관직이 없기 때문에 동창의 창주가 이렇게까지 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혈매궁 궁주가 누구인가.
당금 무림 최고라는 평을 듣는 절정고수 아닌가.
게다가 혈매궁은 강남에서 장군부를 도와 강시를 토벌하고 일월신교를 박살내기까지 했다. 이런 사람과 문파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모반 대처에 큰 힘이 될 것이었다.
기수 역시 만욱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동창출신 사매들의 배신을 이번 기회에 용서(?)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들어오면서부터 그런 조짐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리고 만욱의 표정을 보니 절박함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환관은 본래 과거에 급제해서 관직에 오르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한 사람.
황제에 의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큼은 천하에 비길 데가 없었다.
황제가 무탈하게 오랜 기간 재위할수록 자신들의 권력도 오래 이어지기 때문에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 의미에서 반역이니, 모반이니 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군대가 움직이고 있으니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만욱은 지도를 보여주며 현재 상황을 브리핑했다.
기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오군도독부 중 모반한 3부는 자기네끼리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다른 2부는 공식적인 명령계통을 따르느라 대처가 늦었다.
병력에서 밀리는데다 대처까지 늦었으니 패전은 눈에 보듯 뻔했다.
“그럼 전멸 당할 수도 있는 겁니까?”
“그렇게까지야 되겠습니까? 아마 지연시킬 수 있을 겁니다.”
기수는 만욱이 상황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동창이라고 해도 군문의 일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기수가 공주를 보자 그녀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장군부 사람들은 지금 오는 중이야. 내일쯤 도착할 거야.”
공주가 턱짓을 하자 만욱은 접어두었던 종이를 펼치며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동안 이부상서 마원을 감시하면서 그린 조직도입니다.”
기수가 보니 적힌 이름들이 30여 명이 넘었다.
“이게 모두 모반에 연루된 자들입니까?”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마원과 사적으로 2번 이상 접촉한 자들을 모두 적은 것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일단 모두 잡아들일 생각입니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서 군대가 움직이고, 성 안에서는 내응하는 관리들이 봉기를 일으킨다면 정말 한 순간에 국가 권력이 뒤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연관 유무는 나중에 따져도 되니까 일단 구금부터 하는데 찬성이었다.
만욱이 말했다.
“오늘밤 당장 시행하려 하는데, 혈매궁에서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건 좀 이상한 부탁이었다.
“금군이 있지 않습니까?”
동창은 영락제 때 만들어진 조직이고, 원래 그 전신은 금의위였다.
금의위는 내정어림군(內廷御林軍)이라는 궁성을 지키는 병사들 중에서 무공이 높고 머리가 좋은 자들을 뽑아서 만든 정보기관이었다.
결국 내정어림군이 금의위와 동창의 뿌리가 되는 셈인데, 영락제 이후 환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동창이 생겨나자 동창, 금의위, 내정어림군이 모두 제각각 존재하게 되었고, 그 중 동창과 금의위를 합쳐서 창위라고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동창의 조직이 계속 비대해지고 금의위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서, 지금은 창위가 아닌 동창과 금군(금의위+내정어림군)으로 나뉘고 있었다.
모두가 황제 직속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욱은 기수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군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역도가 끼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흐음…”
기수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숫자가 많고 급여와 권력도 동창만큼 높지 않다면 얼마든지 틈이 생길 수 있었다.
오군도독부가 반란을 일으키는 마당에 금군을 믿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믿지 못하면 황궁을 어떻게 지킵니까?”
만욱이 대답했다.
“우선 종8품 이상의 모든 군관의 근무배치를 바꿨고, 명령계통도 단순화해서 우리가 믿는 세 명의 지휘관이 만사를 장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건 현명한 처사 같았다.
겉에서 봤을 때는 다 같은 금군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세부적으로 갈리는 조직과 계파가 있을 것이었다.
지휘관이 뒤죽박죽 섞이면 그동안 공들인 부하장악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다.
기수가 말했다.
“그들이 모반에 협력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체포령에 대해 얘기하면 외부로 정보가 새어나갈 수는 있겠군요.”
“바로 그것 때문에 이번 체포에는 믿을 수 있는 고수들이 필요합니다. 금군은 체포가 시작된 이후에야 동원해서 외곽을 지키도록 할 것입니다.”
기수는 미소 지었다.
동창 창주쯤 되니까 제법 머리도 쓸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장군부 사람들이 오기 전에 내부 정리하는 일부터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창과 혈매궁과 출동하는 체포 조 구성이 시작되었다.
기수는 혈매궁의 9명을 각각 1명씩 9개 조로 분산시켰다.
만욱도 직접 야행복 입고, 장검을 들고 참여하기로 했다.
그는 동창 수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각 조마다 지정된 관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휘하에 고수나 많은 사병(私兵)이 있어서 생포가 어렵다면 나누어 준 호각을 불어라. 일을 먼저 끝낸 쪽이 도우러 갈 것이다. 아무래도 놓칠 것 같다면….”
만욱은 잠시 수하들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죽여 버려라!”
내응 가능성이 있는 관리를 빠져나가게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만욱은 어린 환관에게 서찰 하나를 주었다.
“우리가 떠나고 즉시 금군사령관에게 가서 전해라.”
체포대상자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명령서였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만욱은 출발명령을 내렸다.
기수에게도 길안내 할 동창 소속 무사 네 명이 따라붙었다.
깊은 밤.
야행복 입은 괴인들이 고관대작의 집 담을 몰래 넘었다.
적은 인원으로 목표한 관리를 잡으려면 은밀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기수는 기감을 끌어올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를 파악했다.
체포 대상자의 관직이 높은 것도 아니고 저택이 크거나 하인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고수의 기도가 감지되었다.
‘청탑산 출신인가?’
기수는 손짓으로 동창 무사 4명을 관리의 침실 쪽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마당에 서서 진기를 슬쩍 노출했다.
그러자 한 남자가 급하게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웬 놈이냐?”
기수는 그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남루한 하인 차림새였는데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들려 있었다.
“후후… 이거 의외로 힘든 일이 될 것 같군. 모든 협조자에게 파수꾼을 붙여준 건가?”
“너는 누구냐? 어째서 야심한 시각에 남의 집에 침입했느냐?”
“은혈대법을 끌어올리는 게 좋을 거야. 기회는 한 번 뿐이니까.”
하인은 깜짝 놀랐다.
“뭐, 뭣이라고? 네가 어떻게….”
“난 혈매궁주다. 너희 동료들에게 생긴 일은 들었겠지?”
“혈매궁주!!”
하인은 즉시 은혈대법을 끌어 올리고 본색을 드러냈다.
기수는 미소 지은 후 비로소 손을 썼다.
강기 사용 없이 바짝 달려들어 팔과 다리로 분광권을 시전하여 그의 비수를 떨어트리고 마혈을 찌르기까지 시간으로는 2초 정도. 초수로는 일곱 초식이 걸렸다.
그 사이 동창 무사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관리를 끌어냈다.
기수가 턱짓으로 하인을 가리켰다.
“역모의 일원이니까 함께 압송해.”
4명은 각각 2명이 하나씩 좌우에서 팔을 끼어 번쩍 든 후 경공을 펼쳐 집을 벗어났다. 그제서야 잠귀 밝은 사람들 몇 명이 밖으로 나왔지만 마당에 비수 한 자루만 남아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네 명을 먼저 보낸 후 따로 남았다.
자기가 맡은 일은 빠르고 깔끔하게 끝냈지만 다른 사람들이 걱정이었다.
다른 곳에도 여기처럼 지키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매들 중에 청탑산 고수와 일 대 일로 싸워서 질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동창 출신 사매들 중에 체포와 훼방꾼 제거를 동시에 하려고 욕심내다가 혹시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눈을 감고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수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사매의 것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기수가 담을 넘어 보니 아까 자기가 들렀던 집과는 상황이 달랐다.
설매가 청탑산 고수로 보이는 자와 싸우는 중이었고, 동창 고수들은 하인과 식객으로 보이는 자들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 고전 중이었다.
관직도 높고 돈도 많아서 거느리는 사병도 많은 자가 걸린 것이다.
‘무공에 따라 제대로 좀 분배하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기수는 새처럼 날아 난전 한가운데로 뛰어들면서 양손으로 잔백지를 쏘아댔다.
파파파파팟!…
그것으로 상황 종료.
동창 무사들에게 달려들던 자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해보고 모조리 쓰러졌고, 청탑산 고수는 지풍을 몇 차례 튕겨냈지만 갑자기 나타난 고수에게 신경 쓰다가 설매의 검에 찔리고 말았다.
설매는 동창 무사들을 시켜 관리를 끌어내게 한 후 기수에게 말했다.
“고마워. 궁주.”
“여긴 저들에게 맡기고 다른 사매들에게도 가보자.”
“좋아.”
두 사람은 뒤처리를 맡긴 후 담을 넘었다.
북경은 대단히 넓지만 관리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몇 군데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찾기 어렵지 않았다.
설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아투사가 맡은 집이었다.
거기에도 역시 청탑산 고수가 있었는데, 그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투사의 뇌전격에 닿아 바닥에 쓰러진 후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아투사가 옆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다가 반쯤 일어나면 전기로 지지고, 다시 쓰러졌다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면 또 지지는 식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그만 해! 아투사.”
“아! 궁주 왔어?”
그녀는 못된 장난 하다 들킨 아이처럼 계면쩍게 웃다가 포로의 마혈을 눌러 제압한 후 동창 무사들에게 넘겼다.
동창 무사들은 행여나 아투사에게 닿을까봐 겁나서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세 명으로 늘어난 인원은 다른 사매들을 찾아갔다.
어느새 길가엔 금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급한 명령을 받고 출동한 것이다.
관리들은 모두 동창 고수들이 압송했지만 집에는 여전히 그에 협조한 무리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병력이 필요했다.
기수는 공주와 추매, 탁지연, 춘매, 동매, 풍매의 순으로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했다.
이후엔 세 명씩 조를 짜고 호각 소리가 나는 곳마다 나뉘어 가서 도와주었다.
청탑산 고수들이 성 안에 들어와 숨어있다는 사실이 이번 체포 작전에 큰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었지만, 혈매궁의 아홉 사람이 도운 덕분에 호각 소리는 모두 해결되었다.
기수는 마지막에 이부상서의 집에서 세 명의 청탑산 고수들을 만나 고전하는 만욱과 동창 고수들을 도와 세 명 모두를 제압해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부상서는 일행에게 호통을 쳤다.
“네놈들은 누구이기에 감히 이런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그러자 만욱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알다마다. 이부상서 마원. 전군도독 황호와 내통한 역모의 수괴 중 하나!”
“뭐, 뭣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가만… 이 목소리는 귀에 익은데…”
만욱은 복면을 벗어던지고 횃불 아래 얼굴을 드러냈다.
마원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그대는 만태감 아니오? 그, 그대가 어떻게…”
“후후… 천하에 우리 동창이 모르는 일이 있을 줄 알았느냐? 네놈들의 음모는 이미 밝혀졌다!”
“만태감. 그게 무슨 말이오? 음모라니…”
만욱은 냉소를 지었다.
“발뺌해도 소용없다. 너뿐만 아니라 그동안 네가 접촉한 관리들도 모두 체포되었으니까 국문장에서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마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기수는 그런 그를 보고 성취감을 느꼈다.
적의 계획 중 큰 부분 하나를 망쳤다는 데서 오는 통쾌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