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84
주일비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역적과 싸운다.
명분은 훌륭하지만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나 도독부의 오분지 삼을 움직일 정도의 힘 있는 세력이라면 얼마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무림맹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결정.
“흐음….”
주일비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군웅들의 시선을 살펴보았다.
젊을수록 자신의 결정을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결연한 의지에 가득한 표정들.
그들은 아직 이루어야 할 것들이 많은 나이.
그러나 결정권을 가진 각 문파의 수뇌부들의 표정은 또 달랐다.
주일비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했다.
정도무림을 대표하는 무림맹의 맹주로서, 결국 혈매궁주의 제안을 거부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조건으로 수락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무림맹의 힘을 보태라고 하셨는데, 그 주체가 혈매궁입니까?”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늙은 생강이 맵다는 건 좋은 의미의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이 나라 사람도 아닌 나도 반군을 치겠다고 나서는데 정말 이러기야?’
‘된나?’ 하면 ‘되따!’ 하고 확! 응해주는 맛이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무림맹 입장도 이해가 되어서 뭐라 대답할지 생각을 정리하는데 주일비가 다시 물었다.
“우리 무림맹이 그 역할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까?”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씨발아.’
버스 안에서 봤으면 자리 양보해줘야 할 노인이지만 솔직히 욕 나왔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가벼운 미소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기수가 대답하지 않아도 무림맹 사람들끼리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기수의 능력을 이미 여러 차례 직접 봤기 때문이다.
기수가 보니 주일비도 진짜로 주도권 잡을 생각으로 그 말을 꺼낸 건 아닌 듯 했다.
주일비는 슬쩍 진무 쪽을 본 후 말했다.
“수로맹도 거기에 가세합니까?”
무림맹이 한 때 사마연합 소속이었던, 적으로 맞서 싸웠던 수로맹과 손잡고 일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였다.
기수는 씩 웃은 후 대답했다.
“수로맹 뿐만 아니라 천마교도 함께 할 겁니다.”
“천마교라고요?”
주일비뿐만 아니라 다른 무림맹 군웅들도 표정이 변했다.
수로맹은 그렇다 쳐도, 천마교는 무림이 태동한 이래로 늘 정도 무림의 적이었기 때문에 약간은 더 부담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기수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혈매궁과 수로맹, 천마교는 어찌되었건 함께 할 것입니다. 거기에 무림맹이 낄지 말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해주십시오.”
우리끼리 하겠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군웅들이 웅성거리고 무림맹주는 눈치만 보자 기수가 다시 말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훗날 제자들이 물을 것입니다. 천마교와 수로맹도 황실을 수호하고 천하 만민의 안녕을 위해 떨쳐 일어섰는데, 무림맹은 그때 무얼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미리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단 위 높은 자리에 앉아 주일비와 함께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명문대파의 장문인들 얼굴이 눈에 띄게 변했다.
천마교, 수로맹과 함께 일단하는 게 사마연합에 속했던 적들과 함께 하는 모양새라 별로 탐탁지 않아 하던 그들이지만, 기수의 얘기를 듣고 나니까 다른 선택을 찾기가 어려웠다.
기수는 기분이 좋았다.
힘으로 콱! 누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로 자근자근 밟는 것도 아주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주일비가 심각한 표정으로 소림방장, 무당장문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놀이를 접기로 마음먹었다.
“주체에 대해 물으시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의 주체는 장군부입니다.”
석초는 흠칫 놀랐지만 곧 기수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로 포권을 했다. 그 말을 인정하는 제스처였다.
기수는 그의 눈치 빠른 대응에 만족했다.
기수의 의도는 명확했다.
주일비는 예전부터 혈매궁이 무림맹 위에 있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장군부를 위해 일하라고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 장군부에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사실은 굳이 밝힐 필요 없었다.
나중에 상황을 알아차리더라도, 그때 가서 빠지겠다고는 못 할 것이었다.
주일비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그적거리기만 할 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신중하기보다는 우유부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석초는 슬쩍 짜증나는 표정으로 기수를 봤다.
그러나 기수는 주일비가 결국 승낙할 것임을 알기에 여유를 가지고 기다렸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주일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역도 진영에 있는 청탑산 무리가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고 들었습니다만…”
기수는 속으로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후달리냐?’
물론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무림맹 군웅들 얼굴에 실망하는 표정이 여실히 보였다.
기수는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림맹주가 연속해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개인의 자질 문제라고 해도, 무림맹 전체의 사기를 떨어트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청탑산 역도들의 무공이 뛰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취의청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들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난주의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만들어진 커다란 청동화로.
자기 가슴 높이까지 오는 화로 앞에 선 기수가 말을 이었다.
“힘은 더 큰 힘으로 누르면 됩니다.”
기수는 진기 한 모금을 들이마신 후 비폭대라수의 기수식 부분을 시전했다.
순간, 취의청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쿠오오오오….!
검은 안개라도 낀 것처럼 시야는 제한되었고, 폭발하는 살기로 인해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서 무림 명숙들 대부분이 급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몇몇 무공이 처지는 젊은 군웅들은 가슴을 부여잡기도 했다.
압박하는 살기로 인해 호흡이 곤란해졌던 것이다.
기수는 무림맹 군웅들의 반응에 만족했다.
사실, 비폭대라수를 익힌 후 이 정도 본격적으로 운기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수백 명의 겁에 질린, 혹은 방어태세를 취하는 군웅들을 한 차례 쓰윽 훑어 본 기수는 오른손을 청동향로에 얹었다.
그리고 화류의 태포련을 끌어올렸다.
순간 손바닥와 청동향로 사이가 오렌지 빛으로, 그리고 점점 더 빛이 밝아지며 노란색, 흰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탄성과 경악성을 터뜨리며 눈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후 드러난 정경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청동향로의 위쪽 절반이 녹아서 구리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기수가 씩 웃은 뒤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닿으면 청탑산이고 역도고 다 한 줌 재로 변할 것입니다.”
취의청 내부는 조용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압도적인 힘의 우위.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방금 보여준 혈매궁주 기수의 무공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화양문주는 예전에 기수가 녹여 붙인 창칼 덩어리를 연무장에 전시해놓고 있었다. 그걸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기수는 재방송이라도 해주듯이 실력을 다시 한 번 선보인 것이다.
기수는 연기를 내며 청석 바닥으로 흐르는 구리물 때문에 화양문주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기물을 망가뜨려 미안하다는 의미였다.
화양문주 양호중은 넋 나간 표정으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기수는 주일비에게 다시 물었다.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리셨습니까?”
“하겠습니다!”
즉시 대답이 나왔다.
“우리 무림맹은 기꺼이 장군부를 돕겠습니다.”
맹주의 말이 떨어지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역도들을 물리치자!”
“반군을 무찌르자!”
기수와 같은 편이라는 점에서 다들 사기가 고양된 것이다.
기수는 석초와 진무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도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사실은 기수도 놀란 부분이 있었다.
향로와 손바닥 사이에 화염이 예상보다 적었다.
어찌 보면 불꽃 없이 열만 전해졌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화류 태포련도 업그레이드 된 건가?’
길이 달라도 정상에 오르면 결국 같다는 합비의 말이 생각났다.
그동안 목욕물 데우느라 열심히 실생활에서 사용하다 보니까 조금씩 레벨이 올라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부터 익혀버리는 그 궁극의 수법도 가능한 거 아닐까?’
그러나 자기 손부터 익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감히 시험해보지는 못했다.
일단 하겠다고 나선 주일비는 적극적으로 병력을 편성하고 배치했다.
타고 갈 수로맹의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기수는 비룡검문 문주를 비롯한 친분 있는 사람들을 따로 만났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무림맹 여인들의 내공수준을 점검(?)할 생각으로 마음이 잔뜩 들뜨게 되었다.
취의청에서부터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기대감은 기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공 증진 인스트럭터로서의 임무를 절대 게을리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방문객이 훼방을 놓았다.
바로 화양문 문주 양호중이었다.
“궁주. 오랜만이오.”
“그렇습니다. 하하!…”
“실은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왔소만…”
“예. 말씀하십시오.”
양호중은 기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석초와 진무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둘만 남게 되자 양호중이 입을 열었다.
“내겐 과년한 딸자식이 하나 있소. 궁주도 아마 알 거요.”
“예. 알고 있습니다.”
기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엄청난 부담감이 느껴졌다.
“내가 그 애를 시집보내려고 두루 혼처를 알아보는 중이오.”
“그, 그러시군요.”
“헌데 본인 의사도 알고 싶어서 물어봤더니 놀랍게도 궁주 얘기를 하지 않겠소?”
무슨 얘기를 어디까지 했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다 얘기한 걸까? 아냐. 이 시대의 딸이 아버지한테 할 수 있는 애기의 한계는 넘지 않았을 거야. 침착하자. 침착해.’
기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제 얘기를요? 어떤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시치미 떼지 마시오. 궁주. 이미 갈 데까지 간 것 같던데…”
“헉!…”
양여옥이 자기를 선점하려고 아버지한테 그런 얘기까지 했단 말인가?
양호중이 말했다.
“정자에서 단둘이 만나 달빛 아래 거닐며 담소를 나눴다던데, 궁주는 그걸 나한테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
“아! 그 일 말이군요…”
기수는 양호중이 예전부터 자기를 사위 삼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양여옥에게 자꾸 귀찮게 하니까 그녀가 대충 그런 사이라고 말한 듯 했다.
양호중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내 자랑은 아니오만, 우리 화양문은 환우구종의 일원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고, 지금은 당당히 9파 1방 4문 5가 중의 하나로 무림맹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소.”
기수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양호중은 밀어붙였다.
“우리 옥아가 혈매궁 궁주의 정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시오?”
직구가 날아 들어왔다.
기수는 풀스윙보다는 일단 커트를 택했다.
“저는 일정한 주거도 없고, 재산을 모아 놓은 것도 없습니다.”
“하하하! 그게 무슨 말이오. 당금천하에서 첫손가락 꼽히는 절세고수에게 그딴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오? 난주를 전부 그대의 집이라고 생각하시오.”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데릴사위로 삼겠다고?’
기수는 일단 결정을 뒤로 미루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중대사를 앞에 두고 있으니 이런 얘기하기엔 좋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양호중은 섭섭한 눈치였다.
“하하하!… 나도 당장 확답을 달라는 얘기는 아니었소. 잘 생각해 보시오. 비록 난주가 중원에서 약간 멀기는 하지만 문물이 풍성한 땅이오.”
“예. 알겠습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그렇게 양호중을 돌려 보낸 기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까지 수많은 미녀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그 미녀의 가족, 특히 장인 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와! 이거 장난 아닌데?’
정식으로 결혼을 할라치면 신분상으로는 공주가 정실이 되어야 할 텐데, 그 경우 장인은 황제였다.
기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자기가 벌여놓은 일이니까 사나이답게 책임도 져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결혼이란 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도 결합하는 것.
마누라 10명은 얼마든지 감당할 자신이 있지만, 거기에 따라붙는 장인 장모 처형, 처제, 처남 10세트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