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92
개봉성 가까이 간 기수는 민가로 들어가 허름한 농부의 옷과 자기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상당히 소심하고 나약해 보이는 남자 얼굴로 역용한 뒤 얼굴과 옷에 흙까지 묻혀서 피난민 행세를 하기로 했다.
개봉성 주변은 전쟁터였다.
민가가 점령당한 것은 물론이고 벌판마다 군영이 세워져서 온통 반란군 천지였다.
“야! 너. 이리 와 봐.”
관도 길목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기수를 불렀다.
“예? 저, 저 말입니까?”
기수는 일부러 어눌한 척 좌우를 둘러보다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너. 왜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어?”
“그, 그건… 난리를 피해서 허창으로 가려고…”
그러자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멍청한 놈. 허창은 반대쪽이다.”
“그, 그런가요?”
“호랑이를 피해 도망친다는 놈이 길을 반대로 접어들다니, 이런 바보 같은 놈이 또 있을까?”
멍청이, 바보 소리를 연달아 들으니까 기수도 발끈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까?”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죽어 버릴까? 라고 했습니다.”
“하하하!… 그래. 너 같은 놈은 밥 먹고 숨 쉬는 게 아깝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를 위해서 일을 좀 해줘야겠어.”
“무슨 일 말씀입니까?”
“개봉성을 치는데 놈들의 저항이 심해서 말야. 백성들의 도움을 좀 받고 있지.”
“아! 그렇군요.”
기수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자기를 붙잡고 장난치는 병사가 6명. 그 뒤 천막 안에 또 6명 정도가 있었다.
그때 병사 한 명이 말했다.
“이놈 이거 왜 자꾸 두리번거려? 혹시 좀 모자라는 놈 아냐?”
그러자 다른 놈이 맞장구를 쳤다.
“모자라도 다 쓸 데가 있어. 맞으면 말을 듣게 되어 있거든.”
기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그들에게 말했다.
“세 번까지 참는 건 그렇지? 수혈 대신 사혈 당첨이다.”
“이 새끼 이거 뭐라는 거야?”
순간, 슈슈슈슉! 하는 파공음과 함께 잔백지가 작렬했다.
6명의 쓰러져 바닥에 닿기도 전에 기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도 한 명만 빼고 모두 사혈을 짚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을 잡아놓고 특유의 심문을 했다.
알아낸 바에 의하면 개봉성 앞에서는 지금 충차와 발석거가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를 위해 백성들을 강제 노역 시키는 중이었다.
‘햐! 요놈들. 별 걸 다 만드네… 역시 제갈세가를 살려둬선 안 돼.’
기수는 마지막 한 놈의 사혈도 누른 뒤 밖으로 나가 개봉 성벽을 따라 걷다가 공사현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위협적인 기계들이 상당 수준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성 안의 사람들이 상당히 불안해 할 것 같았다.
기수는 공사장 감독하는 병사들의 위치를 파악한 후 슬그머니 노역하는 사이에 끼어 들어갔다. 워낙 광범위한 구역에 걸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도주 차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기수는 나무 기둥 하나를 어깨에 이고 다니면서 상황을 살폈다.
도면을 펼쳐놓고 공사를 감독하는 자들은 모두 제갈세가 사람들이었다.
‘삼부자도 여기 있겠구나!’
기수는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예상대로 작업장 중앙에 자리 잡은 군막에 제갈빈이 있었다.
그러나 가주 제갈청과 장남 제갈민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반군 수뇌부들과 함께 있고 공사장은 제갈빈에게 모두 맡긴 듯 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하나씩 제거하는 수밖에…’
기수는 인부들 사이에 섞여 허드렛일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주변이 어수선해지면서 병사들이 작업장 안으로 들어와 설치고 다녔다.
인부들 사이에 퍼지는 얘기를 듣자니 남문 밖 초소가 습격당해서 병사들이 모두 죽었고, 그 때문에 지금 특별 경계령이 내렸다는 것 같았다.
‘빨리도 알아차렸네.’
기수는 그들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수혈을 눌렀으면 깨어나서 본 것을 나불거렸을 테니 지금보다 더 귀찮은 상황이 만들어졌을 것이었다.
현재 인부들 사이에 섞여 있는 기수는 누구도 특이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외형적으로 완벽하게 녹아 들어가 있었다.
문제는 제갈빈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손을 쓰면 간단하겠지만, 무림고수가 외곽 경비병에 이어 제갈빈마저 죽였다고 알려지면 남은 두 부자가 깊이 숨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
마침 눈에 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큰 체격에 허리엔 검과 활을 차고, 등엔 전통을 메고 있는 40대 사내였는데, 손에 든 채찍으로 노역 중인 백성들을 재미 삼아 후려치는 중이었다.
기수는 그에게 분노를 느꼈다.
‘군인이 국민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지. 녹봉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안다면…’
기수 역시 군인이 국민을 죽인 과거를 가진 나라 출신이라 그런지 그 군관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는데 하등의 거리낌이 없었다.
염정구심술은 원래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게 첫 단계고,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게 두 번째 단계였다. 기수는 기술을 익히고 나서 두 번째 단계에 재미를 들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윤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첫 단계와 달리 의외로 부작용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수는 군관을 상대로 뇌파동조를 시도했다.
거기까지는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 시험 삼아 명령을 내리자 채찍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군관은 깜짝 놀라 진땀을 흘렸지만 손가락 하나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부관이 깜짝 놀라 채찍을 주워들고 군관에게 공손히 바쳤지만 군관은 그걸 받지 못했다. 대신 손으로 자기 뺨을 퍽! 소리 나도록 한 번 후려쳤다.
기수는 씩 웃었다.
염정구심술은 아무런 거부반응이나 부작용도 없이 완벽하게 성공이었다.
자신의 내공이 깊어진데다가 상대의 내공과 정심(正心)이 나약하다는 요인이 합쳐졌기 때문인 듯 했다.
군관은 제갈빈의 군막으로 다가갔다. 기수도 그를 바짝 따라갔다.
제갈빈은 도면을 펼쳐 놓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군관과의 거리는 10미터 남짓.
기수는 즉시 염정구심술을 시전하여 마치 리모컨으로 조종하듯 군관의 몸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에 묶은 활을 풀고 어깨 너머로 화살을 꺼내어 잰 후 잔뜩 잡아당기며 제갈빈을 겨냥했다.
그때, 부관이 깜짝 놀라 군관을 말렸다.
“장총기님! 왜 이러십니까? 왜 활은 겨누십니까?”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제갈빈은 웬 덩치 큰 사내가 자기를 향해 활 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검을 뽑았다.
순간, 시윗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갔다.
제갈빈은 황급히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고, 기수는 침음성을 흘렸다.
상당히 짧은 거리였는데, 그래도 무림인이랍시고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제갈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기수는 그가 엉겁결에 막았을 뿐, 화살을 확실히 보고 쳐낼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잽싸게 두 번째 화살을 재고 곧바로 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제갈빈은 고함을 지르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잘 날아오던 화살이 갑자기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휘어지는 바람에 검은 허공을 휘저었고, 화살은 그의 배에 박히고 말았다.
기수가 수류 태포련을 이용하여 날아가는 화살의 진로를 바꾼 것이다.
“크윽!….도, 도대체 왜….?”
제갈빈은 박힌 화살을 움켜쥐고 무관을 노려봤다.
생면부지인데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관의 두 눈이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두 눈은 그렇지만 몸은 달랐다.
연달아 화살을 재서 3번째, 4번째를 쐈다.
제갈빈은 검을 휘둘러보았지만 이미 막아낼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5대의 화살을 차례로 맞고 절명하고 말았다.
군관은 활을 버리고 그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의 검을 뽑아 제갈빈의 목을 힘차게 찌르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가문의 원수! 이제야 네놈을 내 손으로 죽였구나. 크하하하!….”
그리고 거기서 기수의 염정구심술이 풀렸다.
“으아악! 내, 내가 어째서…”
관리는 검을 버리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제갈세가 문인들은 3공자가 죽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무관을 포박했다. 그리고 즉시 가주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기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기다렸다.
그동안 잘도 숨어 다니면서 배후에서 일을 꾸며댔지만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조사를 위해 나타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과연, 30분도 지나지 않아 장남 제갈민이 나타났다.
기수는 가주 제갈청도 올 거라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제갈민은 동생의 시신을 부여잡고 한바탕 괴롭게 울다가 문도들에게 무관을 압송하라고 지시했다.
따로 데려가서 최조를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기수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쉽군. 1타3피는 안 되겠네.’
사실 1타2피만 해도 상당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셋이 함께 하던 일을 혼자 다 하려면 부하가 많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기수는 슬그머니 제갈민 근처로 다가갔다.
워낙 튀지 않는 외모이다 보니 누구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한 무리의 무관들이 몰려왔다.
제갈세가에서 자기네 동료를 압송한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오?”
“저 자가 내 동생을 죽였소.”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장대인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나도 그걸 묻고 싶소. 도대체 왜 그랬는지.”
비록 제갈세가와 반군은 협력하는 사이지만 소속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 자기네 사람이 그냥 끌려가도록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도독님 앞에 가서 시비를 따집시다!”
“현행범으로 잡혔는데 무슨 시비를 따진단 말이오?”
양쪽의 분위기는 험악해져서 서로 몸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그 다툼 사이로 한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누구도 주의해서 보지 않았다.
기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한 무관이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순식간에 제갈민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크어억!….”
제갈민은 눈을 부릅뜬 채 기수를 노려봤다.
그가 도대체 언제 손을 썼고, 또 왜 자기를 죽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수가 그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외세를 끌어들여서 자기 욕심 채우는 무리는 매국노에 배신자야. 살려두면 나중에 꼭 자기를 합리화하거든? 여기서 죽는 게 맞아.”
“너, 너는…”
“후후… 안 가르쳐주지.”
반군 장교들과 제갈세가 문인들은 자기들이 보는 앞에서 제갈빈에 이어 제갈민까지 목숨을 잃게 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이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기수에게 검을 빼앗긴 장교가 어깨를 움켜쥐는 순간, 기수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밀집된 좁은 공간에서 상대의 관절을 꺾은 후 금나수로 잡아당겨 풍차처럼 회전시켰고, 그로 인해 약간의 여유 공간이 생기자 그 다음은 잔백지가 연속 발출되었다.
슈슈슈슉!
적은 숫자가 많았지만 한꺼번에 서너 명씩 쓰러지다 보니 기수를 잡기는 커녕 동료에 떠밀려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기수는 여유만만하게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고 발석거용 긴 통나무 하나를 들어 회전시켜 원을 만들면서 나아갔다.
병사들은 감히 그 반경 안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성벽 가까이 접근한 기수는 통나무를 해자에 던지고 물 위에 뜬 통나무 위를 가볍게 점프하여 건너편으로 간 뒤 성벽을 툭, 툭 차고 단번에 위로 올라가버렸다.
쫓아가던 반군 장교들과 제갈세가 문인들은 기수의 경공 실력에 놀라 그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 감히 따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놀라기는 성벽 위의 수비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 진영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져서 다들 성벽 위로 올라가 무슨 일인가 구경하고 있었는데, 사람인지 원숭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몸놀림으로 한 사내가 성벽을 거의 날아서 올라온 것이다.
수비군들은 기수가 걸어오자 뒤로 물러서며 길을 내주었다.
기수는 장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를 도지휘사님에게 안내해주십시오.”
그가 개봉성 입성을 결심한 것은 목표한 제갈세가 삼부자 중 아직 처리하지 못한 한 명이 남았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며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 허창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장교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대는 누구시오?”
“주변을 물리쳐주시면 제 신분을 밝히겠습니다.”
장교가 손짓으로 병사들을 물러서게 하자 기수는 그에게 금패를 보여주었다.
장교는 화들짝 놀라는 한 편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드, 드디어 원군이 오는군요!”
기수는 어정쩡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 어쨌거나 저를 따라오십시오.”
장교 역시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 기수의 경공을 보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 고수이고 어사금패까지 가지고 있다면 희망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장교의 안내에 따라 시내로 들어간 기수는 개봉성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도지휘사 전중을 만났다.
그는 반백의 수염을 휘날리는 인상 좋은 남자였는데, 금패를 확인한 뒤 기수를 상석에 앉히고 정중하게 읍을 했다.
“대인을 뵙습니다.”
기수 입장에선 나이도 그렇고, 자기가 벼슬 없는 서민이란 점에서도 몹시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